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중기 진 효공秦 孝公이 상앙의 변법을 시행한 이래, 진 혜문왕秦 惠文王이 파촉지역을 점령하면서 진의 국력은 크게 성장하였다. 이러한 국력의 신장과 함께 진의 동진이 가속화되면서 특히 그 공세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있던 삼진三晉(한韓, 조趙, 위魏)은 무제한으로 진격해오는 진군을 막느라 사력을 다 해야 했다. B.C. 275년 위염魏冉이 이끄는 진군이 위나라를 침공하여 수도 대량大梁까지 쇄도하자 한나라의 구원군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이 패배하여 온溫지역을 빼앗겼다. 이듬해에는 호상胡傷을 지휘관으로 하는 진군이 위군 15만을 참살하고 남양南陽을 할양받았다. 이러한 진의 승리는 동방제후국들을 경악시켰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합종의 맹약을 맺어야 할 필요성을 대두시켰다.
그러나 소진蘇秦의 합종合從책은 이미 그 효용성의 부족함이 입증되어있었다. 진군의 교묘한 이간책에 말려 상호 신뢰가 부족하였던 연합군은 거의 대부분 제풀에 무너졌다. 장의張儀 이래 추진된 연횡連衡책은 원교근친遠交近親의 방법론으로 현실화되어 연합군을 갈라놓았으며 이 정책은 이후 진 소양왕秦 昭陽王(혹은 진 소왕이라고도 한다) 시기, 범수范睢에 의하여 원교근공遠交近攻책으로 발전하였다. 이 뛰어난 외교정책으로 인하여 합종연합군은 계속하여 붕괴되었고, 모든 국가를 동맹에서 떨어뜨려 각개격파하려는 진의 의도는 거의 대부분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이처럼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는 진에 대응할만한 국가는 초楚와 제齊 뿐이었으나, 춘추시대 진晉과 함께 남북의 패권을 겨루던 초나라는 전국시대에 이르자 국토는 넓지만 속 빈 강정으로 전락해 있었다. 장의의 외교로 인하여 합종에서 분리된 초나라는 이후 진의 강력한 공세에 계속하여 동천하여 도망가고 있었으며, 초 회왕楚 懷王시기에는 국왕이 진에게 납치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진에 대응할 국가로는 동방의 대국 제만이 남게 되었다. 제 민왕齊 閔王의 통치기에 이르러 제의 국력은 진 소양왕이 제나라에 함께 제왕帝王의 칭호를 쓰도록 권할 만큼 강력해져있었다.
실제로 제나라 또한 동방열국들의 패주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이 시기 제나라에게는 분명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으며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제나라는 제초위 연합군을 형성하여 송宋을 정벌하면서 열국들을 지휘할 권한이 있음을 과시하려 하였다. 하지만 제나라의 짧은 전략적 안목은 주변 국가들을 향한 무모한 외교적 언행으로 표출되었고 이는 결국 제의 몰락을 불러왔다.
B.C. 284년, 제에 국토의 1/3을 빼앗긴 바 있던 연燕은 제에 복수하기 위해 오랜 기간을 준비, 진, 조, 한, 위에 제안하여 악의樂毅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5국 연합군을 일으켰다. 이 막대한 공세로 인하여 반년만에 제나라의 70여개 성이 함락당하였고 제 민왕은 초에서 파견한 지원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비록 전단의 선전으로 인하여 빼앗긴 성들을 되찾고 제나라를 다시 세우긴 했으나 이미 진과 겨루던 초강대국으로서의 면모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리하여 전국 말에 이르러 진에 대항할 강국은 거의 모두 경쟁에서 탈락하였다. 승냥이와도 같은 진나라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국가는 없어보였다. 진군은 더욱 가열차게 동방으로 침공하고 있었다.
발단 - 장평으로의 길
진의 동진에 있어서, 가장 먼저 걸림돌이 되는것은 삼진三晉이다. 춘추시대에도 진 목공秦 牧公의 동진시도를 좌절시킨것은 진晉나라였고, 전국초에도 가장 먼저 칠웅으로 발돋움한 위의 견제로 인하여 진의 동진시도는 끊임없이 무산되었다. 하지만 진 혜문왕 이후 삼진은 진의 파상적 공세를 막는데에 온 국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진의 국력은 강화되어있었다. 진 소양왕 42년(B.C. 265)이후 진군은 한나라에 대대적 공세를 감행하여 소곡少曲, 고평高平을 점령하고 이듬해 형성陘城 주변의 9개성을 추가로 점령하였다. 3년째에 이르러 무안군 백기白起가 태향산 동남의 남양南陽을 공격함으로서 수도 신정을 중심으로 한 한나라의 남부지역과 북부의 상당을 연결하는 지역은 야왕성野王城만이 남았다. 이로서 진의 전략적 목표가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실제로 다음 해 진군은 야왕성을 점령하여 황하를 기준으로 한나라를 남북으로 분단시키는데 성공한다.
