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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환 이은봉 이혜원 맹문재 엮음, <2017 오늘의 좋은 시>, 푸른사상, 2017년 3월 4일.
“베란다 철쭉꽃 화분”에서 “바람에 떨어져 나간 꽃잎 한 장이 바람을 밟고 박차고 오”르는 모습을 작품의 화자는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다. 그 “꽃잎”의 운명이란 “추락은 잠시 보류되었다”고 할 정도로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화자에게는 영원히 사는 존재로 인식된다. 화자는 자신이 유한한 존재이기에 “꽃잎”이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부단하게 움직이는 순간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수직으로 상승하는 운명과 하강하는 생을 한 몸에 지닌” “꽃잎”에 동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움직이는 데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말하기도 했지만, 움직이는 존재만이 유한함을 넘어선다. “천 개의 날개를 달”듯이 온몸으로 움직일 때만이 “한 생이 다른 한 생을 물고 아득한 공중에 점점이 발자국을 찍으며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차마고도를 넘어가는 마방”이나 하늘을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그 모습이다. “저 꽃잎을 타고 우주의 중심, 초록별로 향”하는 화자의 인식도 그러하다. (d)
“비가 내리면/입을 벌려 빗방울을 받아먹는” 작품 화자의 행동은 낯설기만 하다. “혀를 길게 내밀고 부드러운 온도를 느”끼거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일까/머리를 끄덕”이는 모습 또한 그러하다. 그렇지만 “비”와 인간이 필요불가결한 관계에 있는 점을 생각하면 화자의 행동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비”와 먼 거리에 있음을, 자연과 소외되어 있음을 반증한다. “비”를 멀리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결국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빗방울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느끼고, “그런 날은 잠이 초록이어서 한 번도 깨지 않을 수 있”고, “맨발이어도 발이 아프지 않다”는 화자의 인식은 주목된다. 자연과 함께하는 화자의 마음과 행동이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거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개발과 개척의 가치를 명분으로 추구해온 인간은 자연을 지나치게 파괴했다. 그 결과 자연으로부터도 인간으로부터도 심지어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겁내지 않고/말을 걸어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도록 하기 위해서는 “비”를 가까이 해야 한다. “초록 혀”로 “빗방울을 받아먹”어야 하는 것이다. (d)
“딸들”이 “아버지”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것은 찾는 “별”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을은 아버지의 별”이라면 “페가수스는 나의 별”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계절이 왔어요 아침 이슬 속에서 영롱한 빛을 찾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당신이 꿈꾸던 여름은 이미 지나”간 대신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무지개는 우리의 것이”므로 “이젠 우리의 색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물려준 유산, 고이 간직할게요”라고 약속하는 데서 확인된다. 따라서 “우리의 계절은 우리가 책임질게요”라는 약속은 신뢰가 간다.
“아버지”가 구세대라면 “딸들”은 신세대이다. 그러므로 두 세대 사이의 감정이나 관심이나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다른 사회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나팔꽃이 다 지기 전에 빨리 문을 열어주세요”라는 “딸들”의 호소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대견하다고 칭찬하고 응원해줄 일이다. “딸들”이 꿈꾸는 정치도 역사도 더욱 절실한 것이다. (d)
“집바라기”는 페미니스트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집바라기”의 “하루는 주어진 반경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에 깊숙이 박혀 있는 말뚝에 묶인 끈을” 풀지 못하고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풀었다, 감았다” 한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반경 안에서/쳇바퀴 돌아가듯 동당동당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쩌다, 끈이 풀려 밤늦게까지” 집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에도 “한계에 부딪힌다”. “풀린 끈을 다시 감”고 마는 것이다.
