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후배와 절친한 일본인 교수가 찾아왔다.
4개국 박사학위 소지에 4개국어에 능통하고 한중일 동양문화사와 서양문화사에 정통하다는 그에 대한 후배의 소개는 그만큼 화려했다.
그런데 한국인 아내와 결혼한지 10여년이라는데 한마디도 한국어로 뱉지 않는다.
배알이 뒤틀려 나의 작품세계와 문화적 이해를 간간히 한자를 이용한 필담을 활용했을 뿐 철저히 한국어로만 설명을 했다.
물론 그가 능통하다는 일본어, 중국어, 영어, 불어 어느 것으로도 능숙한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혹시나 싶었지만 그도 역시 우리에겐 조선시대 막사발에 불과한 그들의 다완을 위해 한국을 방문해 묵고 있었다.
우리에겐 기껏해야 경매가 5만원을 넘지않는 싸구려 막사발을 지금 그들은 귀하고 중하게 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한마디 툭 뱉었다.
이제 쓸만한 다완은 한국보다 일본에 더 많을걸요...
일본인들의 다도를 향한 집념은 우리의 상상과 이해를 초월한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이 사실만을 아는 것이 옳을까? 왜 그럴까...그것까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옳을까?.
분명 이 세태는 왜?를 알고자 하는 것을 묵은내나는 퀴퀴함으로 내몰고자 한다.
그는 우리의 시각에서 세칭 친한파로 가름되는 일본인이다.
그가 담담하게 일본인에게 있어서 다도와 더러는 개밥그릇으로 쓰이는 조선 막사발을 지금도 다완으로 숭앙하는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가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동경에 있으면 일본에 있는 것 같은데...서울에 있으면 한국에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리는 말을 남겼다.
타산지석으로 대화의 맥을 찾고 잇는 것조차 쉽잖은 세태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지만 그 이야기의 다음을 오늘이 곰곰히 생각해 볼만하다고 여겨 옮겨볼까 한다.
[일본 막부정치]
일본인들의 다도와 다완을 향한 집념은 200년이상 끌어 온 내전 종식에 나섰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진 쇼군, 막부정치와 무관하진 않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는 중부 일본의 패권장악을 위해 원정에 나섰고 그의 휘하에 히데요시가 있었다.
1573년 9월 오다 노부나가는 다이묘들을 연파하고 중부 일본을 평정했다.
1577년 히데요시가 산요지방정벌에 나서 히메지성에서 다까마쓰의 모리를 공격하는 동안 1582년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가 반역하여 노부나가가 할복자살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는 즉각 모리와 휴전하고 동진하여 아케치 미쓰히데를 처단했다.
오다 씨의 가신회의에서 히데요시는 새 영주로 노부나가의 손자를 추대하고 다른 2명의 가신들은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을 옹립하려 했다.
히데요시는 1583년 반대파 중 하나를 제거하고 패권을 장악한 다음 강력한 반대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전국 통일전쟁에 나섰다.
둘은 승부를 가릴 수가 없자 동맹을 맺었다.
히데요시는 1585년 간파쿠(關白)에 임명된 이래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어 시코쿠와 큐슈를 정벌하고, 1590년 이에야스의 도움으로 관동과 오우지방을 복속시켜 다이묘 연합의 우두머리가 된 다음 전국을 장악하는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전국을 통일했다.
이로써 일본은 우리의 고려말 무신정치처럼 쇼군이 전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일본 막부정치와 다도와 다완]
히데요시는 무소불위의 지존이 되어 이를 바탕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고려말부터 한반도에 출현한 왜구의 존재는 이러한 일본의 정세와 무관하지가 않다.
처음에는 끝없는 내전으로 천혜의 조건에 불구하고 일본은 식량자급지족이 어려운 것이 까닭이었으나 차츰 부피는 작고 값이 나가는 고부가가치 문화상품의 약탈로 바뀌었다.
그 중 다이묘들이 가장 선호한 것이 바로 도자기였는데 그 중에서도 송나라 때부터 어렵게 수입해 쓰던 다완을 가장 선호하였다.
