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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산 놀이동산과 금강산 호텔 - 금강산 여행기 2편
온정리 온천물에 몸을 담그다. - 금강산 여행기 3편
금강산은 우선 그 화려한 산의 자태로 유명하다.
봄이면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계골산 혹은 설봉산이라 불리우는
다양한 이름이 금강산의 화려한 자태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금강산의 그 화려한 산세도 유명하지만 또 하나 금강산을 찾는이를 들뜨게 하는 것이 바로 온천이다.
금강산 호텔의 행정구역 명칭이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이다.
온정리라는 마을 이름 자체가 벌써 온천을 상징한다.
이곳은 조선시대 세조임금이 석달 정도 이 온천에서 쉬면서 피부병을 완치했다는 이야기로
온천의 탁월함을 자랑한다.
금강산호텔 바로 옆 제1초대소 근처에 온천수 파이프가 있어 그곳에서 물을 공급한다고 한다.
지하 200미터에서 섭씨 50 도 내외의 온천수를 공급한다는 안내 조장의 설명도,
그리고 그 뜨거운 온천수를 단지 몇군데만 공급한다는 그 희귀성에서도,
그리고 더욱 아침 11시 이후에나 물을 공급하고 저녁이 되면 가차없이 중단시킨다는 절제성에,
남쪽 온천 주변의 수많은 온천탕과 너도 나도 온천 원탕이라는 사기성 간판이 오버랩 되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측의 속물인가 보다.
들어서며 하는말...
"이 곳은 정말 온천물 그 자체겠지..."
"설마 수돗물 섞어 기름으로 적당히 데워 공급하진 않겠지..."
첫날 온정각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바로 온천으로 향했다.
북측에서 통금시간을 7시 30분으로 정해 바빠 움직여야 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시간이 그리 이르지 않건만 온천 건물은 벌써 저렇게 어둠에 쌓여있다.
거친 산행의 피로를 온천수로 풀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너무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한번 온천을 이용하는데 미화 12달러라는 그리 만만치 않은 금액을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을 찾은 이는 너나 할 것 없이 몸을 담근다.
도착하던 첫날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바로 온천장으로 갔다.
금강산 호텔에서 걸어서 약 15분 거리에 있는데 상당히 큰 규모였다.
특히 그 추운 겨울철에 노천탕에서 즐기는 온천욕은 가히 신선 놀음이 아닐수 없었다.
황토사우나와 뜨거운 온천물, 그리고 차가운 폭포수 사이를 오락 가락하며 때로는
눈발이 휘날리는 매서운 추위에 발가벗고 의자에 누워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느낌이란 얼마나 각별하던지...
한번 물에 담그면 10년이 젊어진다고 안내 조장은 뻥을 쳤다.
그래도 그말을 듣고 온천물에 들어가는 우리는 기대 반 설레임 반이었다.
10년은 너무했고 최소한 3,4년은 젊어 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뽀샤시한 얼굴 피부가 실제로 보이는가?
온천 앞에는 작은 수퍼와 식당이 있었는데 달러고 한국돈이고 구분하지 않고 마구 받는데,
사람들은 온천을 마친후 벌써부터 각종 안주 시켜 놓고 술판이 벌어졌다.
현대 직원의 음주사고가 있기 전에는 밤 12시까지 돌아다니게 했다는데 얼마나 질펀한 술판이 벌어졌을까...
나와 신선생은 온천을 마친 후,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일부러 호텔까지 걸어갔다.
그 작은 버스의 번잡함이 싫었다기 보다는 눈 덮인 금강산 길을
온전히 두발로 걸어 보고 싶었던 여행 첫날의 설레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력부족 탓인지, 아니면 군사지역과 가까이 있어 그랬는지 가로등은 매우 적었고,
따라서 주변은 무척 어두웠다.
하지만 그 칙칙한 어둠이 우리 두사람의 금강산 여행에 대한 설레임마저도 가리진 못했다.
우린 금강산 여행의 감상을 10대 소년들처럼 되뇌이며 그 길을 걸었다.
이곳이 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몇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곳곳에 서있는 북측의 구호였다.
금강산 호텔 입구에 서있는 저 글귀가 참 인상적이었다.
국제 사회로 부터 일정부분 고립되고 미국에 의해 많은 품목이 수입금지된 상태에서,
북은 나름대로 경제 위기와 체제 위기를 많이 느꼈을법 하다.
