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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검찰시보를 할 때 본드를 흡입하다 붙들려온 청소년 두명을 보호관찰소부 기소유예로 부모에게 인계한 일이 있었다. 구속된 상태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한의 온갖 미사여구를 써가며, 반성의 말과 글을 늘어놓는 아이들을 앞에두고 정말 나는 이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하고 난감해 진다. 우리네 삶은 유익한 일만하고 살기에도 너무도 짧다는, 그래서 다시는 이런일로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하고 부모와 사회에 걱정을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타이르는 이야기만으로는, 한번만 더 그랬다가는 이제는 용서없이 교도소에 보내겠다고 겁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은 열심히 살아도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도 짧은 시간인데, 정말 저 좋은 나이에 커다란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도 너무도 짧은 시간인데, 내가 저 나이때 공부를 하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하지 아니하여 국민학교 중퇴의 경력으로 12살 나이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었는데... 이런 형태의 글은 내게 벅차고 꺼림찍한 글이다. 내 자신이 다른사람의 수기 특히 초년기의 고생담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글을 내가 쓴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모순인 것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살아온 수기를 읽기 싫어하는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나도 끔찍할 정도의 가난을 겪어 보았기에 다른 사람의 글이 내가 겪어보지 아니한 어떤 새로운 세계로 다가와 진한 감동으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내가 겪었던 아픔드이 몰려와 서러움들이 되새겨지나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글을 세상에 이야기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적어도 내가 70살은 넘은 나이에 내가 세상을 좀더 관조할 눈을 가지고, 내 삶 조차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하듯 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을 때 쓰겠다고 마음먹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청탁을 받았을 때 이러한 입장을 설명하고 원고쓰는 것을 거절하고자 하였으나, 거절을 위한 설명자체가 어쩌면 더 청승스러워 질 것 같다는 생각과 세상이 그다지 만만하고 쉬운 것 만은 아니로되 그래도 정말 진지하게 살아보면 살아 볼 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불우한 환경에서 갈등하고 그러한 환경을 빌미로 비행으로의 유혹에 휩쓸리기 쉬운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지도 모르다는 판단이 들어 내 이야기 쓰는 것을 수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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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첫 직장인이 되다 가. 지독한 아이 내가 12살이 되던 1969. 5. 26. 그 날은 월요일이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업의 실패로 빚쟁이들을 피해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오빠,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와 2학년이던 큰 동생, 그 아래 아직 6살, 2살이던 우리가족은 큰 트럭에 이사짐을 싣고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라고 하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근잘 이후 오빠와 나는 학교생활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었고, 인창리로 이사한 지 이틀 후부터 생계를 위해 공장에 취직을 해야했다. ㄴ가 왜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지를따질 겨를도 업이 나의 장래가 어떻게 되는 지를 생각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나와 오빠는 비닐 끈을 만드는 조그만 공장에 취직을 했다. 당시의 근로여건이라는 것이 지금과 같이 근로기분법상 1일 8시간 근무라든가 하는 것들은 환상과 같은 때였다. 아침 8시에 시작하면 저녁 8시 까지가 기본 근무시간이고, 멀건 시레기 국에 가는 국수를 말아 한 그릇씩 배급되는 것을 맏아먹고 밤 11시까지 일을 하는 것은 다반사요, 일이 많을 때는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근무를 하기도 했다. 월급은 성과급으로 지급되는탓에 많은 시간을 근무하면 그 만큼 수입이 늘어나므로 일 욕심많은 내가 그 일을 마다할 성격도 못되었다. 그렇게 해서 받는 월급이 5,600원 정도 당시 쌀 한가마값이 3∼4,000원 정도 할 때이니 야근에 철야까지 해서 벌 수 있는 수입이 월 한 가마 반정도의 수입이었던 것 같다. 억척같이 일한 덕에 내 기억으로는 당시 그 공장에서 내 월급이 가장 많아서 같이 일하던 숙련공 아주머니들이 지독한 아이라고 많이도 시샘을 하였던 것같다. 그렇게 번 돈은 생활비와 어머니의 치료비로 충당되었고, 저축등은 생각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 곳에서 한 2개월이 지난 다음 우리가족은 다시 서울 중랑구 면목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 때 면목동의 주거환경은 형편없어서 비가오는 날이면 장화없이는 단 하루를 버티기가 힘든 처지였고, 날이 개인 날이면 먼지로 눈을 뜨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나. 공부에 대한 꿈을 키우고 포기하기 까지 그곳에서 동생은 다음해 면목국민학교 3학년에 복학하였으나 오빠와 나는 학교에 다닐 것을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계속하여야 했다. 