남편이 집밖에서 직장과 사회활동을 하는 대신 “집바라기”가 집안에서 가사를 책임지고 있는 것은 오랜 인류 문화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맹물처럼 서성이는 식구들”을 “집바라기”는 무시하지 못한다. 남편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별”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모성을 발휘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는데, 모성을 일방적으로 거부하거나 비판할 수는 없지만, 집으로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무조건 “허리에 맨 끈을 짧게” 할 일은 아니다. 인류의 문화가 변하고 있기에 “집바라기”도 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d)
작품의 화자는 “의자”를 발견하고 나서 “앉고 싶”어 한다. 긴 “시간”을 걸어온 자신에게 휴식을 주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훈고와 아류와 계율과 학연 지연을 박차고/맨발로 걷고 또 걸어온 나의 뼈대를 쓰다듬”어주려고 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은 출신 지역이나 출신 학교 등에 의한 인연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지켜야 할 규범이나 사회적인 영향으로부터도 독립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주체적이거나 능동적이지 못해 삶은 피곤하고 자신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품의 화자는 “의자”에 앉으려고 하는데, 휴식을 취하려는 것만이 아니기에 주목된다. 화자가 인식하는 “의자”는 “그리움과 기다림을 가르”쳐주는 존재이고, “먼 데 응시하며 기원”해주는 존재이고, “의지와 충성심”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명민”한 존재이고, “의젓하고 고상한 신념”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자”와 함께하려는 것은 긴 시간을 걸어오느라 피곤한 자신에게 휴식을 주는 것은 물론 인간 가치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의자에 앉을 때마다 나는 의장”이 된다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d)
“흐린 하늘이 더부룩하여/느지막이 점심을 먹는” 작품 화자의 마음이나 몸은 개운하지도 신나거나 즐겁지도 않다. 그리하여 “포장된 김 하나 뜯어 옆에 놓고/입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릴 삼”킨다. “가만 마음이 젖어드는 점심을/물 한 모금에 쓸쓸함 한 점 얹”어 먹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소리를 듣는다. “봄기운이나 쐬자고 열어놓은 창 밖에서/마늘 싹 같은 소리 올라”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오랜만에 새소리보다 높은 아이들 소리를/옥타브 꼭대기서 듣는다”. 결국 그 “천국의 소리”로 말미암아 “더부룩한 속이 쑥 꺼지”게 되는 것이다.
작품의 화자는 자신이 꿈꾸는 “천국”이 “하늘”에 있지 않고 지상에 있다고, 지상에서의 “봄기운”이나 “마늘 싹”이나 “아이들 소리” 같은 생기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인식한다. “아이들의 소리”가 행복을 주는 것은 노자나 니체가 말했듯이 때 묻지 않은 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역동적으로 동심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무한한 갈망이 어른들의 흐린 하늘을 씻어준다. (d)
“운심”은 생몰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조선시대 밀양 지역의 기생으로서 칼춤 솜씨가 당대에 으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운심”과 글씨를 잘 쓰는 윤순(尹淳, 1680∼1741)이 서로 사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운심”은 약산의 동대에 올랐다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뛰어내릴 정도로 풍류를 즐길 줄 알았고 기개가 대단했다. 또한 힘깨나 쓰는 자들의 강요에는 춤을 추지 않았을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 그와 같은 성격을 지녔기에 그녀의 검무는 박진감이 넘쳤고 세상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렇지만 신분제와 유교적 가부장제를 토대로 형성된 조선 사회에서 “운심”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기생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검무를 잘 추어도 관리가 되어 나랏일에 참여할 수 없었고, 전문직 종사자가 될 수 없었으며, 마음에 드는 양반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룰 수 없었다. 사회의 최하층 신분으로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양반들이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물건으로 취급당했다. 그리하여 “운심”의 “심장에 칼이 스”치고 “운심의 이마에 먹구름 몰려”오고 “운심의 정원에 소나기 몰려”와 그녀의 검무는 결국 “시들”고 말 것이었다. 따라서 작품의 화자가 “운심”의 “치마폭에 매화 만발하여라”라고 노래한 것은 여성으로서의 연대이기에, 다행이다. (d)
주지하다시피 “미어캣”들이 “쪼그만 두 발로 모래를 파다가/두 발로 곧추 서서 먼 데를” 바라보는 것은 주위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천적이 접근해온다면 재빠르게 도망가거나 숨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하늘에는 독수리가, 땅속에는 코브라가 호시탐탐 먹잇감으로 그들을 노리고 있으므로 “미어캣”들의 생존은 쉽지 않다. 그리하여 “동그란 눈에/뾰족한 하관으로/아지랑이 피는 먼 데를” 바라보며 보초를 서는 것이다. “먼 데는” “미어캣”에게 불안한 공간이자 시간이다. “까마득한 점으로부터/대낮처럼 두 날개를 펼친/맹금류가 오는 곳”, 즉 “적이 오는 곳”이다.