한나라는 이러한 진의 공세에 맞설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미 100여년 가까운 진의 공세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손상되고 있었고 이궐지전伊闕之戰에서 위와 한의 24만 연합군이 백기에 의해 섬멸당하면서 국가의 존립이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결국 한왕은 분단된 북쪽의 상당군을 진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상을 청했다. 상당군의 주민들은 남쪽의 한나라 본토로 피난가려고 했으나 그 사이를 막은 진군에 의해 그럴수도 없었다. 진국 지배하에 들어간 지역 주민들이 당하는 가혹한 통치는 이미 타 지역에도 널리 알려져있었다. 상당군수가 투항을 거부하자 한왕은 새로운 군수를 임명하여 보냈으나 그는 항복 명령을 거부하고 조나라에 투항해버린다.
당시 조는 삼진 중에서 유일하게 진과 맞설 힘이 남아있던 국가였다. 다른 두 국가(한, 위)와는 다르게 진의 직접적인 공격에서 비껴나가 있었는데다가, 조 무령왕이래 북방의 이민족으로부터 최초로 기마병을 전장의 주연급 조연으로 도입하여(기병 자체는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나 그것을 전장에 적극 활용한것은 조나라가 최초였다) 군사력을 크게 강화하는 한편, 재상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의 두 명콤비로 인하여 국력과 전투력이 크게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조나라는 화씨지벽 사건(조 혜문왕趙 惠文王이 화씨의 벽이라는 보물을 손에 넣자 진 소양왕이 그것을 뺏으려 한 적이 있었다)과 민지岷池 회동에서 진에 맞선 적이 있었으며(혜문왕과 소양왕이 서로 상대에게 탄주를 하게 하면서 그것을 사관에게 기록하게 했다), 그 뒤에도 진의 동진을 지켜보며 저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따라서 상당군이 투항해오자 조 효성왕趙 孝成王이 크게 반겼음은 물론이다.
상당군수는 원래 군민을 이끌고 조나라에 투항하려 했다. 그러나 조 효성왕은 군민은 물론, 상당군 자체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상당군은 조의 코앞이다. 주는 떡을 받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국 조나라가 동원령을 내려 남하하여 염파를 사령관으로 한 조군이 상당으로 진공하자 진소양왕은 분통을 터뜨렸다. 진왕은 엄청난 피를 흘리고 얻으려 한 영토를 눈앞에서 타국에 넘겨줄 만큼 너그러운 자가 아니었다. 마침내 진나라 지도부도 장수 왕흘王訖(혹은 王齕)에게 20만의 병력을 주고 공격을 명령했다. 이로서 전국시대 최대의 전투, 장평지전長平之戰의 막이 오른다.
양측 군대
당시 각국의 병사들은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다만 약간의 차이는 있는데 이를테면 위나라는 중무장보병을 주력으로 한 반면, 진군은 경무장보병을 주력으로 썼다고 추측된다. 하지만 전체적인 무장이나 전투방법, 편제등은 비슷했는데 이는 긴 전란기 동안 어느 한쪽이 보다 뛰어난 기술이나 편제를 도입하면 상대방도 즉시 그것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기술은 매우 뛰어난 경지에 도달해있었다. 현대에 발견된 당시의 무기는 녹슬지 않도록 크롬으로 도금되어 처리되었는데 이는 20c에 들어서야 독일에서 개발된 기술이다. 비록 당시 무기는 청동으로 만들어졌지만 현대의 중탄강과 비슷한 강도를 지녔고 14가지 이상의 금속이 사용되어 뛰어난 살상력을 발휘했다.
병마용에서 발견된 토기 등을 볼 때 당시 중국은 철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있는것으로 추측되나 그 철기의 제련능력이 청동기의 그것과 비하여 상당히 부족하였다고 보인다. 당시 철은 주철이 대부분이었고 주로 농기구에 사용되었으며(무기로 쓰기도 부족한 청동을 농기구에 쓸 수는 없는 노릇..) 무기 등은 주로 청동으로 만들어진것으로 추측된다. 철기는 한대漢代에 들어서야 보편적으로 도입된다.
한편, 위에서도 말했듯이 진군의 경우 상당히 단순한 갑옷을 착용하였는데, 병마용갱에서 발견된 병사들은 주로 몸의 앞가슴부터 배까지와 뒷등 부분만을 보호하고 있다. 당시 진나라에 중무장 갑옷을 생산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사기史記」에 따르면 100만에 이르는 병사에게 보급할 갑옷을 생산할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병마용에서 경무장 보병이 많이 발견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것이 진나라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키거나 하지는 않은 듯 하다.「사기史記」와 「한비자韓非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있다.