아직 근로기준법상 취업연령인 14세가 되지 아니하여 12살의 나이를 이력서상 14세로 속이고 취업한 곳이 프러그나 소켓등을 생산하는 영세가내공업을 하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도 환경이 열악한 것은 다를 것이 없어 한 밤중까지의 근무는 여전하였고, 드라이버로 소켓을 조립하느라 손가락에는 늘 잔쇠조각이 박혀있었고, 손가락의 지문은 상처로 해서 갈갈이 찢어져 있기 일쑤였다. 그렇게 살기를 3년쯤 지났을까 큰 동생이 초등학교룰 졸업하고 중학교를 진학해야 하는 데 정규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되어 동생을 당시에 성행하던 야학 중 하나인 일신재건학교에 입학시키로 했다. 나 역시 그곳에서 주간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 와서 공부를 다닐 방법을 짜내고자 했다. 그 방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아침에 한시간 일찍 출근해서 저녁에 한시간 일찍 퇴근하는 방안을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기특했던지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저녁시간을 혼자서만 찍 나가는 것을 시샘한 동료들이 사장님에게 자기들에게도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저녁시간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하는 바람에 트러블이 종종 발생하였고, 처음에는 내편에 서서 방패막이가 되어주던 사장님도 결국 난색을 표하게 되었다. 더 이상 사장님에게 그런 곤란한 입장을 감당하라고 하기도 민망하고, 그렇다고 다니던 야학을 포기할 수도 없고하여 다른 직을 알아보기로 하고 기꺼이 그만두었다. 저녁에 공부할 시간을 벌기위해 새벽 6시부터 근무한다는 조건을 내걸기도 하는 등으로 열 몇군데의 직장을 전전하며, 16살에 시작하여 18살에 야학의 중학과정을 마쳤을 때 나는 마침내 한 장의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아쥘 수가 있었다. 야학의 2년동안은 참으로 철없이 순수한 꿈을 키웠던 시간들이었다.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의 젊음을 청소년 야학교육에 바쳤던 교장 선생님, 내가 야학을 마칠 때 의자매를 맺었던 국어 선생님, 순수한 마음으로 짝사랑의 꿈을 키웠던 같은 야학출신 선배 선생님, 그외 많은 야학의 자원봉사 교사들은 나에게 현실사회가 결코 힘겹고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긍정적이고 밝은 희망을 불어넣어준 분들이었다. 야학을 마칠 때쯤 나에게 공연한 객기가 들기 시작했다. 계속 공부해서 고검, 대검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보다는 그 시간동안 직장생활을 계속해서 돈을 벌고, 내가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진학을 위한 공부를 포기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시간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여행을 하고, 영어회화학원, 붓글씨 학원, 피아노 학원 등에 다니면서 4년이라는 적지않은 시간을 소일하고 말았다. 다. 그래도 공부가 가장 가치가 큰 투자다. 그러던 중 1979.10.26. 당시 나는 동해안을 여행중에 있었는데,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소식과 함께 전국에 비상계엄이 실시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것이 나의 자유로운 여행의 종료와 함께 다시공부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집으로 향하는 열차안에서 장차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과 함께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이러한 객기가 과연 내 장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 때의 결론은 지금까지 내가 4년동안 행하였던 여행이라든가 학원 등을 통해서 배운 여러기능 등은 제대로 체계가 잡히지 아니한 단순한 하나의 잡기일 뿐이고 나의 장래에 대한 여하한 보장책도 ㄷ 아니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다음해 나느 23살의 나이에 내 스스로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첫째는 내가 동생들의 학비를 계속 벌어야 하는데, 공부를 하기위해서는 근로시간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수입을 맞출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둘째는 내 나이가 23살인데 앞으로 내가 10년을 열심히 공부해서 무엇인가 이룬다면(당시는 아직 내가 사법시험을 치르겠다는 생각은 아직하기 전이다)모르되 10년동안 막연히 공부에 투자를 하였다가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한다면 내가 33살의나이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겠는가 하는 두려움, 그리고 셋째는 공부를 하기위해서는 머리가 그만큼 따라주어야 하는 데 나 스스로 판단컨대 결코 내머리가 만족하 만큼 좋지 아니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한 3개월 정도를 그로인해 고민하던 끝에 첫 번째 문제는 내가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별도의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해결하기로 했고, 둘째 문제에 대하여는 막연하지만 33살에 정말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세 번째문제는 머리가 나쁘면 남이 1시간 할 것을 2시간 함으로써 해결하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들 모든 문제 는 결국 시간과의 싸움에서만 이기면 해결될 것이라는 판단이 서게 된 것이다. 그 후 1980. 11. 3. 23살의 나이로 나는 종로에 있는 고려학원에 입학하여 1981. 7월에 고검을 1982. 4월에 대검을 합격하였고, 1987년 인천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여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면서 현재 변호사를 하기 까지 나의 모든 것은 시간과의 전쟁으로 귀결되고 있다. 3. 고시에의 도전과 실패 가. 무식이 용기였던 시절 나는 1982년 가을에 대학입학학력고사를 치른후 전공과목의 선택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26살의 나이에 대학을들어가서 30살에 졸업을 하게되면 이미 일반회사에의 취직은 연령의 제한을 받게된다. 