작품의 화자도 다가오지 않은 “먼 데”를 두려워하고 걱정한다. 그렇지만 “먼 데”에 함몰되지 않고 “피처럼 붉은 고기를 찢어 먹다가/또 먼 데를” 보는 “미어캣”을 바라본다.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적응하는 모습을 거울로 삼고 있는 것이다. “미어캣”이 “먼 데”를 바라보는 것은 카뮈가 『시시포스 신화』에서 제시한 ‘반항’과 같다. 반항은 어둠에 부단하게 대면하는 것이고, 변함없이 자기 현존을 추구하는 것이고, 자신의 운명을 확인하면서 체념과 포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먼 데”까지 보는 것이다. (d)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로 시작되는 박봉우 시인의 등단작인 「휴전선」. 반공 정책이 지배하던 1950년대의 상황을 생각하면 시인의 저항 정신이 놀랍다.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과 왜곡이 분단에 의해 일어나고 있기에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박봉우” 시인은 1934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하고 대학을 다녔다.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서울 생활을 하면서 천상병, 김관식, 신동문 등 여러 문인들과 어울렸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1975년 「서울 하야식」(『창작과 비평』 여름호) 등을 발표한 뒤 전주로 내려갔다. 당시 전주시장이었던 고등학교 동창의 주선으로 전주시립도서관 촉탁사원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가정 형편이 어려워 부인이 리어카상을 하고 파출부로 일할 정도였다. 54세에 제6시집 『딸의 손을 잡고』를 간행한 뒤 57세에 지병으로 타계했다.
크리스마스 날 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시끄러운 술집에서 벌떡 일어나 빨치산 노래를 불렀다거나, “나 박봉우가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려고 한다”고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쳤다거나,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며 세 자식의 이름을 하나, 나라, 겨레라고 지었다는 등……. “70년 동안 우리는 철조망에 가시꽃으로 피어 오늘도 영원히 지지 않는 꽃으로 피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천상병 시인과 더불어 문단의 양대 기인으로 불렸던 박봉우 시인의 삶과 시세계는 슬프면서도 감동을 준다. (d)
근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은 미국의 정신과 의사 레이먼드 무디 주니어(Raymond A. Moody, JR.)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일시적인 죽음의 체험에 대해서는 아직도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관심이 늘고 있다. 주니어의 저서에 서문을 쓰기고 했고, 죽음학을 처음으로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ubler Roth, 1926~2004) 또한 근사체험을 인정한다. 로스는 근사체험은 연령이나 성별이나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고,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죽음을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을 때 삶에 적극성을 띨 수 있다. “밧줄 냄새”며 “그들만의 계산 방식/여기와 저기를 나누는 경계막”, “당하는 기분”, “억지 매듭” 등으로부터 해방되려고 하는 것이 그 모습이다. 규범과 가치 등이 항상 을보다 갑에게 유리하게 적용되고 있는 사회에서 “근사체험”으로, 다시 말해 “다른 차원으로 증발하”려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맞서는 자세이다. 그리하여 “떨어지는 링거액 방울과 나는 가늘고/가느다랗게 느끼고 있구나 함께 견디고 있구나”라고 노래하는 화자는 견고하다.(d)
경남 울주군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선사시대 인류들의 생애가 떠오른다. 그들은 자연과 함께하는 신들이 인간 세계에 영향을 준다고 믿고 풍년을 기원하며 정성을 다해 모셨다. 의식주 해결을 위한 생산력을 공동으로 산출하면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한 것이다. 이렇듯 인류는 의식주의 해결을 토대로 하면서 사랑과 안전과 자아실현 등의 욕망을 추구해온 것이다.