그 와중에서 북측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구호들이 많이 있었다.
아마도 저것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금강산 호텔에서 안쪽에 저런 석상이 서 있었다.
북 체제의 독특함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4편을 계속할까요?
나는 잠자리가 바뀌면 여간해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특히나 금강산 관광과 같은 특수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첫째날 저녁, 온천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은 통금시간 때문에 어디 오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는듯,
호텔방에서 마실 술과 안주를 사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소주 한병에 4불에서 5불씩 하는 결코 싸지 않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챙길 수 있는 만큼 챙긴다.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서 판매하는 술과 음료수 판매가격인데,
북은 가게에서 파는 술값이나 식당에서 사 마시는 술값이나 차이가 없었다.]
함께 한 신선생이 술을 그리 즐기는 사람이 아닌지라 대놓고 마구 잡이로 사기도 그러하고,
그렇다고 그냥 들어가자니 쉽게 잠도 이루지 못할 것이고 술을 즐기는 내 분위기에도 어울리지 않아,
온천 앞 수퍼에서 금강산 특산이라는 들쭉술 한병과 쥐포 두어마리 사서는
비닐봉지에 넣고 호텔로 들어섰다.
호텔 로비 간이 바에서 같이 온 영동 선생님들 두분과 함께 생맥주도 한잔 마시고,
호텔방에서 들쭉술도 한병 마셨건만 정신만 말똥 말똥할 뿐 쉽게 잠들 분위기 아니었다.
영동에서부터 나를 괴롭히던 혓바닥 안쪽의 통증은 그 딱딱한 쥐포를 씹느라 더욱 심하기만 했다.
[첫날 호텔 간이바에서 생맥주를 한잔했는데 남쪽 하이트 맥주를
500씨씨 한잔에 4달러씩 팔고 있었다. 우리 나라가 2500원 정도 하니까 꽤 비싼 가격이다.]
텔레비전으로 생로병사의 비밀을 잠시 보다가 스스르 잠이 들었나 보다.
얼마나 잤을까, 약간 춥다는 느낌과 함께 눈을 떳지만 주변은 여전히 컴컴하기만 했다.
금강산 겨울밤 추위가 장난이 아닌가 보다.
시설 좋은 호텔방에 커튼까지 두텁게 쳐 있는 곳에서 내복까지 껴입고 잠자리에 들었건만,
추위를 느끼다니...
아침까지는 아직 멀은듯 하여 계속 잠을 청해보지만 한번 깬 잠은 다시 들기 어려웠다.
잠자리를 뒤척일 때마다 이부자리에서 나는 소리가 무척 거슬렸다.
그렇게 비몽사몽간의 시간을 얼마나 보냈나... 문득 일어나 텔레비전을 켜니 6시가 한참 지났다.
아침 8시에 집결하라는 말을 들은듯 싶어 부지런히 샤워하고 2층에 준비된 식당에 내려가니
벌써 많은 선생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북측에서 준비한 아침 식사는 한식 뷔페였다.
금강산 산행에 대비해 이것 저것 많이 챙겨서 먹고 그리고 혹시 몰라 빵까지 두개 챙겨 왔다.
호텔방 냉장고에 있던 금강산 샘물 한통과 식당에서 챙긴 빵을 비닐에 넣고 호텔 방을 나섰다.
선생님들의 숙소가 다들 이곳 저곳 흩어져 있기에 일단 온정각에 집결한 후, 구룡폭포 등산길에 오른단다.
차들은 하나 둘 온정각으로 떠나는데 우리 차는 두사람이 아직 안 나와 한참을 호텔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얼마나 기다렸나, 부시시한 얼굴을 한 두사람이 차에 오르고 나서야 우린 온정각으로 출발했다.
온정각에는 이미 수백명의 우리측 관광객이 도착해 있었다.
관광을 떠나기 전, 온정각 현대직원들과 안내 조장들이 모두 일렬로 도열한 후
서로에게 밤새 안부를 물으며 하는 집단 인사 모습과,
조장들이 차에 오르고 출발을 하자
나머지 현대 직원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는 연신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은 참 이색적이었다.