"전쟁터에서 진나라 군사는 가슴을 내놓고 맨팔일 뿐아니라 심지어 갑옷도 벗어버린다."
"그들은 맨머리에 맨팔로 용감하게 앞으로 나간다. 6국의 군대는 진나라 군대와 비교하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그들은 왼손에 사람의 머리를 잡고, 오른 팔에는 포로를 끼고 자기의 상대를 쫓아가서 죽인다."
이처럼 경무장이 진군의 전투능력에 부담이 된거같지는 않다. 오히려 진의 군대는 당대의 최강군으로 라인배틀은 물론 난전과 공성전에도 능했으며 야전 축성 능력에서도 상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당대 최첨단의 무기로는 석궁도 있었다. 상단 궁병은 발사를 준비하는 모습이다(지금은 없지만 원래는 저 병사의 손에 석궁이 들려있다). 사정거리는 무려 600보에 달했다고 하니 대략 300m를 범위 내에 둔것으로 추측된다. 이미 말릉의 전투에서 참모 손빈의 계략에 의해 위군이 전멸당한 예가 있는데 방연이 이끄는 선봉대 1만이 미리 준비하고있던 한군의 쏟아지는 화살에 순식간에 괴멸상태에 이른것을 보면 그 능력을 짐작할 만 하다.
석궁에는 또 다른 이점도 있다. 일반 활의 경우 짧아도 3개월에서 반년의 연습이 필요한 반면 석궁은 훨씬 짧은 훈련기간으로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었으며 이것은 중국 궁병의 대량 육성에 한 축이 된다. 당대 갑옷으로 이 석궁의 활을 막아낼 수 있을리 없었으니, 대규모의 궁병이 밀집한 적군에게 공격을 가하면 그야말로 순식간에 '녹아서'사라질 정도였다. 그만큼 이 석궁은 고대사상 최강의 학살무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병마용에는 기병의 모습도 보인다. 이미 진 목공秦 牧公시기부터 기병을 사용한 기록은 있으나 그것을 본격적으로 사용한것은 조 무령왕趙 武靈王이 처음이었다. 조나라는 북방으로부터 유목민족의 공격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국가였기에 기마병의 효용성을 가장 빠르게 인식했고 이 북방의 오랑캐胡로부터 호복胡服을 도입하여 호복기사騎射를 육성함으로서 중국사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기병이 등장한다. 이들은 보병이 주력화된 시기에 별동대로서의 역할을 했는데, 특히 그 돌파능력으로 보병의 전열을 파괴하는데에 최고의 능력을 보였다. 다만 당시에는 페르시아말과의 교배가 있기 전인지라 말의 크기가 작았으며 게다가 등자도 없었기에 대규모로 훈련된 병사를 육성하거나, 혹은 전쟁의 주력 역할까지 하지는 못했던것으로 추측된다.
양측 지휘장수
진군秦軍
백기白起
진국 미현 출생으로 16세에 입대한 이후 진나라 통일전쟁의 핵심으로 활약한다. 초나라에 3번 진공하여 합쳐 35만의 초군을 격멸하였으며, 이궐지전을 포함하여 한군과 위군 30만을 섬멸하였다. 또한 장평지전을 포함하여 조나라 군대를 무려 60만이나 참살하였다. 37년간 전장에서 활약하며 70여개의 성을 점령하고 165만의 적군을 섬멸하였다.
진나라의 섬멸전 교리를 크게 발전시켜 추격섬멸전과 포위섬멸전을 완성하여 중국사상 가장 섬멸전을 잘 이끈 장군으로 평가받으며 야전축성을 통하여 공격보조수단으로서의 기지를 잘 사용하였다. 초에 대한 공격에서는 수공을 통하여 적군을 몰살시키는 등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능력과 발전한 공사기술의 활용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인 장군이다. 군공이 뛰어나 무안군이라는 봉호를 받았으며. 크고 작은 전투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아 불패전신의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한단지전에 대해 승기가 없다며 지휘봉 잡기를 거부하다가 진 소양왕의 분노를 사 결국 죽음을 당한다.
조군趙軍
조괄趙括
진군을 격퇴한 조나라의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로서 어렸을때부터 이미 병법서를 연구하여 이론에서는 누구도 따르지 못했다. 한번은 아버지(조사)와 병법을 두고 토론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를 오히려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좋은 평을 받지 못했고 실제로도 인격적으로 그다지 완성되지 못하였다.
아버지 조사가 큰 군공과 높은 직위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받은 은상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던데 반해 조사는 하사받은 금화를 자기 집에 감추고, 이익이 될만한 토지와 가옥을 사들이는데 바빴다.
