윤석열 대통령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의협심이다. 국어사전은 의협심을 이렇게 풀이한다. 첫째 "남의 어려움을 돕거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려는 의로운 마음" 둘째, "체면을 중히 여기고 신의(信義)를 지키는 마음", 즉 한번 스스로 옳다고 판단하면 직진하는 '노빠꾸'의 이미지다. 언어는 사유하는 자의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공유되는 순간 의미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다는 점이다.
기표와 기의는 일치하지 않으며, 언어는 세상을 재현할 수 없다. 언의의 의미는 상황과 타이밍, 그리고 맥락 속에서 특히 변한다. 그때 발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발화된 언어의 의미는 사회적 공감의 강도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한 단어가 단일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자주 착각하지만 사실 언어의 의미는 다수결, 즉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의미에 공감하느냐에 의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의협심이라는 말이 강직한 검사에게 사용되는 것과, 깡패들에 의해 사용되는 것은 다르다. 검사도 의협심이 강하다고 평가될 수도, 깡패도 의협심이 강하다고 평가될 수도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주로 조직끼리의 의리를 유지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고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 일제 강점기 깡패들도 스스로를 협객이라 칭했다. 하지만 깡패는 깡패다. 깡패 사회에서 스스로 부여하는 의협심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핍박하는 자의 의협심과 핍박 당하는 자의 의협심도 다르다. 의협심엔 전제가 있다.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한 의협심이냐,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한 의협심이냐. 전자와 후자 모두 위험성을 내포한다. 사적 인간의 의협심은 중요할 순 있지만 현대 민주주의의 복잡하고 다원화된 맥락 속에서 공적 인간의 의협심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가 중요한 것 같다.
이번 대통령 비속어 논란을 보면 그렇다. 바이든이라고 들리는 사람이 많은가, 날리면이라고 들리는 사람이 많은가를 따졌을 때, 바이든이라고 들린다는 데 공감하는 사람이 많으면, 아무리 발화자가 '날리면'이라고 했다거나, 혹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단어는 '바이든'으로 사회적 다수의 점유물이 된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발화자가 주장한 '날리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헌데 발화자는 아직까지도 직접 '날리면이라고 말했다'는 명확한 해명을 한 적이 없다. 발화자를 보좌하는 대통령실이 음성 분석 전문가에게 의뢰했을 정도니, 대통령의 주장과 5000만 청자의 주장이 완전히 다른 이 상황을 대통령실까지도 우려하고 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는 어떤 사건보다 그 사건을 대하는 정치인의 태도에 따라 유권자들의 태도도 결정된다고 한다. 최초로 "국회 이XX들이 승인 안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말이 영상으로 퍼졌을 때, 대통령실이 15시간 동안 침묵하다가 뒤늦게 "바이든이 아니고 날리면"이라고, "이XX들은 미국 의회가 아니고 한국 국회"라고 말했을 때, 대다수의 청자들은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바이든'이라고 들었다 믿는 사람들은 이제 두 가지의 선택지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대통령의 귀국을 기다렸다. "핫 마이크 논란이 벌어져 유감이다. 가벼운 농담이었고 진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으면 비판을 좀 받더라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자신의 발언에 대한 설명 대신 "한미 동맹을 해치는 위험한 행동"으로 버젓이 존재하는 영상을 보도한 언론사를 때리고, 자신의 발언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일갈했다. 한번 옳다고 판단하면 수천만명이 아니라고 해도 밀고 나간다, 어디에서 많이 본 느낌이다.
보통 사람들은 청자가 우연히 엿듣게 된 자신의 혼잣말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더라도, 청자가 제시한 영상을 통해 기록된 게 확인되면 곧바로 시인한다. 보통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윤 대통령의 참모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바이든'이라는 단어를 쓴 기억이 없다고 한다. 영상에서 '바이든'이라고 들릴지언정, 바이든이라는 단어를 본인이 쓴 적이 없다고 하니, 윤 대통령이 인식한 주관적 사실은 '바이든'이 아니어야만 한다.
이런 논법은 법률가들의 논법이다. 이를테면,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의 얼굴과 비슷한 윤곽의 인물이 영상에 등장하더라도, 본인이 부인하고, 그 곳에 간 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 곳에서 김학의 전 차관을 목격한 사람이 있더라도 양 쪽의 주관적 사실들이 부딪히게 된다. 영상과 음성마저 증거 능력을 잃게 되면, 객관적 판단은 무의미해진다. 이번 사건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말실수 논란이 법정 분쟁으로 가는 흔한 사례 중 하나일 수 있다.
검사 윤석열은 2013년 국정원 댓글 수사팀장을 맡은 상황에서 밀려나자, 국정감사장에 나와 "검사장님 모시고 이 수사를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며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검찰총장 시절 조국 전 법무부장관 수사 때도 그렇다. 국회가 청문회 날짜도 합의하기 전 압수수색부터 들이 밀어 국회의 반발을 샀을 때도 좌고우면하지 않는 '노빠꾸' 스타일은 검사로서의 의협심으로 해석됐다.
'노빠꾸' 스타일은 대통령 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청와대에 단 하루도 있을 수 없다며 무리하게 용산 이전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온갖 구설수가 터져 나왔다. 급기야 자신이 한 발언에서 욕설이 포착됐는데 영상으로 남은 객관적 자료를 부인하더니, 영상을 보도한 매체 140여 개 중 한 곳을 찍어 공세를 펼친다. 자신의 발언이 '진상 규명'돼야 한다는 유체이탈적 화법도 등장했다. 한번 옳다고 믿으면 그대로 간다.
뚜렷한 비전이 없는 그가 '자유'를 자신이 트레이드마크로 들고 나왔을 때도, 의협심의 맥락으로 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 대선 출마 선언 때 자유 민주주의를 언급한 적이 있지만,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윤 대통령이 내세운 것은 '전 정권 심판'과 '민생을 돌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전 정권을 이념적이라고 규정한 그가 당선 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자유'라는 이념화된 가치였다.(프레시안 박세열 기자)
검사 윤석열의 의협심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일관되게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그게 이상한 맥락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피압박자의 의협심과 권력자의 의협심은 그 성분 자체가 다르다. '의협심 대통령'은 다양한 사회 갈등이나, 고도의 외교 정책, 세심한 경제 정책에 어울릴까? 간단한 사과로 끝낼 일을 '한미동맹을 파괴하려는 언론사의 획책'으로 규정하고 지금 그는 검찰총장 시절 방식의 싸움을 시작하고 있다.
우린 철학 없는 정치인이 이미지만으로 대통령이 됐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생생하게 겪고 있다. 언어는 생물이고, 사회는 생물이고, 우린 종종 '의협심'과 같은 불분명한 가치에 취해 비이성적인 선택을 한다. 윤 대통령은 이 문제가 고집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빠르게 수습하길 바란다. 검사 시절, 후보 시절의 '노빠꾸' 스타일은, 5000만을 모두 껴안아야 할 대통령직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