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욱론
: 재현 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이광수(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의 제1 속성이라면 무엇일까? 재현(representation)이다. 기계로 찍지만, 사람이 찍는 주체가 되는 그래서 거울에 비치는 반영과 같은 모사가 아닌, 사람의 주관이 들어가는 재현. 그 재현의 세계에서 볼 때, 사진가가 특별한 의도 없이 찍은 사진은 없다. 그런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찍었다고 해서 그 의도가 꼭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드러났다고 해서 그것이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찍은 결과라고 말할 수도 없다. 예컨대, 무엇인가를 어떤 고요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로 재현했다고 해서 그가 그 대상을 관조하면서 찍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사진가가 관조를 통해 고요를 재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지로 나타난 결과로 사진가의 의도에 관한 팩트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진은 특정 순간에 카메라 앞에 존재한 대상을 기계로 잡아 그 대상이 존재했다는 팩트만 사실로서 보여줄 뿐, 그 의미는 철저히 해석에 따를 수밖에 없다. 역사학에서 말하는, 역사의 사실이란 팩트와 팩트 사이에 존재하는 해석일 뿐이라는 언명과 비슷하다.
많은 사진가 특히 사실을 기록하는 데 더 큰 방점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대상의 재현에 가장 우선적이고 큰 관심을 가지는 게 보통이다. 사진가는 이미 설정해놓은 의도를 가지고 눈 앞에 펼쳐진 수없이 많은 장면 가운데 가장 적확한 것을 선택하여 채집해 카메라라는 기계로 박제한다. 그때 빛과 시간을 조절하고 구도, 프레임, 톤, 농담, 색과 같은 다양한 표현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이미지로 재현한다. 재현은 실제를 단순하게 형상화하는 것이니, 재현이란 어떤 실제를 대신하는 기호가 된다. 그 기호를 집어넣어 사진가의 의도에 맞춰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표현 방식에 따라 그 의도를 강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진은 분명한 언어가 아니므로 그 해석이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사진은 보는 것이, 아닌 읽는 것이 되고, 그것은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바로 이 해석의 영역에서 그 재현으로서의 사진 이미지를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의 문제가 생기는데, 이것이 제시(presentation)의 문제다. 제시는 여러 방법에 따라 수행될 수 있으나, 대체로 책 출판이나 미술관과 같은 공간을 통해 보여주는 전시가 있다. 사진은 일차적으로 재현의 문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제시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이고, 그 제시의 방식은 사진가가 갖는 재현의 의도와 연계되어야 한다. 의도와 관계를 갖지 못하는, 하얀 벽에 그냥 재현 이미지를 거는 것은 작품의 질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다. 작품은 재현을 거쳐 제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사진은 알파벳과 비슷하다. 알파벳은 한자(漢字)와 달리 개체 하나하나가 단독으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뭔가의 의미를 제시하려면 몇 개를 조합해야 하는데, 그 순서를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런데 그 개체가 단순한 알파벳이 아니고, 어떤 의미가 분명하게 혹은 넌지시 지시된 그림이라면, 그 배열을 다르게 하는 제시 방법에 따라 그 의미가 비슷하지만 교묘하게 달라질 수 있다. 카드 네 장이 있다고 치자. 원숭이+사과+바나나+기차, 이렇게 네 장의 그림 카드를 배열해보자. 배열에 따라, 원숭이가 빨간 사과를 먹는 바나나 숲으로 기차가 지나간다는 디스토피아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사과처럼 똥구멍이 빨간 원숭이가 기차처럼 긴 바나나 숲에서 논다는 유토피아를 말할 수도 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제시를 통해 자연과 인류의 삶을 다른 해석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가 강제욱은 2000년 초 티베트를 촬영한 ‘The Lost Land: Tibet’ 전시 이후 20년 동안 주로 자연과 문명을 거대 시간의 차원에서 역사의 문제로 해석하는 일에 천착하는 중이다. 그가 궁구하는 역사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국가/민족을 단위로 하는 혹은 정치나 사회 혹은 문화의 부면을 보는 역사가 아니다. 시간의 순환 속에서 드러내는 역사다. 그 단위를 크게 해서 지구사로서의 역사라고 하든, 좀 더 작게 해서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의 역사라고 하든, 그것이 뭐든지 간에, 그가 생각하는 역사는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소산이 아니고, 사라지고, 생성되고, 기억하고, 잊고, 세워지고, 무너지고, 나타나고, 다시 사라지는 과정 안에서 나타난 순환의 궤적을 재구성하는 역사다. 윤회하는 시간 속의 메타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강제욱은 2004년 전시인 ‘The Wall’ 전 이후 인류와 자연의 메타 역사 개념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이답게 그는 ‘벽’이라는 존재가 갖는 어떤 클리셰를 시간의 변화 속에서 생성과 부침과 소멸의 의미를 담아 뛰어난 조형미로 재현해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흔한 벽 이미지가 만들어진 곳을 보면, 하얼빈, 알마티, 하노이, 앙코르와트 등 세계 각지가 현장으로 등장한다. 그 각지의 역사성은 그 이미지 속에 나타나지 않은 채 단순한 조형미에 기울어 있다가 2007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찍은 이미지를 통해 ‘전쟁’이라는 역사성을 담보하면서 비로소 문명과 폐허 사이에 작동하는 어떤 힘을 찾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어 문명과 폐허는 자연과 인간을 축으로 재난과 건설로 나타나더니, 이내 순환과 연기(緣起)의 우주적 시간으로 이어진다. ‘슬픈 열대’와 ‘The Planet’가 그 안에서 나왔다.
