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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출장, 7(2017. 01. 05) 전철타고 왕푸징(王府井) 구경가기 왕푸징은 원래 자금성의 전용우물인‘왕가의 우물’이 있던 곳으로 우물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도 청동 표식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는 북경의 중심가로서 서울의 명동과 비슷하게 도심상권이 집중된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묵었던 크라운 호텔에서 왕푸징 까지 전철로 가기위해서는 호텔에서 가까운 <10호선의 즈춘리(知春理)역에서 승차하여 후이신시제난커우(惠新西街南口)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한 후 둥단(東單)역에서 1호선으로 다시 환승하여 왕푸징(王府井)역에서 하차>하면 됩니다. 북경은 전철이 15호선 까지 건설되어 있어 사통팔달 연결되지 않은 곳이 없어서, 시내에서의 이동은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 빠르고 편리하였습니다. 陽貨欲見孔子(양화욕견공자)어늘 孔子不見(공자불견)하신대, 歸孔子豚(귀공자돈)이어늘, 孔子時其亡(無)也而往拜之(공자시기무야이왕배지)러시니 遇諸塗(우제도)하시다. 양화가 공자를 만나고자 하였으나(공자가 찾아와서 자신을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공자께서 만나주지 않으시자, 양화가 공자에게 삶은 돼지를 선물로 보내었는데, 공자께서도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사례하러 가셨다가 길에서 만나셨다. 謂孔子曰(위공자왈)“來(래)하라! 予與爾言(여여이언)호리라.”曰(왈)“懷其寶而迷其邦(회기보이미기방)이 可謂仁乎(가위인호)아?”曰(왈)“不可(불가)하다.”好從事而亟失時(호종사이기실시)가 可謂知(智)乎(가위지호)아?”曰(왈)“不可(불가)하다”“日月(일월)이逝矣(서의)라 歲不我與(세불아여)니라!”孔子曰(공자왈)“諾(낙)다 吾將仕矣(오장사의)로리라.” 양화가 공자에게 말하기를,“이리 오시오! 내 그대와 더불어 말을 하겠소.”하였다. <공자가 다가가시자>훌륭한 보배를 품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것을 仁이라고 할 수 있겠소?”하니, 공자께서“할 수 없소.”하셨다. 양화가“從事(종사)하기를 좋아하면서 자주 때를 놓치는 것을 智 라고 할 수 있겠소? 하니, 공자께서 ”할 수 없소“하셨다. 양화가“해와 달(세월)이 흘러가니, 세월은 나를 위하여 기다려 주지 않소.”하니, 공자께서“알았소, 내 장차 벼슬을 할 것이오.”하셨다. (歸 : 보낼 귀, 여기서는‘음식 보낼 궤’, 時 : 틈탈 시, 엿볼 시, 亡 : 없을 무, 瞰 : 볼 감, 迷 : 혼미할 미, 亟 : 자주 기 ) -논어 양화 1장- 今釋(茶山의 해석) 양화가 공자를 불러 만나자고 했으나 공자께서 그를 만나주지 않자, 그는 공자에게 익힌 돼지 한 마리를 보내어 공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그의 집을 방문하도록 했다. 공자께서는 그의 뜻을 알고 그가 외출한 틈을 타서 사례하러 가다가 뜻하지 않게 도중에서 양화를 만났다. 양화가 공자께“자, 오시오, 내 당신께 얘기 좀 하리다. 만일에‘귀한 재덕을 감추고 자기 국가가 혼란한 것을 알면서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을 仁 이라 하리까?’라고 말하면, 마땅히‘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정치에 종사하고 싶으면서 자주 그 벼슬할 기회를 놓치고 있으면 지혜롭다고 하리까?”라고 하면, 역시‘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듯이 사람도 하루하루 늙어가고 세월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께서“그렇습니다. 내 장차 나아가 벼슬을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章에서는 가까이하지도 멀리하지도 않는 공자의 태도와, 공자가 季氏(계씨)의 가신 양화에게 오고 간 경과를 기록하였다.
