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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분명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습니다. 희고 고운 얼굴에 글만 읽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이와 비슷한 백면서랑(白面書郞)도 있습니다. 흰 얼굴에 글만 읽는 사내라 부르는.... 그러나 보통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을 묶어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급제를 못해 전혀 이목을 받지 못하는, 별다른 이야기 꺼리 업시 초야에 묻혀 글공부나 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을 지칭되는 단어였습니다. 급제를 못했으니 백면서생이라 불러도 흠결이 없는 김립(金笠)은 김삿갓의 고상한 이름이지요. 실명은 김병연(金炳淵)이지만 사대부들은 김립이라 부르고 민초들은 김삿갓이라 부르며 그를 통해 타락한 세상을 질타하는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입니다. 백면서생인 사람인 김삿갓처럼 수만 가지 이야기를 남긴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해학과 통쾌한 세상에 대한 질타는 참혹했던 조선 말기에 탐관오리에겐 충격요법이었고 정권을 잡고 쥐락펴락 했던 이들에게도 정신적 혁명의 동기를 유발한 장본인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김병연은 누구인가? 하고 자문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연유에야 비로소 그의 삶 속으로 유영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안동 김 씨로서 특히 고려 때부터 세거를 이루며 내려오다 인조 때 척화파 김상현의 가문입니다. 이들은 훗날 북악산 서쪽 아래 창의문으로 나가는 길목에 모여 살기 시작합니다. 한양에서 청풍계라 부를 정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의 청운동 일원이지요. 선조 40년(1607년) 김상현의 형 김상용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대를 이어 이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김상용은 이곳 바위에다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 百世淸風) 새깁니다. 이곳에 세거 하면서 명문가문으로 이름을 날리며 장동 김 씨라 불립니다. 청운동의 옛 이름이 장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후에는 정조와 사돈을 맺은어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 같은 사람은 11실에 등극한 순조를 대리하여 정권을 틀어 쥐고 60여 년을 세도정치를 합니다. 김삿갓 집안도 장동 김 씨 일원으로 형조참판을 지낸 휴암공파 김상준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선대의 잘못된 행실로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는고 초를 겪게 됩니다. 할아버지 김익순은 1811년 평안도 방어사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평안도 사람의 차별과 관리들의 폭정에 용강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단숨에 태천, 다복동을 점령하고 이어서 가산을 침공하여 군수 정시와 전쟁을 하여 정시를 살해합니다. 기세가 오른 농민군은 정주, 곽산을 돌아 군사 요충지 선천을 공격합니다. 선천에는 방어사인 김익순이 재직하던 곳이었습니다. 싸우지도 않고 홍경래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평정된 일 년 후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 형을 받아 죽고 대명론에 따라 동생도 삼천리 밖으로 귀양 가고 아들( 김안근(金安根) 김삿갓 부친)도 역시 해남으로 귀양 갑니다. 후에 울화병으로 피를 토하고 죽지만.....
대명론에 근거하여 노비 될 팔자가 된 김병연과 그의 형 김병하, 그리고 젖먹이 동생은 함평 이 씨 어머니에 의하여 기적적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할아버지 김익순의 노복이었던 김성수는 고향 황해도 곡산으로 김병연의 형제를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세도가였던 안동 김 씨 가문의 도움으로 멸족 형에서 페족형으로 풀리자 어머니는 충남 홍성 친정으로 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가평으로 가 살다가 다시 비기파들이 주장하는 십승지의 하나인 영월 깊은 산골 어둔골로 자식들과 숨어들어 화전을 가꾸며 살아갑니다.
이곳으로 들어와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공부를 시켰던 어머니의 뜻을 바르게 받아들인 김병연은 22살 되는 해 영월 관청, 관풍헌에서 시행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이 됩니다. 비로소 김삿갓 전설의 단초가 마련된 것입니다. 그날의 주어진 시제에 맞춰 김병연은 논정 가산 충절 사탄 김익순 죄 통 우천(論鄭 嘉山 忠節 死嘆 金 益 淳 罪 通于天) 이란 답안으로 제출하여 장원급제를 합니다. 할아버지 김익순을 조롱한 답안으로 장원급제를 한 것을 안 어머니는 그제야 집 안 내력을 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김병연은 삿갓을 써 하늘을 가리고 죽장을 짚고 스스로 죄인이라 하며 방방곡곡을 유랑하였다는 이야기가 바로 김삿갓의 전설입니다.
전설과 사실은 부합되지 않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역사란 모름지기 시대적 환경 안에서 비치는 진실만이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전설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기록물에 관점을 두고 살펴보면서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역사란 기록물, 유물에 근거를 두고 고찰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관점으로만 본다면 다음과 같은 입장이 정리될 것 같습니다.