다이묘들이 겨루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가신들과의 결속이었고 이는 차를 마시며 진행되던 회의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 막사발인가?.
지난 이야기의 반복으로 화려한 오늘의 서구문명을 보면 설마 싶겠지만 이 무렵까지도 세상에서 도자기로 된 제 밥그릇과 찬그릇을 따로 가질 수 있는 곳은 한반도의 고려-조선과 중국의 송-명 뿐이었다.
잠시 본론을 벗어나 근대까지의 세계의 역사가 뒤바뀌게 한 도자기문화를 간단히 살펴 보자.
도자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흙이라는 천혜의 조건이고 하나는 불이라는 인위적 조건이다.
흙을 600~700도에서 구운 것을 토기라고 하는데 노천의 장작불 속에 집어넣는 것만으로도 소성이 가능하다.
흙을 900~1100도에서 구운 것을 도기라고 하는데 벽을 두르는 등 약간의 장치가 있어야 소성이 가능하다.
흙을 1450도 이상에서 구운 것을 자기라고 하는데 용광로에 버금가는 특별한 장치가 있어야 소성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개발된 장치가 풍구이고 시설이 가마로 당시에는 쉽사리 흉내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흙에도 천혜와 정성이라는 두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천혜의 조건에서 고령토라 불리우는 백토가 아니면 자기로 소성이 불가능하다.
암석이 풍화된 일반의 흙은 1200도에서 마그마처럼 융해된다.
다음은 도자기 원료로 쓰이는 흙으로 그 입자가 밀가루보다 고와야 한다.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흙 중 가장 고운 것이 개펄로 이를 거른 것을 해감이라고 하는데 주물의 틀로 쓰인다.
자기용 흙의 곱기는 그정도로는 어림이 없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만큼 곱다.
비가 그친 후 길가에 고인 물을 보면 고운 앙금이 하늘에서 본 서해안 개펄처럼 띠를 이루어 가라앉아 있다가 낙엽만 떨어져도 흙탕물이 되는 것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자기용 흙은 흙탕물이 가라앉은 앙금만을 모은 것이라서 웬만큼을 모으는데도 꼬박 며칠이 걸린다.
신석기시대부터 쓰인 토기는 물에 오래 담가두면 다시 형태가 무너지고 고려 초기까지의 도기는 흙 속의 유리질이 일단 융해된 것이어서 형태가 무너지지는 않지만 방수기능이 없으나 흙 속의 금속이 녹아 융해된 백토와 섞인 자기는 유약이 아니라도 방수기능을 가진다.
이러한 문화와 기술을 가지지 못한 다른 곳에서...왕과 귀족들은 금은 그릇을 썼고 일반은 목기나 도기를 썼다.
따라서 서구의 화려한 금은제 식기를 고곱문화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태조 왕건이란 드라마에서 얼핏 도자기가 나온 적이 있다. 이 또한 질못된 연출이었다.
무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물이 새지않는 그릇은 금속, 유리, 도자기, 칠기 뿐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일본 다이묘들은 회의의 품위를 위해 일반과 차별화를 위해 특별한 그릇을 쓰고자 했는데 그것이 도자기였다.
하지만 도자기는 소량의 약탈물 뿐으로 크기와 모양의 짝을 맞출 수 있는 것은 민가에서 약탈한 밥그릇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막사발이 일본의 다완으로 둔갑화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다완의 값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이를 노린 왜구들의 도자기약탈이 극성을 부리자 고려와 조선은 강진, 부안 등 해안가 관요를 폐쇄하고 내륙에 관요를 설치했다.
이로써 고려청자의 고향인 강진과 부안의 도자기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 다도의 성가는 더욱 대단한 것이 되었다.
이들에게 있아서 쇼군의 다연에 초대되고 참석한다는 것은 최상위 권력층 가신으로 공인되는 것이었으며 배제된다는 것은 곧 탈락, 제거, 죽음, 멸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 다연에서 쇼군이 자기의 다완에 차를 딸아서 내린다면 그 중에서도 심복으로 공인하는 것이었으며 그 다완을 하사한다는 것은 후계자의 일원으로 공인하는 것이었다.