[금강산 관광의 출발점이고 본부라고 할 수 있는 현대 아산의 '온정각',
현대는 온정각 두채를 지어 각각 동관 서관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곳이 동관으로
모든 금강산 관광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각기 여러 곳에 분산된 관광객들이 금강산 관광을 위해 아침 일찍 이곳으로 모여 출발하면,
현대 직원들이 저렇게 도열을 해서는 손을 흔들며 빠이 빠이를 해 준다.
우리 유조장은 이런 모습을 두고는 렬렬한 환송 인사를 받으며 여행길에 오른다고 표현했다.]
역시나 조장들은 온정각에서 금강산 주차장까지 이동하는 동안에 절대로 사진 촬영을 해서는 안된다는 주의 사항을 전달한다.
온정각에서 버스로 한 20여분 갔나 보다. 구룡폭포로 올라가는 등반길 주차장에 이르렀다.
드디어 우리는 꿈에 그리던 금강산 등반길에 나섰다.
[구룡폭포로 올라가는 금강산 등반로 주차장 옆에 위치한 목란관 식당이다. 북에서 아주 유명한 식당이라는데
단고기(개고기) 요리가 유명하다고 했다. 우리 선생님들이 목란관에서 식사를 하시고선 참 잘 먹었다고
칭찬하셨는데, 입맛이 다 제각각인지 다른 분들은 영 아니었다고 한다.]
요며칠 날씨가 포근한 덕인지 금강산 초입에 들어섰지만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다.
유조장은 눈 쌓인 금강산 등반에 아이젠은 필수라며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평소에 제대로된 등산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그 작은 아이젠을 착용하고 걷는 것도 어색하기만 했다.
지금와 곰곰히 뒤돌아 보면 금강산 관광길은 거의 두가지 특징적인 모습을 가진듯 하다.
하나는 곳곳에 서있는 김일성, 김정일 최고 지도자들의 흔적이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방문했던 곳은 어김없이 방문 비석이 붉은색 글자로 세워져 있었고,
산 여기 저기 멋진 바위에도 그들을 찬양하는 글귀나 정치적 표어가 참 많이도 새겨져 있었다.
[금강산 요소 요소 마다 최고 지도자들이 다녀간 곳은 어김없이 저렇게 석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물론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대형 바위에도 예외는 없었다.]
[저렇게 엄청난 크기의 글씨도 있었다. 자립이라는 글이 뚜렷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북측 사람들이 요소 요소에 진을 치고서는 우리측 사람들을 지켜 본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절경마다 설명해 주는 안내원과 물건 파는 사람들, 그리고 산악구조요원은 그렇다치고,
그들 사이 사이에는 신분 모를 사람들이 눈을 번뜩이며 우리를 연신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신선생이 김일성 주석이 다녀갔다는 비석의 경계석 위을 밟고 올라섰다가
신분 모를 어떤 북측 인사가 인상을 쓰며 뭐하시는 것이냐고 쏘아 붙이는 모습을 보고는
대충 그들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행한 신선생이 석조 조형물의 경계석을 밟고 올라섰다가 북측 관리원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나는 아름다운 금강산의 설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항상 우리 주변에 어른 거리는 그들의 시선을 같이 느껴야 했다.
특히 그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에 의해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기에
간혹 같이 사진이라도 찍자고 덤벼들면 두손을 싹싹 내 젓거나
아예 카메라를 뺏어서는 자신들이 나를 찍어주겠다고 나섰다.
[온정리 주민들이라고 하는데 저렇게 추위에도 달러를 벌기 위해 각종 산나물 종류나 커피를 팔고 있었다.]
[저기 붉은 색으로 원을 그려 놓은 사람들은 북측 사람들인데,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은 구두나 장화를
신고 있었고, 주황색 등산복을 입은 사람은 평양에서 파견된 산악 구조원이라고 했다.
전에는 연변 동포를 고용했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철수 시키고 지금은 북에서 직접 파견한다고 했다.]
비록 서로 산행길을 내려오며 화기애애하게 나누는 이야기는 모두
우리 민족의 미래와 통일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서기에는 많은 장벽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60여년을 서로 떨어져 서로가 정반대의 체제와 사상 속에 처참한 전쟁까지 치루었으니 당연한지도 모르곘다
구룡폭포와 귀면암을 오르다. - 금강산 여행기 5편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은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가앙 이라네~'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철따라 고은 옷을 갈아 입는다고 표현한 노래다.
봄에 금강산, 여름에 봉래산, 가을에 풍악산, 겨울에 계골산 혹은 설봉산이라고 불리워지는
다섯가지 모습으로 변신하는 금강산,
그 금강산을 드디어 올랐다.