난, 비평가로서 그의 ‘The Planet’ 전시 서문을 썼다. 작품을 훑어보면서 자연과 문명의 거대 지구사를 말하고자 하는 사진가의 의도와 그 안에서 시(始)와 종(終)을 구별할 수 없는 힌두교-불교 윤회의 시간과 스피노자가 말하는 범신으로서 자연의 존재를 읽었다. 사진가의 의도와 그것의 재현에 비평가가 전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그 안에서 사진가가 찾고자 하는 어떤 힘은 인류에 관한 혹은 좀 더 크게 지구에 관한 혹은 좀 더 크게 보면 자연과 우주에 관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The Planet’ 서문을 통해, 재난의 현장에서 문명 이후의 세상과 만났다고 한다. 재난의 현장이나 왕성한 도시의 현장을 찍었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뼈와 살은 어디에서부터 왔고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라고 했다. 그리고 그 연원을 포함한 더 존재론적인 시간과 존재의 문제를 말하고자 하였다. 그 안에서 그가 본 세계는 인간의 손 바깥에 존재한 숲과 강에서 인간 손이 닿은 후 건설된 도시의 빌딩 숲을 지나, 바람과 물과 모래와 하늘로 재현되면서 강으로, 바다의 모습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그 거대 순환의 우주법 안에서 시간은 시원에서 흘러 문명에서 모이고, 다시 폐허를 향해 또 지나가는 끝없는 연속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러한 지구사 혹은 지구와 인류가 자연 안에서 펼치는 메타 역사가 전시를 통해 드러나지 않았다. 사진가는 재난과 이후 문명의 역사를 일직선의 시각으로 보여주었다. 분명히 순환이어야 하고, 카오스여야 하는데, 사진가는 단면으로 분류되고 정리된 코스모스를 보여주었다. 재현은 순환인데, 제시는 일직선이다. 그 차이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진은 기본적으로 재현이 우선이다. 특히 기록을 중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같은 미술관이 사진을 예술의 세계 안으로 끌어와 전시하면서 대체로 사진에서 제시는 재현보다 훨씬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사진가들은 사진집 출판과 더불어 전시를 제시 매체로 삼는 활동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진 한 장 한 장은 복사물이고, 거기에는 아우라가 존재하지 않지만, 미술관에 들어간 후로는 그 전시 하나하나가 단독의 작품이 되고 그것을 구성하는 각각의 재현 이미지에도 아우라가 생성된다. 그 사이에서 사진의 작품성을 규정하는 것은 과거의 회화 미학을 넘어 화이트큐브 세계를 관장하는 전시 미학이 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재현된 사진을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것, 그것은 전적인 예술 행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사진은 복사물로 재현된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재료로 삼아 전시하는 일에 예술성을 발휘할 공간이 창출된다. 예술로서 크로스오버의 방식으로 전시를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강제욱은 사진가지만,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한 조형 미술가이기도 하다. 그는 ‘Thinguniverse’라는 드로잉 퍼포먼스 작업을 2015년 슬로바키아 쿤스트할레 브라티스라바에서 전시하였다. 작업은 전시장에서 작가 눈에 보이는 사물들을 하얀 벽면에 까만 펜으로 드로잉하고, 마지막 날 다시 하얀 페인트로 색칠하여 지워버리는 것이다. 작가가 드로잉하는 오브제는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각양각색의 사물로, 현재 처한 위치와 정체는 모두 다르고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고, 모두 연계되어 있다. 생성과 존재가 시간 속에서 소멸하는데 모두 우주적 시간 안에서 우연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그 우연과 연기의 의미가 전시장에서 긴 실(絲)로 설치 제시된다. 실은 모든 시공간을 이어주는 인과 연이다. 바로 이 시와 종, 자연과 도시, 폐허와 건설을 재현하는 사진 이미지들을 화이트큐브 안에서 전시하면서, 전시장 어딘가에서 생성과 소멸을 보여주고, 그 사이 공간을 실로 연결하는 설치로 제시하거나 또 다른 어떤 설치나 퍼포먼스를 통해 작업 간의 경계가 흐려지고 다른 차원의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질 수 있다.
역사를 우주의 시간 속에서 바라보는 것, 근대적 합리주의적 시간관에서 벗어나 역사를 바라보는 강제욱의 메타 역사의 눈은 20년 넘게 작업하고 있는 ‘민국(民國) 100년’ 작업에 오롯이 남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그래서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재현하는 것은 사진의 시간 속에서 가능하다. 이성과 논리가 아닌 우연과 감성의 시간 속에서의 역사 재구성. 그때도 존재하고, 지금도 존재하는 백두산, 한 알의 씨앗이 나무로 꽃으로 이어지는 후손,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조형으로 남은 기념식과 유물들, 그것들을 우주적 시간 속에서 어떤 다큐멘터리로 작업할 것인지, 그리고 그 작업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지, 역사를 우주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예술로 재구성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The Lost Land/The Wall
슬픈 열대/The Pl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