실전에서 큰 공을 세운 적도 없으면서 소년 시절부터 병법을 배워 군사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고 교만해 했으니 장군에 임명될 때 어머니가 조왕의 앞에 나서서 그를 장군으로 임명치 말아달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독선적인 면이 있어 선임자를 대신해 장군이 되었을 때, 군령을 모두 바꾸고 군대의 벼슬아치들을 모조리 교체시키고 자신의 방법을 고집했다.
이처럼 그는 편협하고 크게 볼 줄을 모르는 자였다. 아버지 조사는 그에 대해 이렇게 혹평했다.
"전쟁은 죽음이다. 괄은 그것을 모르고 쉽게 말로 이야기한다. 그를 장군으로 삼으면 조군은 파멸당할것이다."
지금도 이를 비꼬아 "조괄의 병서兵書"라고 하면 이론으로만 박식한 사람을 뜻한다.
장평의 대전을 앞두고 조 효성왕에 의해 등용되어 조군의 총지휘를 맡는다.
염파
인상여와 함께 조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던 장군.
장평의 전투 이전부터 이미 진나라를 상대로 여러차례의 크고작은 전투를 벌였던 백전노장이다. 민지의 회동때는 진에 의한 조왕의 무력납치를 대비하여(이미 진 소양왕은 초나라와의 회동에서 초 회왕을 납치한 전례가 있었다) 조군을 이끌고 회동장소 주변에 주둔해있기도 했다.
진왕과의 담판 등에서 공을 세운 인상여가 수많은 군공을 세운 자신보다 높은 상경의 자리에 오르자 이를 시기한 적도 있으나 이후 인상여의 관용에 크게 후회하며 용서를 빌었다.
이로부터 유래한 고사가 문경지교刎頸之交이다.
전개
왕흘이 진군을 이끌고 상당군에 도착했을땐 이미 군민들이 모두 피난간 후였다. 왕흘이 급히 추격했으나 염파가 이끄는 조군은 빠르게 남진, 장평에 도착하여 군민을 모두 접수하고 진의 침략을 천하에 알렸다. 이렇게 되자 진군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적진 깊숙이 들어온 꼴이 되었고, 연합군(보통 무산되기는 했지만 합종연합군의 공격은 자주 진을 위기에 빠뜨렸다)이 언제 몰려올지도 모르는 불안한 처지에 빠졌다. 게다가 염파는 애초에 장기전을 각오한 듯 장평에 군영과 보루를 세우고 아예 나가지도 않았다. 진군은 조나라의 몇차례 기습에 반격하여 승리하기는 했지만 조군에게는 작은 타격밖에 되지 않았다. 진군은 빠른 결판을 내기 위하여 계속하여 맹공을 펼쳤으나 2개월간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조군이 꿈쩍하지 않자 사기와 예기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진군에게는 불리한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염파는 근거리에서 본토의 보급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 왕흘은 먼 거리에서 온데다가 적지에 있었고, 게다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합종연합군의 공격을 걱정해야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진의 재상 범수는 고민에 빠졌다. 이미 몇차례의 실패로 인해 그의 정치적 입지는 상당히 좁아져있었고, 이번 상당군의 공격도 범수가 주도하였기에 만약 여기서 패배한다면 재상자리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범수는 이러한 대치상황의 타개를 위해서 방어전을 주장하는 노장 염파를 제거하기 위한 계책을 짜내었다. 조나라에 퍼져있던 진의 첩보조직을 통하여 염파에 관한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한편 조에서 파견된 강화사절 정주鄭朱를 정중하게 대하고 대대적으로 전쟁을 중지하고 평화회담을 체결할 것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초와 위의 합종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모략을 꾸몄다.
동시에 범수는 그의 정적에 가까웠던 백기를 장평에 지휘관으로 보내도록 한다. 이때 장평에 배치된 진의 병력이 어느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10만에서 20만 사이로 추측된다. 보급상의 어려움과 적지에 놓여져있다는 패널티까지 포함하면 진의 승산은 희박했다. 하지만 여기에 백기가 더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백기는 이미 초나라에서 적의 십분지일의 병력만 지닌 상태에서 역으로 적군을 몰살시킨 바 있었다). 때문에 무안군 백기가 장평에 파견되었다는건 일급 기밀로 취급되었으며, 진의 군영에서는 백기의 이름을 입밖에 내는 자를 바로 사형에 처하여 비밀을 지켰다.
한편 조 효성왕은 염파의 소극적 전법에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루창樓昌의 건의를 받아들여 평화사절을 보내기는 했었지만 그것은 조나라가 불리해서가 아니라 유리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유리한 상황에서 몇차례의 패배(비록 조군에게는 미미했다 해도)를 당하였고, 공세로 나가기는 커녕 보루를 쌓고 방어전을 펼치는 염파는 조왕에게 조바심을 내게하였다. 이런 타이밍에 범수가 조나라에 흘린 유언비어는 조왕의 불편한 심기를 더욱 자극하였다.