처음 금강산 보내 준다고 했을 때,
겨울이라 헐벗은 산이 무슨 볼 것 있겠는가 하며 시큰둥했었던 그 금강산 말이다.
[금강산 연주담이다. 비봉폭포에서 내려온 물이 여기에 고이는데,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을 만큼 크고 넓직했다.]
금강산 관광 둘째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바로 금강산 구룡폭포 산행에 올랐다.
겨우내 내렸던 눈이 이미 산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고,
유조장은 안전 산행을 위해 아이젠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나이드신 분들도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오를 정도 만큼의 산행 코스였기에
그리 크게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워낙 등산을 즐겨다니지 않았던지라 명색이 금강산인데 하는 걱정도 되었다.
[연주담에서 걸어 10여분 올라가면 나오는 폭포로
봉황이 하늘로 올라가는 폭포라고 해서 이름지었나 보다.]
불과 3시간 정도에 구룡폭포까지 다녀오는 첫날 산행은
설레임과 기대 때문인지 그리 힘든지 모르고 가볍게 올라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여행 중간 중간 펼쳐지는 금강산의 설경에 탄성을 지르기 바빴다.
금강문을 거쳐 옥류동, 연주담, 비봉폭포, 구룡폭포로 연결되는 산행은
비록 추위로 모든 물길이 얼어버리고 폭포는 거대한 빙판벽으로 변해 있었지만,
남쪽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규모 때문에 사람들의 탄성을 받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첫번 금강산 산행의 종착지인 구룡폭포로 보기에는 작아 보여도,
실제로는 어마 어마하게 큰 폭포로 얼지 않았을 때는 그 물 떨어짐이 장관이었을법 하다.]
처음 방문하는 금강산, 너무 아름답다고 옛 선인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던 그 금강산,
이제 가면 또 언제나 방문할 수 있겠나 싶은 마음에 추위도 잊고,
그 미끄러운 빙판길의 두려움도 떨치고 연신 구식 카메라의 셧터만 눌러댈 뿐이었다.
물론 북측 안내원들의 이런 저런 설명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워낙 장대한 폭포도 많고, 그 폭포가 쏟아낸 물을 담아내는 바위 연못도 크고 시원 시원해
얼지 않았을 때의 경치가 참 대단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선생은 가뿐한 첫날 산행에 자신이 붙었는지 상팔담까지 올라갔다 오겠다고 호기를 부리며
나 더러 먼저 내려가 기다리라고 하는데 상팔담을 향해 힘차게 달음질하는 뒷모습을 보며
너무 무리하면 안되는데 하는 걱정이 앞선다.
[구룡폭포의 주변을 여러장 사진 찍어 이어 붙인 모습]
구룡폭포까지의 산행은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내게는 적정수준이었던 것 같다.
구룡폭포의 장대한 모습을 대하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오고 난리 법석이었다.
상팔담으로 날아간 신선생을 기다리는데는 약 30여분이 걸린듯 한데,
그의 모습에서는 무리한 산행에서 받은 피로감이 역역했다.
시간이 늦어질까봐 아이젠을 착용한채 마라톤으로 내려왔다는데 내일 산행이 걱정될 뿐이다.
둘째날 아침, 유조장이 두개의 관광 대상 중에 한 곳을 고르라고 한다.
편안하게 산책하듯 삼일포와 해금강을 돌아볼 것인지,
아니면 어제보다 약간 더 가파른 만물상 코스를 돌아볼 것인지 말이다.
그런데 어제 오후부터 눈이 꽤 왔기에 만물상에 제설 작업이 미쳐 끝나지 않으면
주차장까지 도보로 왕복 한시간 가량을 걸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어제 등반 정도를 체험했기에 오늘 산행도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또한 금강산 설경의 아름다움을 이미 체험했기에 어제 산행에서 무리한 덕에
걸음도 제대로 걷질 못하는 신선생을 설득해 만물상 등정길로 나섰다.
[눈에 휘감긴 삼선암의 모습]
만물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그 구비 구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런 눈길에 그 좁은 120개 고갯길을 사정없이 치고 올라가는 30인승 버스가 신기했다.
연변 조선족 동포 중에서 가장 운전을 잘하는 아저씨들만 뽑아왔나 싶을 정도로,
그 분들의 운전실력은 신기에 가까왔다.