(난고(蘭皐), 김립) 김병연은 누구인가?
1. 시인이었습니다.
2. 반항아 입니다.
3.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 일탈자였습니다.
4. 조선후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낀 제도의 희생자
5. 해학과 골계가 있는 자유 분망한 방랑자였습니다.
방랑시인이 과거장 관풍헌에서 장원한, 할아버지를 조롱했다는 글은 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를 탄핵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약해 보면
대동기문 김병연 절 관서행(金炳淵 絶 關西行)에 김삿갓은 공령 시를 잘 지어서 널리 세상에 알려졌는데 관서지방에 노진이라는 사람 역시 공령 시를 잘 지었는데 김 삿갓 만큼 못하였다. 노진은 관서지방에서 김삿갓을 몰아내고자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대로 이어 온다고 말하는 나라의 신하 김익순 아! 너의 가문은 이름난 장동 김씨 훌륭한 집안, 이름도 장안의 순자(淳)항렬이 로다. 도리장군(한나라 장군)이 능서 땅에서 항복해 버리니 도리어 열사(한나라의 악비)가 공신 그림 중에 제일 높게 존경받네(가신 군수 정시와 비교함) 김립이 이글을 본 후 – 참 지었다는 말을 남기고 피를 토했다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관서지방의 땅을 밟지 않았다 하고 밝히고 있습니다.
전설에서는 자신이 지은 저 시를 통해 장원이 되고 이를 어머님을 통해 조부에 대한 살상을 전해 듣고 조부에 대한 죄 책감으로 삿갓을 쓴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미 김삿갓은 관서지방을 다녀간 적이 있다고 하는데 조부에 대한 사실을 몰랐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진이 잘 쓴 시를 읽고 피를 토했다고 하는데 장원급제를 한 시 작의 진짜 작가는 누구?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일가들이 전부 등을 돌려 의지할 곳이 없었던 병연은 한양으로 가 자신의 신분을 경기도 광주 향품이라 속이고 한양에 수년을 머물며 문객이 되어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도가의 힘을 빌리려 한양의 시인 명사들과 서로 아끼며 흉허물 없이 지내는 중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하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분을 속인 것이 들통이나 문전 박대를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출세를 결국 버려야는 사건이 가문 안에서 발생합니다. 친척 한 사람이 과거에 급제한 후 상소에 의하여 다시 취소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과거급제자 김정순은 김 익순의 종 제입니다. 대역의 손자이고 반적의 종제로서 시장에 함부로 들어 갔으니 방목에서 뽑아내 의리를 밝혀 주옵소서 – 상소가 합격자를 끌어 낸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김병연은 더 이상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깊은 상처를 받은 병연은 결국 22살에 삿갓을 쓰고 유랑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24살에 다시 영월에 들러 일년을 머물다. 다시 유랑을 하다 다시는 집을 찾지 않고 전라도 화순 동복에서 57세에 객사하여 2년 후 둘째 아들에 의하여 영월에 묻힌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빛이 보이지 않아 절망하던 김병연의 선택은 갓을 버리고 삿갓을 쓰고 눈을 닫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장동 김씨 24대 손, 김병연은 그렇게 방랑 시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김병연이 그렇게 보고 싶지 않았 던 것은 무엇일까요? 추론해보건데 ...
병연과 일가인 김조순(1765- 1832)은 정조의 사돈이며 순조의 장인으로서 11살의 순조가 등극하자 순조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습니다.소수벌열의 가문이 요직을 독점하면서 탐관오리들이 득세하고 과거시험조차 부폐하여 세상은 점점 어지럽게 변해 갑니다. 이러한 사실을 다산 정약용도 자신의 저서 여유당 전서 애절향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시 아버지 3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 아이 배 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에 걸쳐 이름이 군적에 실렸구나, 관가에 이 억울한 사정 호소연하여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섰고,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못마저 끌고 갔다오.
이런 작태를 본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그들에게 직격탄을 날려 보냅니다.
해 뜰 때 원숭이가 들에서 나고
황혼에 모기가 처마에 이르렀다.
고양이가 지나가니 쥐가 모조리 다 죽었고
밤에 벼룩이 자리에 나와 따갑게 쏜다.