진나라의 첩보전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염파를 모함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진군는 다른 것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이름높은 명장 조사의 아들인 조괄이 조나라의 총대장으로 임명되는 것만은 두려워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마침내 조왕은 미끼를 물었다. 염파를 불러들이는 한편 젊은 패장 조괄을 임용하여 전선에 파견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인사는 많은 이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염파와 함께 조나라의 양대 버팀목이었던 인상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거문고를 타는 이가 만일 안족(雁足)을 거문고 줄에 고정시켜 버린다면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소리는 나지 않습니다. 확실히 조괄은 그 아버지의 병법을 계승받았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으나, 그것은 학문적인 것일 뿐 일단 실전에 임했을 때는 임기응변하는 지휘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조괄의 어머니도 조왕에게 청원하여 말하기를
"지난 날 제 남편도 장군에 기용되었지만 조금도 교만하지 않았고, 왕으로부터 받은 은상(恩賞)을 모두 부하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제 아들인 괄(括)은 장군에 임명되어 열병을 할 때 오직 뽐낼 줄 밖에 몰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사하신 금화도 모두 자기 혼자 가졌고 그것으로 토지와 가옥을 마구 사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저의 아들이 어찌 아비의 뒤를 계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왕은 조괄에게 조군의 지휘권을 맡겼다. 이를 들은 조괄의 어머니는 왕에게 패배하더라도 자신의 가문에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고 했다 한다.
물론 조왕이 단순한 유언비어에 혹하여 수십년간 조에 충성한 염파를 불러들였을리는 없다. 조괄을 전선에 보내면서 20만의 추가 병력을 함께 전선에 파견한 것을 볼 때 기존에 장평에 있던 군대와 합치면 물경 45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된다. 아무리 총력전이 발전한 전국시대라 해도 이처럼 막대한 인력을 전선에 오래 붙들어놓는다면 조나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
그렇다면 당시 한단의 조나라 지도부는 애초에 대치하고 버티는 장기전이 아닌, 빠른 결판을 작정하고 뛰쳐나왔다고 봐야한다. 이전부터 계속되는 진의 한, 위 침공에 대응하여 양국을 구원하는 전투를 펼치던 조나라는 이 차에 모든 국력을 기울여 진군을 괴멸시킴으로서 당분간 진이 공격을 감행할 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염파는 이러한 단판 야전에 반대하는 사령관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노장 염파를 불러들이는 한편 당시 공격작전을 주장하던 조괄을 지휘관으로 보냈다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미 조나라는 B.C. 270년에 한나라의 구원요청을 받고 조사趙奢(위에서 소개했듯 조괄은 이 사람의 아들이다)를 사령관으로 한 구원군을 보내 진군을 대파한 적이 있었고 그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대전에 나선것이다. 만약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관중의 호랑이는 한동안 함곡관 뒤의 우리에 갇혀있어야 할 것이었다.
현장에 도착해서 왕흘로부터 군대를 인수받은 백기는 과감한 공격을 주장하는 조군의 신임 사령관을 염탐하기 위하여 우선 탐색전으로 1만여의 병력을 보내었다. 조괄은 즉시 대응하여 다수의 병력을 출격시켰고 이에 패전한 진군은 진채로 돌아온다. 백기의 예측은 들어맞았다. 조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승리하여 더욱 기세등등해진 조괄은 압도적인 병력과 가까운 보급선 등을 믿고 진채를 거두어 진격하기 시작한것이다. 애초 조괄은 백기만 아니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자신만만하게 조왕 앞에서 공언하고 왔었다. 왕흘쯤은 어렵지 않게 패배시킬 수 있으리라(조군에서는 진군의 사령관이 바뀐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미 무안군은 조군의 공격을 예측하고 있었다. 조의 사령관이 변경된 사항부터 그 변경된 사령관의 성격과 그가 행할 전술을 모조리 궤뚫고 있던 진군은 조의 공격에 대비하여 보루를 길게 쌓아놓고 있었고, 보병이 주축이던 조군은 단단하게 축성된 진의 보루 앞에서 크게 시간을 허비했다. 이 때 백기는 조군을 그냥 보내면서 3만여의 별동대로 조군의 후방을 차단한다. 조군은 진군을 무리하게 추격하다보니 전열이 흩어져 통일된 명령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40만이 넘는 막대한 병력은 그 전열을 유지하기도 힘들지만 다시 가다듬기는 더욱 힘들다. 이 때 5천의 진나라 기병이 강력한 충격력을 바탕으로 조군의 방진을 돌파하면서 조군의 전열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틈을 타서 잘 훈련된 진군의 경무장보병이 출격하여 조군을 계속하여 난타하기 시작했다.