의식주 해결을 위한 선사시대 인류의 노동이나 현대인들의 노동은 다르지 않다. “지린내 풍기는 삶의 벽에 굵은 나무 하나 그려 넣고/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이 그러하다. 그와 같은 모습은 “기원전”의 인간이 “노오란 들판에서 짐승 한 마리 떠메고 돌아오는 일”이나 “심장 따뜻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며/붉은 웃음으로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것과 같다. “기원후의 삶을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은/기원전 내 모습이 핏빛으로 물드는 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등 떠밀려 사냥터로 나가는 가장의 뒷모습”은 슬프면서도 거룩하다. (d)
작품의 화자가 “사월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참사를 잊지 않고 있는 인식이다. “물에 젖습니까/ㄱ과 ㄴ입니까/톱니바퀴입니까 익명성입니까/경찰입니까 질문입니까” 등의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사월”에는 “씨발이라는 말이 자꾸 생각납니까”라는 욕설이나 “지랄병 걸린 애들이/7시간씩 사라지곤 합니까”라는 폄하도 불편함을 주는 것을 넘어 안일하게 타협하려는 우리를 일깨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겪은 한국인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국가가 충분히 구조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까운 목숨들을 살리지 못한 사건이기에 그러하다. 아직도 희생자들의 시신이 수습되지 않고 진상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남은 가족들이 받는 고통과 상처를 위로해주기는커녕 책임을 회피하고 거짓말하는 위정자들과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하는 언론들, 그리고 피로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가 과연 정상적인 곳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진정 “사월은/왜 검정 같은 것이 만져집니까/지울수록 빛이 됩니까/뭉클하고 끈적거립니까?” (d)
“빨간 넥타이를 매”는 작품 화자의 행동은 사회적 존재로서 적응하려는 모습이다. 화자는 “아침 회의가 있는 월요일/늦잠을 자고 출근이 늦어 허둥거”리는 것이 다반사이다. “업무보고를 해야 하는데”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경우도 많다. 심지어 “봉급날은 한참 남았”는데 “지갑에는 겨우 담뱃값만”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그대들은 어떻게 하시나?”라고 화자는 묻는다. 그러면서 “나는 빨간 넥타이를 매지”라고 노래한다. “세상이 번번이 나를 속인다 싶을 때”에는 “누구에게나 눈에 띄는 빨간 넥타이”를 맨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샐러리맨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경영 목표나 책임 업무량이나 운영 회의나 업무 보고 등은 모두 자본의 이윤을 철저히 추구하는 사용자의 입장에서 정해지는 것이지 노동자의 입장은 반영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타자가 되어 소외감을 느끼고 피곤해 ‘회사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직장 생활을 그만둘 수는 없지 않는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적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옷장 안의 많은 넥타이들 중/가장 빨간색, 너무 짙다 싶은 빨간 넥타이”를 골라 매야 하지 않겠는가. (d)
작품의 화자는 “친구가 사라졌을 때” 마음의 충격으로 인해 “표정이 바뀌는 사각의 창문”을 발견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 꽃들,/저 구름들, 저 붉은 태양/평온을 가장한 거짓에 불과”하다고도 느낀다. “창문의 감정”이 “낙하”하고, “위치를 바꾸지 않고도/창문이 제시하는 단서”가 “원근”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창문”은 “친구”의 슬픔에 함몰되지 않는다. “유리가 쓰는 창문의 성향은 관음이어서/똑같은 이야기의 이별을 재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두 줄 철로만 보여주는 창문엔/돌아선 친구의 뒤통수가 있고/유서도 남기지 않고 자살한 수요일의 저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명을 지르는 고양이와 몰래 창을 빠져나간 나무/아득한 심연처럼 번지는 바람의 흔적과/무의미하게 산란하는 달빛이 있다.” 그 결과 “친구의 하얀 발등은 추억처럼 희미해”지게 되는 것이다.
유리로 만든 “창문”은 투명해서 이 세계를 다 보여준다. 더 이상 숨기지도 가리지도 않는다. 밀실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창문”은 슬픔에 갇히거나 함몰되지 않는다. (d)
“개가 되려고 결심하면/이제 침을 흘리며/남의 집을 지키면서도/인간보다/더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화자의 자조는 그지없이 씁쓸하다. 자신이 개보다 못한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자신을 평균치 이하의 인물로, 문제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다.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하자마자/나는 인간으로 살고 있다는/착각으로 가득”한데 “이 느낌을 포기할 수 없어서/방바닥을 세 바퀴 돌고/고양이가” 되고, “이 느낌을 반복하기 위해/한 번에 여러 마리의/개가” 되는 것이 그 모습이다.
