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우리를 눈뜨게 하고 (외 1편)
이민하
우산 말고 양철 지붕은 어때요
빗살무늬 우리 집을 빌려드릴게요
비가 그쳐도 꼬인 길은 펴서 말릴 수 없는데
내가 떠나도 식탁 위엔 쥐들이 꼬일까요
빈 상자 속의 고양이를 빌려드릴게요 네 마리나 있어요
손발이 맞는다면 굳게 닫힌 벽장을 빌려드릴게요 열쇠를 꽂아둘게요 반짝반짝
눈빛이 통한다면 어둠 속의 시집을 빌려드릴게요 접었다 폈다 할수록
손금처럼 선명해지는 유언들
죽은 엄마를 빌려드릴게요 예측 가능한 단 하루
죽은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빌려드릴게요
사십 년 묵은 핏물로 쓸 만한 게 있다면
항아리 같은 내 몸도 빌려드릴게요 아직 깨지지 않아서
겨울이 오면 이 집에서 난 쫓겨나요
집주인은 카페를 지을 거래요 이 골목엔 그런 카페가 셋이나 더 있는데
집주인들이 모두 카페 주인이 된다면
골목에서 잠은 사라져버릴까요 약속이나 한 듯이
카페 주인들이 어느 날 모텔 주인이 된다면
한 푼씩 모은 잠마저 탕진하는 날이 올까요
공복의 혀가 잠 못 드는 밤
데스크에서 퍼뜨리는
꽃 뉴스 말고 앵무새는 어때요
여린 주먹을 말아 쥐고 받아쓰기를 하는 아이들의 노동을 빌려드릴게요
담보로 잡힐 목숨도 없이 새벽 거리를 횡단하는
유령들의 국가를 빌려드릴게요 남아도는 재난을 떨이로 드릴게요
서로가 거울이 되어 하얗게 질리는
전쟁 같은 침묵 속에서
입만 열면 까르르 쓰러지는 애인을 빌려드릴게요
새로운 시작처럼 텅 빈 통장을 거저 드릴게요
똑. 딱. 똑. 딱. 한국어로 맴도는 시간 너머로
함께 넘었던 꿈의 국경을 덤으로 드릴게요
그 속에서 당신은 웃었던가요
칼바람이 꿈을 자르는 길 위에 서서
잠은 좀 잤나요 당신의 어딘가에도 나의 첫 페이지가 있나요
타이피스트
어느 날 집이 넓다고 느껴져서 빈 공간을 자르기로 했다
톱으로 자를 수 없어서 부피를 늘리기로 했다
책들을 교배해서 새끼를 쳤다
표가 나지 않아서 식탁이며 소파며 장롱을 주문했다
택배원과 손발이 맞질 않아서 사당동 가구거리를 돌아다녔다
두 발로는 부족해서 사람들을 훔치러 다녔다
시간이 바닥나서 후생까지 끌어다 썼다
죽음이 모자라서 킬러가 되었다
의자마다 시체를 앉히고 건조대에도 널어 말렸다
기술이 늘어서 찬장 서랍에 토막들을 쌓았다
옷걸이에 사지를 걸고 책꽂이에 뼈다귀를 꽂았다
발에 자꾸 밟혀서 냉장고며 침대며 세탁기를 벼룩시장에 내놓았다
그래도 집이 좁다고 느껴져서 나를 자꾸 검은 봉지에 담았다
새벽이면 끌고 나와 허공의 유리문 앞에서 기다렸다
붉은 등이 켜지면 구름의 갈고리에 걸었다
⸻월간 《현대시》 2022년 1월호, 2010년대 후반기 한국시의 새로운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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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 1967년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미기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