조군의 명령체계는 이미 붕괴되어있었다. 어떤 정예군이라 해도 전열이 무너지면 제대로 싸울 수 없다. 하물며 상대는 당대 최강의 진군이다(진나라 병사는 회전은 물론 난전에도 더없이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고 한다). 참담한 패배가 이어졌으나 조군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진군이 아무리 정예라 해도 40만이라는 대군을 한번의 회전으로 궤멸시킬 수는 없었다. 조군은 급히 후퇴하기 시작했으나 이번엔 후방에 포진한 별동대의 공격에 좌절하였다. 포위당한것을 인식한 조괄은 즉시 현지에 보루를 쌓으면서 대치하였다.
백기가 전선에서 전선하는 동안 후방의 진 소양왕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친히 하내까지 행차한 소양왕은 15세 이상 60세 미만의 장정들에게 1계급의 하사를 약속하며 총동원령을 내렸다. 본래 진에서는 조나라가 40만씩이나 밀고 내려올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포위망에 몰아넣었지만 그 수는 조나라가 훨씬 많았으며 만약 조나라가 추가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포위망의 외피를 뚫는데 성공한다면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될 것이었다. 그러나 진나라 군대가 먼저 도착하여 포위망을 견고하게 다진다면 반대로 조나라가 패배할것이다. 본래는 적의 목을 베어와야 1계급을 하사했지만 편법에 가까운 방법을 통하여 병력을 모집한것은 그것이 전장밖의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동원력 싸움에서 진군은 승리했다. 비록 후방과의 거리가 길었다고는 하나 진나라의 뛰어난 행정체계는 그 보급로의 패널티를 덮고도 남을 위력이 있었다. 상앙의 변법이래 진나라의 동원능력은 칠웅중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조나라는 사실상 국가의 모든 여력을 다 동원한 뒤였다. 진나라는 순식간에 대군을 편성하여 전선에 보낸 반면 조나라에서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한편 조괄은 진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하여 계속하여 진군을 난타하고 있었다. 하지만 철벽과도 같은 진나라의 포위망은 그야말로 강철의 원환과도 같이 조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러한 포위상태가 1달 반을 지나자 조나라 군영의 비참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식량이 다 떨어지고 시체를 뜯어먹을 지경이 되자 조괄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으나 그러한 시도는 모두 무위로 돌아갔따. 결국 조괄이 자신을 따르는 병사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진군을 돌파하다가 화살에 맞고 전사하자 40여만의 조군 전원은 묵묵히 영채를 열고 항복하기에 이른다.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포로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사기에서는 진군이 포로들을 계곡으로 몰아넣고 입구를 막아 모두 생매장했다고 한다(열국지에서는 포로들이 한밤중에 참살당했다고 한다. 다만 사기의 기록이 보다 신빙성 있어보인다). 어느쪽이건 간에 40만에 이르는 포로들이 모두 학살당한것은 분명해보인다. 어째서 백기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소양왕 등의 지시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 다만 몇가지 추측해볼 수는 있다. 첫번째로 포로의 수가 진군보다도 훨씬 많아졌다. 그 엄청난 포로를 함양(진나라 수도)으로 압송하다가 반란이라도 나면 수습하기 곤란한것이다. 둘째로는 식량이다. 이전에 파촉을 공격하여 성도 평야지대를 얻기는 했으나 40만에 이르는 포로를 먹여살릴만한 식량은 진나라로서도 큰 부담이었을것이다.
어쩌면 그런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국시대에 이르면 이미 춘추시대와는 전쟁의 양상이 달라져있었다. 손자는 전쟁은 자국이 강해지는것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고 했지만 백기의 시대에서는 이미 적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파멸시키느냐가 전쟁에서의 승패를 가늠하는 조건이 되어있었다. 진군은 승자였고 그들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었다.