[일본 대국화의 일등공신 도자기]
임진왜란이 우리에게 준 충격도 컸지만 일본은 이를 계기로 정치,경제,문화,사회 모두가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토요토미가를 물리치고 집권한 도쿠가와가의 막부정치가 시작되었고 경제, 사회적으로는 통일국가체제가 갖춰지기 시작했으며 문화적으로는 약탈에 의해 엄청난 신문물이 도입되었다.
이때 약탈한 금속활자를 기반으로 출판이 활성화 되었다. 이 조선활자가 가보로 계승된 것이 지금의 돗판출판사를 이룬 뿌리였다.
얼핏 생소하겠지만 일본을 근대국가로 발전시켜 오늘의 대국에 이르게 한 것은 정치나 군사력이 아니라 바로 도자기와 도공들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도자기에 대한 일본인들의 숭앙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납치된 도공들이 일본에서 도자기굽기에 성공한 것은 이삼평이 전국을 뒤져 아리타 이스미 산에서 백토를 발견한 수십년 후였다.
처음에 그들은 아련한 기억의 조선도자기를 흉내냈고 후에는 청나라 경덕진요의 기법으로 청화백자를 생산했다.
권력자들은 그것이 흡족해 그들을 높게 예우했다.
그 가문 중 하나가 귀에 익숙한 심수관 으로 지금의 심수관은 16대 심수관이다.
바로 이 무렵 일본에게 기회가 왔다.
로마시대부터 동북아시아에서 선진문물을 수입하던 유럽은 17세기에도 청나라에서 도자기를 수입하고 있었다.
그동안 달라진 것은 이 무역을 벵골에 자리잡고 무굴제국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던 동인도회사들이 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동남아시아 준동에 대한 보복으로 청나라는 유럽에서 최상품으로 예우받던 도자기를 수출 금지해버렸다.
단 한 개의 도자기도 생산할 수 없던 유럽의 상류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 때 임진왜란에 종군함으로써 일본항로를 알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이 도자기를 찾아 헤매다 일본에 도착했다.
때마침 일본도 이삼평이 아리타도자기의 생산에 성공한 무렵이었다.
유럽은 일본을 새로운 도자기 수입선으로 삼으며 청나라도자기의 모사품을 요구했다.
그것이 일본 도자기가 조선을 뿌리로 하면서도 전혀 다른 형태와 문양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까닭이다.
얼마 후 유럽에서 일본도자기에 대한 별도의 브랜드가 형성되자 독자적 디자인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일본만의 독특한 디자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1700 무렵 이러한 일본의 가키에몬도자기를 맨먼저 흉내낸 것은 덴마크였고 이어 독일, 프랑스, 영국도 도자기 생산에 성공했는데 처음에는 모두가 왕립이었다.
19세기 들어 흑선에 의한 강제개항을 계기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흔들리자 일왕이 막부를 몰아내는 혁명을 일으켰다.
이것이 명치유신이다.
이때 혁명세력의 주축이 도자기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관서와 큐슈의 신흥세력들이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선진 고급문화라는 일본에 대한 서구의 인식은 19세기에 형성되었는데 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마네, 모네, 고흐 등을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19세기 일본도자기는 중품에서 고급품으로 줏가를 높이고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접하고 충격을 받은 것은 일본도자기가 아니라 도자기 상자 안에 완충제로 꾸겨넣은 목판화 폐지였다.
우리의 고가구 안쪽을 옛책으로 도배한 것과 같은 쓰임새라고 할 수가 있다,
빛과 형태라는 주제로 그림의 사진적 표현에 대항하여 줏가를 높이고 있던 그들의 눈에 비친 일본 목판화의 간결한 표현에는 이미 그런 모든 것들이 상식화 되어 있어던 것이다.
그 이후 거의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이 수십점씩 일본판화를 판화나 유화로 똑같이 모사했다.
특히 경매가가 수백억원씩을 호가하는 모네의 연꽃시리즈는 자기집 정원을 일본판화처럼 고친 후 그것을 그린 것들이다.