朱註(朱子의 집주) ①朱子(朱熹) 陽貨는 季氏家臣이니 名은 虎라 嘗囚季桓子而專國政하니라 欲令孔子來見己나 而孔子不往하신대 貨以禮에 大夫有賜於士어든 不得受於其家면 則往拜其門이라 故로 瞰孔子之亡而歸之豚하여 欲令孔子來拜而見之也라. 양화는 계씨의 가신이니, 이름은 虎(호)이다. 일찍이 계환자를 가두고 국정을 전횡 하였다. 그는 공자로 하여금 찾아와서 자기를 만나게 하려고 하였으나 공자께서 가지 않으셨다. 양화는 禮에“대부가 선비에게 선물을 하였는데 선비가 자기 집에서 직접 받지 못하였으면 대부의 집에 찾아가 답례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공자가 집에 없으신 것을 엿보고서 돼지를 선물하여 공자로 하여금 와서 답례하려고 한 것이다. 懷寶迷邦은 謂懷藏道德하여 不救國之迷亂이라 亟는 數(삭)也라 失時는 謂不及事幾之會라 將者는 且然而未必之辭라 貨語皆譏孔子而諷使速仕하니 孔子 固未嘗如此하시고 而亦非不欲仕也요 但不仕於貨耳라 故로 直據理答之하시고 不復與辯하여 若不諭其意者하시니라. 보배를 품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는 것은 도덕을 품고 감추어 나라의 혼미하고 어지러움을 구원하지 않음을 이른다. 亟(기)는 자주(數 자주 삭) 이다. 때를 놓친다는 것은 일이 기회에 미치지 못함(놓침)을 이른다. 장은 장차 그렇게 하려고 하나 꼭 기필 하지는 않는 말이다. 양화의 말은 모두 공자를 풍자하여 넌지시 공자로 하여금 속히 벼슬을 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공자는 진실로 일찍이 이와 같지 않으셨고, 또한 벼슬하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요 다만 양화에게 벼슬하지 않으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이치에 의거하여 로 이치에 의거하여 대답하고 다시는 그와 변론하지 않으시어 마치 그의 뜻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하신 것이다. ○陽貨之欲見孔子는 雖其善意나 然이나 不過欲使助己爲亂耳라 故로 孔子不見者는 義也요 其往拜者는 禮也요 必時其亡而往者는 欲其稱也요 遇諸塗而不避者는 不終絶也요 隨問而對者는 理之直也요 對而不辨者는 言之孫而亦無所詘也니라. 양화가 공자를 만나려고 한 뜻은 비록 좋은 뜻이었으나 공자로 하여금 자신을 도와 亂을 하려는 데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만나주지 않은 것은 義이고, 찾아가서 절한 것은 禮이며, 반드시 양화가 없는 틈을 타서 찾아간 것은 양화의 행동에 맞추고자 한 것이고. 길에서 만나도 피하지 않은 것은 끝까지 끊지 않으신 것이며, 질문에 따라서 대답한 것은 이치의 바름이고, 대답만 하고 변론하지 않은 것은 말씀이 공손하였으나 또한 굽히산 바가 없는 것이다. ●集註序說(《史記》의〈孔子世家〉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定公元年壬辰은 孔子 年四十三이라 而季氏彊僭하고 其臣陽虎 作亂專政故로 孔子 不仕하시고 而退修詩書禮樂하시니 弟子彌衆이라 정공 원년 임진년은 공자 나이 43세라. 계씨가 강하며 참람하고 그 가신인 양호가 난을 일으켜 정치를 전횡하므로 공자가 벼슬하지 아니하시고 물러나 시서와 예악을 닦으시니 제자가 더욱 많아짐이라. ②楊氏(楊時) 楊氏曰 揚雄謂孔子於陽貨也에 敬所不敬하여 爲詘身以信道라하니 非知孔子者라 蓋道外無身하고 身外無道하니 身詘矣요 而可以信道를 吾未之信也로라. 양씨(양시)가 말하였다. 양웅이 (揚子法言에서) 이르기를,‘공자가 양화에게 공경하지 않는 바에 공경하여 몸을 굽혀서 도를 폈다’하니, 공자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대개 道 밖에는 몸이 없고, 몸 밖에는 道가 없으니, 몸을 굽히고도 道를 펼 수 있다는 말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家苑 註(가원 이윤숙 선생의 집주) 陽虎(양호= 양화)는 공자가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계손씨의 잔치에 갔을 때 문전박대하여 내쫓은 적이 있는 인물이다. 위 내용의 시대적 배경은 기원전 505년 노나라 정공 5년 때를 전후한 일인 듯하다. 당시 노나라 소공을 축출하고 권력을 거머쥐었던 계평자가 죽고 아들인 季桓子(계환자)가 권력을 승계하면서 대부(삼환씨)의 가신들이 政事(정사)를 전횡하는 시대로 들어섰다. 