파급 - 한단지전
장평지전의 결과는 백기가 살려보낸 200여명의 병사들을 통해 조나라에 알려졌다. 차마 말하기도 힘든 참혹하고도 엄청난 패배에 조나라는 국가 전체가 공황상태에 빠진다. 마음을 추스릴 여유도 없었다. 불패전신의 군대는 조나라 도성 한단으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백기는 이 기회에 조나라를 멸하려고 한것으로 생각된다. 200명의 병사를 일부러 살려서 보낸것은 심리전의 일종이리라). 당장 대응하지 않으면 조나라의 존립 자체가 위험한 지경이었다. 조나라는 소대蘇代를 진에 보내어 당시 재상이던 범수를 설득, 한과 조가 진에 땅을 바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게 되었다. 백기는 조나라를 멸망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며 분노했지만 진의 군령은 절대적이다. 무안군은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조왕은 강화조약을 수행하지 않았다. 진나라에 땅을 할양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남은 여력을 짜내어 국방을 강화하여 진의 다가올 침공에 대비하고자 했다. 이전 한과 위가 겪은 운명(계속하여 땅을 바치고 강화를 요청하는)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평에서의 재앙은 이미 열국에 알려지고 있었다. 승냥이와도 같은 진의 침략성이 다시 증명되었고, 다음의 전쟁에서 진군의 침공을 장기간 버텨낼 수만 있다면 합종연합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강화조약이 불이행되자 B.C. 259년 진나라가 다시 조에 침공하였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백기는 진군의 지휘권을 받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조나라를 멸망시킬 기회는 장평지전 직후였으며, 현재는 이미 조나라와 그 주변국이 진의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를 공고히 했으므로 공격하여도 성공하기 힘들다고 주장하였다. 진왕은 듣지 않고 왕릉王陵을 사령관으로 하여 조나라 도읍 한단을 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조나라는 장평지전에서의 패배로 인한 공황상태를 오히려 반진의 기치로 전환시켰다. 진의 공세 앞에서는 상하좌우가 없었으며 모두가 그 학살자들을 막기 위하여 싸웠다. 장평의 패배는 조나라에게 있어서 단결을 위한 촉매로 작용하였고 온 국민이 힘을 합쳐 견고한 한단성을 기반으로 진군의 공세를 계속하여 패퇴시켰다. 소양왕의 계속된 명령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백기가 계속하여 지휘권을 받기를 거부하자 이번엔 왕홀을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나 역시나 한단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공격 2년째인 B.C. 257년, 진나라는 증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미 국제여론은 진에 불리하게 돌아가고있었다. 전국사공자중 일인인 평원군이 초 고열왕楚 考烈王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어내는데에 성공하고 또 다른 전국사공자이던 위의 신릉군 또한 적극적으로 조나라를 구원함으로서(신릉군은 위왕의 호부를 훔쳐내고 사령관 진비晉鄙를 살해하여 위군의 지휘권을 뺏은 뒤 그것으로 조나라를 지원하였다) 초와 위의 군대가 한단에 도착하여 조군과 연합, 공세를 펴서 진군을 패퇴시킴으로서 조나라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한단지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조나라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장평에서 잃은 40만의 장정은 조나라로서는 국력의 거의 전부를 기울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상 최악의 손실은 결코 복구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진군의 공세는 늦춰지지 않았다. 비록 한단지전에서 패퇴했지만 얼마 뒤 군사를 재정비하여 한과 조를 다시 공격하여 합쳐 13만의 병력을 참수함으로서 그 국력이 건재함을 과시한것이다.
의의 - 신시대의 여명
B.C. 770년, 주 평왕周 平王이 낙읍洛邑으로 천도하면서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발전을 구가했던 시기다. 이 시기 수많은 영웅과 장군, 그리고 사상가와 정치인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 사상과 정치뿐 아니라 군사력에도 커다란 혁신이 일어난다.
춘추시대까지만 하여도 3만의 병력이면 천하의 패권을 지닐 수 있었다. 양대 강국이던 진과 초도 5만의 병력만으로 패자의 자리에 올랐다. 천승지국, 만승지국이라는 말은 그러한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병거가 주력인 시대에서 보병이 주력인 시대로, 그리고 귀족이 이끌던 전쟁에서 총력전으로 변하면서 모든 국민이 병역의 의무를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국시대 후기에 이르면 수십만의 병력이 몇년에 걸쳐서 전선에 투입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 시기 전쟁양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예로 전투교리의 변화가 있다. 춘추시대에 쓰여진 손무의 병법서에는 궁박한 적을 공격하지 말라거나, 혹은 성에 대한 공격은 최대한 피하라는 등의 내용이 쓰여져있었다. 자국보다 더욱 강대한 국가와 싸우려한다면 손무는 '싸우지 않는게 최선'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국초, 그의 자손이라는 손빈의 병법서에는 성에 대한 공격, 혹은 자국보다 더욱 강력한 적을 상대로 싸우는 방법도 함께 기술해야 했다. 이것은 손빈이 손무보다 더 호전적이라서가 아니라 시대가 전투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전쟁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강대국의 병탄시도에 맞서서 싸우지 않으면 멸망할 수 밖에 없던것이 전국시대였다.
전국말에 이르러 진의 노장군 왕전이 진왕에게 아뢴 다음의 말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말해준다.
"예와 지금은 싸우는 방법이 다릅니다. 예전에는 적을 무기로 치되 되도록 중상을 입히지 않게 함을 명예로 삼았고, 죄를 꾸짖어 항복을 받는 것을 최고로 쳤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제환공은 단 3만명으로 천하의 패권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힘만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서로 죽고 죽이며 땅을 빼앗는 시대입니다. 예전엔 천승의 전차만으로도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린 소년부터 백발이 성성한 사람까지 군적에 올라있습니다..."