기왕에 늦게 시작한 공부인데 가능한한 내가 하는 일이 나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고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조금만 더 머리가 좋았다거나 탁월한 영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순수과학이나 국문학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머리로는 순수과학이나 국문한으로 사회에 기여를 하기는커녕 나 자신의 앞가림도 하기에 어려움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이 평범한 상시기에 바탕을 두고 사회의 병리를 치료할 수 있는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내 주변에는 법조인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법학과의 성격이나 고시에 대해서 조언을 받거나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사법고시를 합격헤서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는 법학과를 가야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아무런 갈등없이 학력고사 성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법학과가 있는 대학을 찾아보니 그것이 나의 모교인 인천대학교였다. 당시 인천대학교는 내가 3회 입학생으로 아직 졸업생 조차 배출하지 아니한 신설학교였다. 그때 나는 고시공부는 혼자서 그저 열심히 하면 되리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다가올 시행착오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식이 용기'라고, 멋 모르고 덤벼들어, 열정적으로 청춘을 모두 투자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나. 시행착오의 시작과 끝 우리학교는 아직은 비록 신설학교이긴 하였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은 어느 누구에 못지 않은 선배들이 있었다. 그들과 더불어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늦게 대학에 입학한 시간적 갭을 메우기로 다짐하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우리집에는 나 외에도 대학에 다니는 두 동생까지 모두 세명의 대학생이 있었고, 나는 이들의 학비를 조달하여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학교에 등교하기전과 하교후에는 아르바이트를 계속하여야 하였고, 방학 중에는 세명의 다음 학기의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일을 하여야 하였으므로 공부할 시산을 실제로 거의 확보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신설학교 답게 자료와 정보의 부재는 고시공부를 함에 있어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게 하였다. 그렇게 대학시절을 허둥대며 보내고 졸업하던 해가 되자, 두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게 되어, 이제는 정말로 고시공부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두 동생들에게 막내동생의 학비를 부담시키기로 하고, 1987.7.20. 학교고시반에 입실하였다. 그날부터 다음해 5월까지 10개월 동안 나는 일요일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루 수면시간 4시간, 공부시간 18시간을 고수하였다. 그 노력의 결과로 1년후 1차시험에는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시험은 혼자서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하여 낙방하고 다시 도전하여 그후에도 1차시험에 두 번 더 합격하고 2차시험을 여섯 번 치르고서야 고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시험에 실패할 때마다 그 낙심과 절망감은 추스리기 어려울만치 고통으로 다가왔고 고시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닐진대 이것에 계속 매달려 내 젊음을 이렇게 낭비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하는 회의가 밀려오곤 하였지만 그대로 포기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다. 요란한 시험합격통보 2차시험에 합격하고 최종시험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1994.10.24. 나는 부평에 있는 동생집에서 다음날 있을 학원강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후 4시쯤 되었을까. 연합통신사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법고시에 최종합격을 하였다는 것이다. 전신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래 이제야 끝났구나. 나는 해냈구나. 이제는 다시는 고시라는 이름의 시험은 안 치러도 되는구나. 기뻤다. 그날로부터 약 두달동안은 정말로 바빴다. 신문, 잡지사 기자들의 인터뷰를 응하랴. TV와 라디오에 겹치기 출연하랴. 학원강의하랴. 야학에서 봉사교사하랴. 이러한 분주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내가 투자한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감사하며 그 바쁨을 기쁜 마음으로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4. 주어진 모든 것이 기회였다. 가. 내 능력에 대한 도전과 극복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그 간의 역경 극복과정을 이야기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정말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닥쳤던 어려운 일과 그에 대한 극복과정의 모든 일에 대해서 당시나 지금이나 역경이었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있었다면 모든 어려웠던 과거는 내 능력에 대한 도전이었고, 이에 대한 극복만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내 대답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 산을 즐기는 이가 산에 오를 때 수 킬로그램씩하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산에 오르면 혹자는 저 사람은 미쳤군. 