눈이 많이와 꼭데기 주차장까지 못하고 그 아래쪽 주차장까지만 간다는 조장의 설명에
왠지 고생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얼마나 올라갔나, 만물상 주차장까지 올라가는데도 힘에 부쳤다.
오전 시간대 산행길이기에 벌써 주차장까지 40분 이상 올라왔으니 오늘 산행은 1시간 이상이 단축되는 것이다.
결국 만물상의 제대로된 경치는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인데 만물상을 고집한 내가 너무 미안했다.
[귀면암 건너편 바위 꼭데기에서 바라다 본 모습]
신선생은 다리가 아파 절둑거리고, 나는 아이젠이 계속 풀려 다시 메느라 우리는 산행 팀의 맨 뒤로 쳐질수 밖에 없었다.
산으로 올라갈 수록 눈은 더욱 내리고 시야는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워낙 거대한 기암절벽들이라 그 위용은 참으로 대단했다.
비록 만물상 초입 부분인 귀면암까지 밖에는 못 올라갔지만, 눈 내리는 금강산 귀면암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금강산 두번째 산행인 만물상 중 귀면암의 모습]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바위 사이로 조금씩 흘러 내리는 물줄기를 발견한 우리는 금강산 약수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줄지어 서서는 마시고 들고간 생수통에 소중히 담았다.
남측에 있는 식구들에게 금강산 개울가에서 직접 떠온 물을 자랑도 하고 마시게 해줘야 하는 생각에 가방속에 고이 고이 간직했다.
내려오는 길은 서로가 긴장도 풀리고 느긋한 생각에서 였는지 남측 관광객과, 북측 산악 구조요원 및 감시원들이 하나로 엉겨 이런 저런 정담을 나누며 내려왔다.
산에 오면 다들 착한 사람이 되는지 남측 사람이나 북측 사람이나 모두 신선이 된듯했고,
더없는 민족주의자가 된 듯했다.
서로가 우리 민족은 하나여야 한다며 통일을 강조하며 뜨거운 동포애를 느꼈다고나 할까...
[눈이 너무 내려 정작 보아야 할 곳은 거의 못 보고, 겨우 귀면암만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금강산 여행기를 마무리지으며 - 금강산 여행기 마지막
<[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BGSOUND balance=0 src="http://www.omsall.com/classic/mt_kumkang.asf" volume=0 loop=infinite>이번 금강산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나?
원래 여행이라는 것이 멋진 것 많이 보고 맛난 것 많이 먹으면 그게 최고다.
물론 내 이번 금강산 여행길은 멋진 것 많이 보고 맛난 것 많이 먹었으니 분명 잘 다녀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측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끼는 감정은 뭔가 개운하지 않았다.
그리 잘 보고 잘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개운하지 않은 관광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분단 조국의 현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같은 민족이고 같은 나라였던 남과 북이 60여년 넘도록 서로 남남이 되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야 했던 그 쓰라린 과거...
상냥한 친절함과 서슬퍼런 살벌함의 양면 모습을 가지고 있던 북측 사람들의 두 모습...
그리고 철저히 통제된 상태에서 주어진 길목만 따라 다녀야 했던 안보이는 억압 때문이었을까...
첫날 그 사근사근함과 순박함에 비해 너무 무섭게 달라진 엘리베이터 봉사원 아가씨의 모습이나,
옥류관 냉면 집에서 사진 찍었다고 봉사원 아가씨가 정색을 하며 쫓아와
사진을 찾아서는 사정없이 지워버렸던 그 살벌함이나,
금강산 호텔 길목마다 두터운 인민군 복장을 한 병사들의 매서운 눈초리는
금강산 관광의 멋진 풍경과 단백한 음식의 맛스러움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게 했다.
[온정각 서관에 광개토라는 식당이 있는데 이곳은 북한측 음식을 전문으로 파는 식당이라고 했다.
여기서 둘째날 저녁 식사를 했다.
평양온반인가 뭔가 인데 이름이 확실치 않다. 우리로 친다면 국밥정도라고 할까...]
금강산 온천의 봉사원 총각은 목욕하기 위해 들어서는 남측 사람들의 물건을 주의깊게 살폈다.
그 총각은 북측 남자들의 물건과 남측 남자들의 물건을 비교하며 나름대로 전쟁을 치루고 있는 듯 했다.