군사력이라는것은 단순히 농민에게 창칼을 쥐어준다 하여 성립하는것이 아니다. 장정의 동원능력, 그리고 그들에게 먹일 식량의 생산(농업기술)과 국가의 토지/인구 장악력이 그 뒷받침을 충분히 해줘야한다. 또한 장정들에게 최소한의 군사훈련을 시행해야한다. 또한 적군에게 효율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살상력 있는 무기와 축성기술의 발전도 함께 요구된다. 적의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첩보조직의 형성과 유지능력도 필수 사항이다.
장평지전은 이처럼 발전한 전쟁기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적을 속이는 반간지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방대한 첩보조직, 또한 막대한 병력의 동원과 이를 지원할 풍부한 경제력, 그리고 그 군대를 움직이는 전투교리등을 통하여 백기의 군대는 장평의 조군을 철저하게 파멸시켰다.
어떠한 발전이 이루어지면 시대정신이 그 발전을 억누르거나 혹은 발전이 시대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전국시대는 시대정신 그 자체가 곧 혁신이었던 시대였다. 유례없는 강국들의 등장과 대군의 출현은 그러한 시대를 반영하였다.
B.C. 3세기경, 전국시대도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대륙을 움직이는 역동적인 흐름은 하나의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의 이행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껏 없었던 시대, 당대까지 대륙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신시대의 여명이 서서히 그 막을 올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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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장평의 전투로부터도 수년이 지난 어느날, 조의 수도 한단에서는 조희趙姬가 남편을 다시 본다는 생각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남편이 떠나버린 뒤 젊은 그녀는 혼자서 아들을 키우고 있었지만 그런 고생도 이걸로 끝이었다. 진으로 가면 조희는 자신이 하고 싶은것을 마음껏 할 수 있으리라.
들떠있는 어머니에 반해 아들은 차분하게 주변을 정리했다. 출발은 다음날이었다. 그동안 사귀어왔던 연나라 아이(그도 인질로 잡혀있는 몸이었다)와 작별인사를 나누었고 방을 깨끗하게 치웠다. 이제 이 아이가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없는듯 보였다.
어린 정政은 문득 하늘을 보았다. 함양에서 그가 무엇을 보게 될 지, 무엇을 하게 될 지에 관하여 아직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것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의 동원력은 약간의 과장을 포함해도 그 정도가 맞다고 보면 됩니다. 진이 통일한 후, 각종 토목사업으로 인력을 마구 망쳐놓고, 그 후 초와 한이 대결할 때에도 저보다도 더 큰 규모가 나왔었죠. (이 역시 과장이 섞였겠지만.) 유방이 제후들의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팽성을 점령했을 때에는 병력이 200만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뭐, 승자인 진나라가 괴멸시킨 상대의 규모를 크게 늘리기도 했겠지요.
첫댓글 통일후 진나라는 흉노를 막기위해 수많은 기병대를 양성했는데 춘추전국시대말에는 노(석궁)라는 무기가 있었는데 초기엔느 화살이 아닌 돌을 발사했습니다. 그후 화살로 바뀌었죠(서양에서의 석궁은 픽트족같은 애들이 썼다고 했는데)
군대가 40만씩이나 됬었나 -_-
전국시대로 와서야 가능해진 일입죠. 무지막지한 동원
에이 설마... 10만이라고 해도 믿을까 말까인데요
사서에 나온거의 1/10이라고 해도 엄청난 동원인건 마찬가집니다. 그정도 인원을 뽑아서 (대충이라도) 훈련시키고 (부족하나마) 먹이기까지 한건 그만큼의 국가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거였죠
괄호한에있는것들이 더웃기는데요...()
일단 춘추시대와 비교하면 각 국가들의 덩치부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전국시대 동안 각 국가들은 변법으로 국력을 있는대로 쥐어짜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반발도 엄청났지요. 상앙이나 오기처럼 구세력의 반발에 결국 최후를 맞은 개혁가들도 있고.
그 당시의 동원력은 약간의 과장을 포함해도 그 정도가 맞다고 보면 됩니다. 진이 통일한 후, 각종 토목사업으로 인력을 마구 망쳐놓고, 그 후 초와 한이 대결할 때에도 저보다도 더 큰 규모가 나왔었죠. (이 역시 과장이 섞였겠지만.) 유방이 제후들의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팽성을 점령했을 때에는 병력이 200만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뭐, 승자인 진나라가 괴멸시킨 상대의 규모를 크게 늘리기도 했겠지요.
만리장성을 무척이나 길게 그어놓았군요.
ㅁㄱㅎㄱㄱㄷ죠숒부붑숪ㄷㅊㅂ ㄱ
..................ㄲㄲㄲ
첫 지도를 보고 느낀 점 : 저 시절에도 한중은 역시 계륵이었던 건가?
저... 마지막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저 아이는.... 후에 전국을 재패하는 시황이로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위공자 신릉군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