무엇 때문에 저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스ㅜ럽게 산에 올라가 차가운 음식으로 요기를 하나?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해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행복할 텐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경우에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역경의 세월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그가 뭐라고 할까요? 아마도 그는 결코 자신이 역경의 세월을 지내왔다고는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여 실행에 옮겼으며 그로인해 정상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삶의 주역이 되어 삶을 이끌어 가는 사람에게는 고난의 세월은 오히려 즐겨볼만한 것으로 자극이 될 따름입니다'라고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했다. 나. 기회는 잡는 자의 것 12살의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자에서 사법고시 합격자라는 양 끝만을 비교할 경우 나는 마치 신데렐라의 행운을 안은 자이거나, 어떤 탁월한 능력을 부여받은 자로 오해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 그 양자의 어느 것도 아니다. 12살의 나이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당장의 식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 공장을 다니면서도 언젠가는 기회가 닿으면 공부를 계속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야학에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아 최선을 다해 공부하였고, 스스로 공부를 포기하였다 다시 시작했을 때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하는 공부라 부실하기는 하였으나 그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면 언제고 끝을 볼 수 있으되 포기하면 영원히 끝이라는 판단이 들어 계속하였던 것이며,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공부시간을 빼앗기면 오히려 그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나머지 시간에 더욱 열심히 할 수 있는 자극을 받게 되는 기회로 삼았으며, 시험에 실패하였을 때는 오기로 자신에 대한 능력을 테스트할 기회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기회가 다가왔을 때,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정말 슬기롭고 멋지게 사는 자가 될 것이다. 어느 사람이고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천재는 천재대로, 지진아는 지진아대로, 각기 느끼는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도, 자신이 인생의 주역이 되어 이끌어 나간다면, 그러한 어려운 조건은 도전해 볼 만한 기회로 다가와,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할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준다. 나는 어려움에 부딪칠 때, 순간적으로 긴장하기는 하나 결코 그 결과에 대한 공포에 미리 겁을 먹고 주저앉기 보다는 그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 그저 죽을 각오로 열심히 버티면 그런대로 길은 열리었다. 하늘은 결코 인간이 극복하지 못할 시련을 주지는 아니한다고 확신한다. 다. 공짜로 쟁취한 성공은 불안하다. 간혹 자신이 얻고자 하는 성공의 무게보다 적은 노력을 하고 큰 성공의 열매룰 기대하는 사람을 본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은 기초가 부실하기 쉽상이고, 그로인해 일어나는 훗날의 하자는 이를 보수하는 비용이 더 큰 경우가 많다. 설령 그렇지 아니하다고 하덜가도 더 큰일을 도모함에는 결코 도움이 되는 일이 없다. 꿈은 크게 갖되 꿈을 이루는 기초는 가능한 한 단단히 다질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5. 나오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이제는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루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은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시작이다. 여지껏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하나의 초석을 닦은 것에 불과하다. 이제나는 시험공부가 아닌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하고 싶다. 기회가 닿는대로 불우한 이웃들의 법률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회적 의사의 역할을 할 것이다. 기회가 닿는 다면 외국유학이라도 가서 보다 많은 공부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허황된 꿈이 아니다. 기회를 잡기위한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이다. 어려운 환경에 갈등하는 청소년이 있다면 이러한 내 희망을 자신의 희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진로교육 제 26호, "역경극복사례", 제주도 교육연구원 출판, 1997, p37 |
첫댓글 글 내용이 참 길어서 읽으신분은 참 힘드셨을것이라 생각합니다...이글을 올리면서 저는 이 글을 쓰신분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하지만 이분의 글을 보면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았고 느낀점이 참 많았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것이 기회였다....마음에 와닿는 어귀다....주어진 환경환경에서 원하는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공을 향한 제일 빠른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긴 글이없지만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내 모습과 비추어 이분의 모습을 보며 이분처럼 멋지게 살아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