계씨의 가신이었던 陽貨(양화) 역시 반란을 일으켜 계환자를 가두고 권력을 휘두르던 상황이었다. 양호는 공자의 명성을 빌려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하려고 공자를 누차 만나려 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양호는 공자가 없는 틈을 타 삶은 돼지를 폐백으로 보냈다. 당시의 예법에 의하면, 주인이 집에 있어 직접 선물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답례하고, 주인이 없을 때 선물을 받게 되면 그 주인이 직접 답례품을 갖고 상대방 집을 방문해야 했다 양호는 巧言令色(교언영색)으로 자기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나, 공자는 “알았다, 내 장차 벼슬하리라.”며 완곡하게 거부하였다 <참고> 주자는 양화가 말한 “日月逝矣 歲不我與(일월서의 세불아여)”를 조금 고쳐 넣어 다음과 같은 勸學文(권학문)을 지었다.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물위금일부학이유래일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물위금년부학이유래년 日月逝矣일월서의 歲不我延세부아연 嗚呼老矣오호노의 是誰之愆시수지건(오늘 배우지 아니하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올해 배우지 아니하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해와 달은 가도다. 세월은 내가 늘이지 못하니라. 아아, 늙었도다. 이 누구의 허물인고?)” 1, 歸孔子豚(귀공자돈) : ‘歸(귀)’는 ‘饋(궤)’와 같이 ‘보태다’라는 뜻. ‘豚(돈)’은 익힌 새끼 돼지. 2, 時其亡(시기무) : 양화가 집에 없을 때를 틈타다. ‘時(시)’는 ‘엿보아 틈을 타는 것’. ‘其(기)’는 ‘양화’, ‘亡(무)’는 ‘외출하다’. 3, 曰(왈) : 다산은 李卓吾(이탁오)의 말을 인용하여 이 曰(왈) 자부터 위의 것까지 세 曰(왈)자에 붙는 말은 모두 양화가 자문자답하는 말로 보았다. 4, 懷其寶而迷其邦(회기보이미기방) : ‘懷(회)’는 ‘품다’, ‘숨기다’. 다산은 “공자가 벼슬하지 않는 것이 곧 보배를 숨기고 팔지 않는 것(懷寶회보)이고,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알면서 정치하지 않는 것이 나라가 혼미하여 어지러워지게 내버려 두는 것(迷邦미방)이다”라고 했다. 5, 好從事而亟失時(호종사이기실사) :‘好從事(호종사)’는‘공자가 道(도)를 행하고자 하는 것’.‘亟失時(기실사)’는‘누차 벼슬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 6 歲不我與(세불아여) : 세월은 무정하여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 다산은“與(여)는 잘해주고 돕는 것이다(與, 善也, 助也)”라고 했다.
오늘도 고운 날 되시고 행복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
첫댓글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북경출장도 잦으시네요~~~
반갑습니다. 민의회님.히로 없는 것 같습니다. 늘 관심있게 지켜봐 주셔서 감사히 더 좋은 일만 있으시기 빕니다.
북경, 상해, 서안 세 곳의 회사들과 업무협약 체결을 위해서 자주
다녀와는데 이제는 성사가 되었으므로 실무자에게 맡겼으니 특
갈 일은
드립니다. 올해에는 특
@碧松 싸드 영향은 적나봅니다^^
@민의회 예전의 제 부하 직원 중에 중국의 칭화대를 나온 후 한국에 유하하여 서울대에서
석사를 한 조선족 재원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8년 직장생활을 한 후 중국 국영기업인
제1설계원의 간부로 스카웃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도움이 컸었습니다. 현재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구요.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가득한 날 되시고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