탐관오리들의 야욕에 시달려 죽어나간 백성들의 시신을 보고
그대는 성도 이름도 모르는데
어느 곳 청산이 그대의 고향 인 가
아침에는 썩은 몸에 파리가 들끓더니
저녁에는 가마귀가 고혼을 조상하네
한 자 남짓 지팡이가 남긴 유물이고
몇 되 남은 쌀은 빌어먹던 양식 인 가
앞마을의 사람들 아 내 한마디 들어 보 소
흙이라도 한 삼태기 날라
바람서리나 가려주게
방랑하다 찾아 간 주인이 자신도 먹을 것이 없어 먹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접대로 내 놓은 음식 상 앞에서
다리 네 개 소나무 소반에 죽이 한 그릇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떠도는구나
주인 이여 면목 없다 말하지 마시 오
나는 청산이 물에 거꾸로 비쳐오는 것을 사랑하오
시간이 갈수록 민초들은 김삿갓 시에 열광하게 됩니다. 민초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와 김병연의 정의감을 존경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에 명성은 대단하였고 갈수록 존경받고 환영받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다 전남 화순군 구암면 동복마을 창원 정씨 종가 행락채에 마지막으로 머물렀습니다.
난고 김병연은 동복에서 시를 쓰며 마지막 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꼿꼿한데 너는 왜 그 모양 인 가
목은 가슴에 박히고 무릎은 어깨에 올라 붙어있다.
머리를 돌이켜도 한 낮에 해를 보기 어렵고
몸을 비틀어 겨우 하늘을 본다
누우면 마음 심(心)자에 세 점이 없는 모습 같고
서면 활 궁(弓)자에 줄 하나가 없는 모양이다.
천추에 통곡할 사 죽어 저 세상으로 갈 때에도 관도 없다
관도 둥 굴게 만들어야 하 리다
참여를 약속 한 사람 중 두 사람을 제외한 형제들만 성원이 되어 늦가을의 아침을 열고 남으로 내려 갔습니다. 기흥에서 벨린다님을 픽업, 그리고 조식을 해결하기 위하여 금왕 휴게소에서 정차 후 다시 출발, 어둔리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20여분 경 예정보다 많이 늦어 일정을 다시 조정해야 했습니다.
우선 함평 이씨 김병연의 어머니가 손수 지었다는 화전 가옥인 초가를 찾기로 하였습니다. 오르기 전 회갑 축시 조형물 앞에서 기념촬영 시간을 갖었습니다. 김삿갓께서 손에 천도복숭아를 움켜쥐고 있는 청동 조형물입니다. 그 연유는 사진 아래 내용과 같습니다.
회갑 축시
김병연이 어느 날 길을 가다 어느 마을에 한끼를 얻어먹으러 들러습니다. 김 삿갓의 말을 들은
주인은 손가락으로 저 아래의 집을 가르치며 저 집이 오늘 회갑연이 있는 집이니 그리로
가보라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기쁨으로 찾은 김 삿갓에게 술 한 잔을 얻어
먹으려면 시 한수를 지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 김 삿갓은 호흡을 정리한 후
저기 앉은 늙은이 사람 같지 않네 (좌중이 놀라 웅성거리 시작하였습니다. 아랑곳하지 않는 김 삿갓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구려. (좌중이 조용해지자)
눈 앞의 일곱 아들 모두 도둑놈이구려 (순간 아들들이 눈을 부라리자)
하늘 복숭아를 훔쳐 수연상에 올려바쳤구려
왕복 약 2.8km 정도의 호젓한 산 길을 걸어 올랐습니다. 아름답던 계곡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아무래도 지난번 태풍의
영향같습니다.
어수선하기만 화전가옥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흩어져 놓여 있는 농기계, 그리고 두 개의 장의자의 위치
참 눈에 거슬리입니다. 잠시 간략한 설명을 끝낸 후~~
각자 삿갓이 되어 보았습니다.
묘역 참례를 하기 위하여 다시 하산하였습니다.
작은 해우소
뒤쳐지 않으시려고 부지런히 걸어 내려 오시는 모습에 아직도 열정이 가득하십니다.
詩仙 김병연(金炳淵) 묘역
잠시 머물며 시선의 생전 모습을 떠 올려 보았습니다. 22살에 화전 초가를 떠나 24살에 잠시 돌아와 일 년을 머물다 다시
떠난 후 생전에 돌아 오지 않었던 시선은 결국 전남 동복에서 57세의 나이로 객사를 합니다. 객사 후 2년만에 둘 째 아들에
의해 이곳에 묻히게 됩니다. 한 눈에 보아도 과히 명당입니다. 꾀꼬리를 닮은 형상의 또는 노루목을 닮았다는 설도 있습니
다,( 풍수를 보시는 분들은 다른 표현을 하시지만....) 명당이라 하는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김 삿갓의
묘역이 아니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들익균이 서당을 운영하며 살던 평창 익균 무덤 위에 있는 묘가 김삿갓 묘
라는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파묘하여 DNA 검사의 과정을 거치면 확인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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