이 명성은 1970년대 중국판화가 죽의장막을 넘어 파리에서 전시될 때까지 이어져 세계 최고의 판화는 일본이라는 강의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우리에겐 인간문화재라는 별난 제도가 있다.
도자기문화에 털끝만큼도 기여하고자 한 바도 없으면서도 역사를 말하며 뻐기는 것에서는 모두가 한 몫을 챙기려 한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되게 했는가?에도 관심이 없고
한국의 인간문화재가 되기 위한 평가 중 중요한 항목이 일본 공예전 입상경력이라는 것에도 놀라지 않으며
여주 이천 도자기 명소의 식당과 찻집에서 쓰는 그릇의 거의 대부분이 양식 자기거나 합성수지 그릇이라는 것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패키지디자인에 의한 일본경제성장]
일본 판화가 메이지유신까지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다.
일본경제는 수출주도에 의해 성장했는데 그 밑바침이 바로 판화에 의한 영향이었다.
패전 후 일본 경제가 정비가 된 것은 한국전쟁 특수였고 도약을 시작한 것은 1964년 동경올림픽 전후부터였다.
이 때 일류라고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일본은 고심을 거듭했다.
단하나 세계 최고로 인정 받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판화였다.
이 무렵 일본 상품의 특징은 단연 차별화된 패키지 디자인이었다.
1960~70년대 일본 상품의 패키지디자인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세계화와 한류유행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또렷이 보여 준다.
당시 세계의 대부분이 서양식 디자인 닮기에 몰두할 때 일본은 전통 화지와 일본식 지푸라기매듭 따위를 주력 수출상품의 소재로 삼고 상표인쇄와 광고도 일본판화의 이미지가 연상되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게 했다.
즉 내가 남을 닮는 세계화가 아니라 남이 나를 닮게 하는 세계화를 채택한 것이다.
이 전략은 정확히 맞아떨어져 일본 패키지디자인을 세계 최고에 자리매김하게 했다.
소형 전자제품에서 대형 중장비의 제품디자인까지 전세계가 한 눈에 일본적이라는 가름이 가능한 까닭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1960년대 이후 일본의 성장과 패키지디자인의 성장을 도표로 그리면 희안하게도 거의 일치한다.
이것은 외형과 규모를 떠나서 패키지디자인이 일본경제의 보이지 않는 실질적 견인차였음을 말한다.
요즘의 서양 디자인을 보면 미국제품, 불란서 패션의 특징이 거의 사라지고 왠지 낯이 익다.
1990년대부터는 거꾸로 프랑스 패션이 일본 패션잡지를 펴놓고 모사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유력한 잡지들의 아트디렉터를 일본인들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기술과 기능이 대등해지자 경쟁에서 일본상품에 밀린 미국의 제품디자인이 일본식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기업 중 그나마 일찍부터 이 전략이 기능하고 있는 것이 삼성으로 삼성의 성장 배경에는 별도의 기업처럼 움직이는 디자인본부가 있었다.
[일본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 끔찍한 IMF환란 때 미국과 서구의 야지와 조로에 일본 총리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아시아적 가치가 이긴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1960년대 이래 한국인들은 일본을 원숭이라고 부르는 서구의 야지와 조롱에 익숙해져 있다.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짜증을 푸는 조롱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미래를 찾는 반면교사이어야 하는가?
오늘은 꼭 마음 속의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려 보자.
일본인들보다 더 원숭이를 닮더라도 놀라지 말고
하얀 횟덧박을 뒤집어 쓴 사이비 흰둥이로 그려지더라도 놀라지 말자.
그리고 주민증록증을 꺼내 보자.
파란 바탕에 별이 그려있고 빨간 가로 줄이 그려 있더라도 놀라지 말자.
그나마 15년 전에는 아시아인들이 한국 아이들이 가장 예의가 있는 나라라는 평가가 위안이었는데.
이혼률 세계 4위를 걱정한 것이 엊그제였는데...
자살률 세계 1위인 나라.
이혼률 세계 1위인 나라.