제라파(Michel Zerraffa)는 오늘날의 사회는 시장 가치에 의해 조종 받는다고, 그리하여 개인은 경제적인 인간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그리하여 타락한 사회에 대응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은 처절한 노력을 기울여야 된다고 보고 문제적 인물 혹은 악마적 주인공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위의 작품에서 “개”가 된 화자가 그 인물이다. (d)
휠체어댄서를 “익숙한 숲길에서 밀려나/등대도 없이/바다를 건너가는 모시나비”로 묘사한 비유는 감동적이다. 그 “나비”가 “위로 솟구쳤다/아래로 떨어졌다/반복하며/아슬아슬한 줄 위/설익은 남사당이 펼쳐든 부채처럼/팔라당, 팔라당당”하는 모습은 장애를 가졌지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려는 안간힘이기에 숙연해지는 것이다. 춤이라는 것은 온몸을 가락에 맞추거나 흥겨워 움직이는 동작으로 결국 자신의 삶을 즐겁게 만든다. 따라서 “고통스러운 변신을 이겨내고 얻은/생의 부표, 작은 날개”로 “굳은살이 박이도록/날고 또 나는” 휠체어댄서들의 모습은 응원 받을 만하다.
휠체어댄스는 휠체어를 이용해 장애인과 장애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펼치는 댄스 스포츠이다. 북유럽에서 활성화되어 경연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96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한국휠체어댄스스포츠연맹이 창립됨으로 인해 휠체어댄스가 널리 알려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운동으로 모던 댄스 종목(왈츠, 비엔나 왈츠, 퀵스텝, 탱고, 폭스 트로트)과 라틴 댄스 종목(차차, 룸바, 삼바, 자이브, 파소 도블레)이 있다.
발은 인체의 기관 중에서 가장 힘든 노동을 담당한다. 발은 1km를 걷는 경우 15톤의 압력을 받는다. 그래도 발은 멈추지 않고 걷는다. 사람이 태어나서 60세까지 걷는 거리는 16만km, 즉 지구를 세 바퀴 반을 돈다고 한다. 발은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래로 몰린 피를 심장을 향해 뿜어주는 제2의 심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추운 겨울일수록 믿을 건 발밖에 없다”라는 작품 화자의 토로에서 보듯이 몸의 주춧돌인 “발”은 서민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만약 “발”에 문제가 생기면 몸을 움직여야만 하는 서민들은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을 받기 때문이다. 무릎이나 허리나 어깨까지 문제가 되므로 육체노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발바닥보다도 못한 사각지대의/맨 발이 달려드는/저녁에 앉아 따뜻한 발을 고”르는 화자의 자세는 힘들더라도 살아남으려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d)
작품의 화자는 “역사”를 “호랑이처럼 사나운” 존재로 인식한다. 그동안의 “역사”가 민중들이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주도해왔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역사”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는다.
그렇지만 화자는 “역사”에 대해 회피할 수 없다고 여기고 맞서기 위해 “인왕산”까지 들어간다. “인왕산”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이다. 결국 화자는 세종대왕이 조선 왕조를 수호하려고 이름을 서산(西山)에서 바꾼 “인왕산”에 민중들이 주체가 되는 “역사”를 이루려고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호랑이처럼 사나운/역사를 잡으”려고 “인왕산에 갔”는데, 그곳에 “호랑이는 없”다. “역사는 없고/어지러운 봄볕만/힘겨운 세월만/눈 부릅뜨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호랑이처럼 사나운 역사 대신/샛노란 산수유꽃만/봄고양이만 잡다가 왔”다고 노래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맞선 화자의 기운은 늠름하다. (d)
위의 작품은 뼈를 자르고(切), 상아를 다듬고(磋), 옥을 쪼고(琢), 돌을 가는(磨) 과정을 거쳐야 보석이 되듯이 사람도 실력과 인간다움을 갖추려면 절차탁마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매미”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노래자랑”에 나간 “매미”는 제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상한 노래로 골라 악보대로/집중 또 집중해서 불렀”지만 “쪽박”을 차고 말았다. “직박구리”며 “휘파람새”, “모기”, “까마귀” 들에 비해 부족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충격과 실망이 컸다. 