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4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하루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동행하는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뜻을 이루고자 애쓰는 자가 아니라 나를 품고 계시는 주님의 뜻인 영생을 이루는 자로 서게 하옵소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셨사오니 오늘도 말씀 묵상을 통해서 주를 더 깊이 알아가는 이 시간이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님은 진리시오니 나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주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라 하셨습니다(요 8:24, 28).
‘내가 그’라는 주님의 신명(神名)이야 말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모세에게 계시해 주신 그 이름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토록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지요.
나 또한 우리 주님 안에 거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자로 있길 원합니다.
날 주의 손으로 장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벧전 2:11-25
제목 :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나의 묵상
사랑하는 형제들인 성도들은 하늘에 본향을 둔 자들로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들이다.
따라서 여러분의 영혼에 싸움을 걸어오는 육체의 쾌락을 멀리하라.
이방인들 앞에서는 더욱 여러분의 행실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분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욕을 하던 사람들도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를 위하여 국가의 모든 법에 순종하라.
또한 나라의 주권자인 왕에게 뿐 아니라 총독에게도 복종할 것은 이들은 행악한 자들은 벌하고 선을 행한 자들을 가려 상을 주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올바른 삶의 모범을 보여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깔보고 비웃는 자들의 입을 막기를 원하신다.
여러분은 율법에 대하여 자유인이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악한 짓을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는 한도 내에서 자유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경하라.
아랫사람들은 주인을 존경하고 어떠한 명령에도 복종할 것이다.
친절하고 사리판단이 명확한 주인에게만 아니라 잔인하고 난폭한 주인에게도 복종하라.
만일 여러분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벌을 받았거든 주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라.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분이 악한 일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다면 그것을 참아낸다고 무슨 상을 받겠는가? 옳은 일을 한 것으로 벌을 받고도 말없이 참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그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 그 자취를 따르게 하셨으니 그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라.
그리스도는 단 한 번도 죄를 짓거나 거짓말을 하신 적시 없으시다.
모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아도 보복하지 않으셨다.
그는 언제나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셨다.
그리고 몸소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떠나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신 대신 우리가 낫게 된 것이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을 떠나서 길 잃은 양처럼 헤매 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적이 공격해 와도 여러분의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 주시는 감독자와 목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다.
19, 20절은 성도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 중에 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임을 밝혀 고난을 인내로 감수할 것을 권면한다.
21-25절은 애매한 고난에 대한 인내의 모범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묵묵히 십자가 고난을 감수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으셨음에도 묵묵히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다.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 자취를 따라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이신 당신이 친히 인내의 본을 보이신 것이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전에는 모두 길을 잃은 양과 같았지만 이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주님께 돌아와 길을 찾게 되었음을 확증한다.
따라서 결국 성도들이 고난을 인내로 감수해야 할 당위성을 분명히 말해준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따라가는 자들이다.
주께서 행하신 모든 선은 당연히 본받아 따라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죄를 범치 않으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악을 당하셨으되 이에 맞대어 욕하지도 않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아버지께 모든 것을 부탁하셨고 아버지의 뜻대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는 죽게 하시고 의에 대하여는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살지 못하였다.
심지어 전도를 하러 나갔다가 나이도 어린 사람이 전도하는 나를 향하여 예수를 욕하고 무시하는 통에 그 화를 찾지 못하고 분을 냈던 적도 있었다.
이런 나의 모습은 주님이 말씀하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우리도 본받아 그 자취를 따라오라는 말씀에 정면으로 부정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당하는 모욕과 수모를 견디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나를 드러내려는 자기주장의지에 한없이 연약하여 넘어지기 일쑤다.
이것이 나의 진면목이다.
이런 내가 목사요 선교사이다.
이런 나는 마땅히 죽임을 당하여 지옥의 아랫목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를 끝까지 참으시고 아주 진멸하지 않으셨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하시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모진 고난을 부으셨다.
나는 이런 고난 앞에서 크고 작은 나의 죄들을 회개하였다.
그렇다고 내가 어찌 내가 그동안 지었던 모든 죄를 다 회개하였겠는가?
내가 회개한 것은 아마 100%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나를 아주 멸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목자되신 주님의 양으로 삼으시고 아들의 생명까지 주신 것이다.
오늘도 나는 그 생명으로 살아간다.
나는 목사요 선교사로서 이 땅을 살아가지만 도덕과 윤리 그리고 사회법적인 차원에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 의(義0가 숨겨져 있다.
따라서 그런 도덕 윤리 사회법적인 선을 행할지라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의 마음과 입술을 통하여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무엇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이 땅에 살아가는 날 동안 주님의 그 발자취를 따라가기를 소망한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나의 연약함으로 넘어지는 나를 볼 때 내가 느끼는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이 나의 실존임을 알아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을 행하기보다 나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구할 뿐이다.
그것이 주인에게 칭찬을 받은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눅 16장)임을 믿는다.
그는 자기가 잘 하고 싶어서 갖가지 꼼수를 쓰지만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이 다 주인에게 손해를 입힐 뿐이다.
그럼에도 그가 끝까지 붙드는 한 가지는 다름 아니라 주인이 베풀 은혜를 붙드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주인은 그가 지혜 있게 행한 것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나는 그 불의한 청지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의한 자이다.
그러나 내가 끝까지 믿는 것은 나를 구원하실 아니 이미 구원하신 우리 주님의 창세전 언약이다.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미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로 택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 수 없다(롬 9:13-14).
이것이 창세전 언약이다.
나를 그 구원의 반열에 올려놓으신 것은 나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다.
그 은혜 안에서 나는 오늘도 주를 위하여 살아간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 안에 내가 거하는 연합된 자로 산다.
그 삶은 보기에 좋은 것만 아니라 무덤과 같은 고난도 함께 연합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생명이 나온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 묵상 후 기도
주님...
이 땅에서 주어진 인생을 사는 나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불의한 자입니다.
그런 나는 마땅히 지금 지옥으로 던진다 해도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주시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창세전 언약에 따라 나를 선택하시되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나의 공로나 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의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곳은 지옥의 아랫목이지만 주님께서 그곳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나를 가장 안전하고 좋은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자격 없지만 오늘도 성령 안에서 아버지의 품속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나는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요 자격 없는 무자격자임에도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그 날을 사모하며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행함을 자랑하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 그저 나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자로서 면목 없음과 죄스러움 그리고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 앞에서 다소 뻔뻔함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