출산률 세계 꼴찌인 나라.
13년만에 아시아에서 아이들이 가장 예의가 없다고 평가된 나라.
자식과 살지않겠다는 부모들의 답이 세계 1위인 나라.
부모를 모시지 않겠다는 자식들의 답이 세계 1위인 나라.
자식이 부모를 모시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장 개인주의적이라는 프랑스의 2배인 나라
국가가 노후를 책임져 달라는 답이 가장 개인주의적이라는 프랑스의 2배인 나라.
외국인들도 서울이 전혀 한국적이지 않다고 하는 나라.
미국인 보다 더 미국적이고 싶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이런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나라의 미래가 밝을까요? 어두울까요?
누가 이런 나라가 되게 했을까요?.
나는 한국인일까요?
나는 한국인이고 싶어할까요?
나는 한국이 한국답고 한국인이 한국인답게 하는데 무엇을 했을까요?
나는 한국이 한국답고 한국인이 한국인다운 것이 미래에 좋다고 생각할까요? 나쁘다고 생각할까요?.
며칠 후면 다시 한글날이 된다.
한글은 우리자랑 문화의 자랑이라며 세종임금은 단 하루 요란한 대접을 받다가 또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한글과 세종임금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청량리 구석의 난장에 웅크려 모여
이웃한 청량리시장을 부럽게 바라 볼 것이다.
아이들은 존경할 만한 것,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 없어서 IT와 한류를 내세우고 축구를 자랑한다고 한다.
존경할 만한 것,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가치의 계량과 평가는 어차피 서있는 곳과 향한 곳에 따라 제각각일 수 밖에 없다.
역사를 말하면 사람들은 과거보다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저마다의 명분과 실리를 듣고 보면 대부분이 바로 이곳이 한국이라는 것에 대한 이율배반이다.
현재 한국에 발을 딛고 서서 한국의 공기를 숨쉬며 왜? 한국이 한국적이지 않게 하고, 한국인이 한국인답지 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인가...
이는 현재에 대한 본질적인 이율배반이다.
무튼 일본과 일본인들은 뿌리를 캘수록 섬찍한 공포와 부끄럼이 묻어나는 도자기를 아직도 사랑하고 그 도자기 막사발로 차를 마시며 그 행위의 이어짐을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그리고 내로라는 학자가 고개를 숙여가며 그 막사발 찾기에 대한 도움을 간청하기도 한다.
그런 자세가 간편주의에 익숙한 미국인들의 사고를 개조하여 15년 적자 끝에 니콘과 캐논카메라를 쓰게 했었을 듯 하다.
지천년견백년이란 말이 있다.
종이는 1000년을 가지만 바단은 100년 밖에 못 간다는 옛말이다.
그러나 1000년을 가는 종이는 한국의 닥종이 뿐이다.
불국사 석가탑은 751년 이전에 세워졌는데 그 속에서 세계 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목판본이 나왔다.
무튼 일본의 화지는 100년 전 200년 전보다 더 좋아져 최고급품 포장에 쓰이고 있지만
한국의 한지는 조선시대에 미사일을 만들고 온상 지붕으로 쓰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KIST의 기술로도 재현에 실패했다.
짬이 나는대로 지푸라기 다루기와 계란꾸러미엮기 따위를 배우고 싶다.
1960년대 일본의 수출용 패키지중에 우리의 계란꾸러미를 닮은 것이 있었는데 세계 최고급 꼬냑의 속포장을 보면 갈포로 그 느낌을 흉내낸 것이 있다.
작고 하찮아 보이지만 그것이 일본판화 폐지처럼 세상을 움직일 수도 있다.
관심을 곁들인 눈으로 보면 자랑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탈이다.
그것들이 자랑스러운 것이 되려면 황우석 박사의 일갈처럼 '한국인말고 누가 쇠젓가락으로 콩을 집을 수가 있겠는가?'라는 자존심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출처http://www.djroad.com)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그러합니다...저는 이번 여행에서 닥나무에 대하여 우리문화와 정서를 그려내는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를다시한번들여다보게하는글이군요 ^_____^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__*)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