금강산 여행은 꿈과 현실이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영화 같았다.
애니메이션 원화와 실재 영상이 뒤엉켜 진행되는 디즈니 영화처럼 말이다.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공연이 끝난 후, 버스에서 관광조장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남측 사람들이 그 공연을 보고는 세번 눈물을 뿌린다는데,
첫번째는 금강산에서 북측 모란봉 교예단을 보게되었다는 감격에 울고,
두번째는 모란봉 교예단의 그 화려한 묘기에 또 울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런 엄청난 묘기를 배우기 위해 얼마나 고통받았을까 불쌍한 생각에 운단다.
그런데 모란봉 교예단의 주연급 배우들은 북측에서 차관급이나 장관급 대우를 받으며
금강산 제1초대소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지낸다고 한다.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천장에 달려 있는 것은 공중 곡예 때
안전을 위해 쳐 놓았던 그물망이다.]
[금강산 호텔 일층에 작은 소극장이 하나 있고 그곳에서 금강산 가무단이 상설 공연을 하는데
입장료가 우리 돈으로 만원이었다.
노래, 가야금 연주, 무용 등의 연주를 했는데
왼쪽 여자 기타리스트가 기타를 위한 무슨 변주곡인가를 연주했는데
여성 기타리스트라 그런지 매우 색달랐고,
전국 손풍금 테레비 경연대회서 1등을 했다는 손풍금 주자의 화려한 개인 연주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온정리 마을이 저 멀리 보였는데, 지붕들이 많이 낡아 겨울 지내기가 참 추워 보였다.
북한 주민들도 각지 자기 일터로 출근도 하고 퇴근도 했으며,
심지어는 금강산 호텔 경내 도로를 가로질러 가기도 했지만,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우리는 북측에 가서 북측 사람들이 득실대는 금강산 호텔에서 생활했지만,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북측의 자연스러운 주민들은 아니었다.
남측 관광객의 다양한 돌출 행동에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 파견된 프로들이다.
남측 사람들과 북측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통일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고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이야기...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북측 관광을 많이 시켜야 한다는 이야기,
그래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고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북돋아주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금강산 호텔 정문 앞 정원에 김일성주석이 어린 아이들에 둘러싸여 활짝 웃고 있는 대형 그림이 그려져 있고
북한군 병사가 아침 저녁으로 열심히 주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사진 찍어도 되냐는 내 질문에 그는 대꾸도 없이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는데
내가 북한군 병사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그러나 그런 감격에 겨운 이야기들도 돌아서면 신기루와 같이 사라져 버렸고,
다시금 우리는 분단된 현실 속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아마도 난생 처음으로 접하는 북측 사람들에 대한 내 선입견이나 어색함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너무나 떨어져 있었기에,
그리고 서로의 체제에서 서로를 너무나 왜곡된 모습으로 각인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어떻게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할까...
과거 한국전쟁같은 처절한 전쟁을 치루면서 폐허 속에서 통일을 이루어서도 안될 것이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흡수 통합도 서로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될 것이니 바람직 하지 않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부지런히 만나 서로간의 이질감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우선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가 아주 이상한 나라의 괴팍한 사람들이라는 허상을 깨끗이 씻어 낸 후에,
서로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면서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진다면 좀더 자연스럽고
저렴한 경제적 부담으로 관광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런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관광을 마무리 짓지는 않을 것이다.
[옥류관 금강산 분점의 모습이다. 상당히 멋들어지게 지은 건물만큼이나 냉면값도 비쌌다.
내부에는 온통 금강산 벽화가 잔뜩 그려져 있는데 북한 최고의 인민화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뒤쪽으로 작은 승합차가 보이는데 평양 번호판이 달려있었다.]
첫댓글 산행코그:15km ,동석동 주차장-동석-합수목-세존봉 전망대-사자목-구룡연-구룡연 주차장. 소요시간6~8시간 을 가보려합니다
구룡연코스는 신계천건너 서남쪽에 제일높이 솟아있는 웅장한 바위산(1160m)이며 세존봉은 비로봉,천선대,채하봉,백마봉,전망대와 더불어 금강산5대 전망대중 하나이며 동석동은 집선봉과 세존봉사이에 계곡으로 경사가 완만하여 산책하기 좋고 집선연봉의 수려한 경관을 바라보며 산행할수 있는 코스이다
염려 푹 놓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