그렇지만 “매미”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절차탁마”는 『시경』의 위풍(衛風)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다. 위나라 무왕의 덕을 찬미하는 노래에서 “뼈와 뿔을 다루는 자는 이미 칼과 도끼로 잘라놓고 다시 줄과 대패로 갈며, 옥과 돌을 다루는 자는 이미 망치와 끌로 쪼아놓고 다시 모래와 돌로 가니 덕의 닦여지고 삼감이 전진함이 있고 그침이 없다”(如切如磋/如琢如磨)”고 말한 것이다. 공자도 『논어』의 학이(學而)에서 제자 자공과 문답하면서 군자는 가난해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아야 하지만, 적극적으로는 가난하면서도 낙도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 해야 한다며 절차탁마를 논했다. (d)
사람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회피할 수 없다. 지식과 정보를 갖추고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종교를 믿어도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생로병사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의 근본 원리인 고집멸도의 사제(四諦)에서 고통의 원인으로 집착을 들고 있지만 전적인 것은 아니다. “절에서 왔다는 혜운 스님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그 예이다. 그는 “병들지 않았다면 음성도 우렁우렁할 스님”이지만 “통증에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 “엄마……/엄마……” 하고 운다. “불경 필사를 했어도 절반은 마쳤을 법력 팔순 노승께서/아미타불 대신에 엄마, 엄마를 부”르는 것이다. 이 모습에서 병으로 인한 육신의 아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부처는 넓고 크고 엄마는 깊고 질기다고 되뇌며/젖은 베개를 베고 돌아”눕는 데서 그 아픔이 얼마나 본질적인 것인지 절감한다.
작품의 제목인 “섬망”(譫妄)은 “의식장애와 내적인 흥분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운동성 흥분을 나타내는 병적 정신 상태. 급성 외인성(外因性) 반응 증세로서 나타난다. 동시에 사고장애(思考障碍), 양해나 예측의 장애, 환각이나 착각, 부동하는 망상적인 착상이 있고, 때로는 심한 불안 등을 수반한다.” 일종의 정신 장애인 “섬망”에서도 확인되듯이 인간의 생애에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d)
작품의 화자는 잠자는 시간조차 자신의 시간이 아니라 “자본의 시간”이라고 인식한다. “깊이 잠들어 있어야 이상하지 않을 깊은 밤”인데도 마음 놓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마에 손을 얹고 억지 잠을 청”해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무덤 같은 상황이 무섭고 참담하다”고 토로한다.
화자가 이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자본이 노동을 구속하고/불법이 합법을 구속하는” 일이 당연시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에 있어야 할 팍팍한 기름밥들”이 “거리에서 광장에서 고공에서/상처받고 쇠잔해지고 목숨 끊어/노동의 눈꺼풀은/이제 스스로 뜨고 감을 힘마저 잃”고 있다. 자본주의가 탐욕의 얼굴을 그만두지 않는 한 더욱 심화되어 불평등한 결과는 적자생존의 원리로 합리화될 것이다. 그렇다고 “눈은 떠 있으나/앞길을 전혀 내다볼 수 없는 시간”이 펼쳐지고, “누군가가 이 한밤만이라도 평안해지길 바라는/절망이라 말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이 자본주의 체제가 갑자기 붕괴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할 체제도 보이지 않는다. 화자의 “적막한 시간”은 무겁기만 하다.
우연히 길에 떨어진 “양말 한 짝”을 발견한 작품의 화자는 한 가장의 지난밤을 떠올린다. 그는 만취한 상태로 “서녘 하현달 등에 지고 비틀대며 귀가하다가/담장이 옷장인 줄 알고 윗옷 걸쳐두고/양말까지 고이 벗어 머리맡에 모셔두고” 잠들었다. “혼잣말로 시부렁대며/은하수 건너는 꿈 헤매”기도 했다. 그러다가 “오한 드는 이슬에” 깨어나 보니 자신의 집이 아니라 길바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혼비백산 달아”난 것이다. 그 바람에 “양말 한 짝”을 빠트리고 말았다.
화자의 이와 같은 상상력이 사실이라면 “만취한 사내”는 두 번이나 귀가한 셈이다. 한 번은 길가로, 다른 한 번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사내”가 그렇게도 집에 들어가고자 한 것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취했더라도 집안에 들어가 식구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d)
작품의 화자는 “붉은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마치 육상이나 수영 등의 단거리 경기에 출전하는 “스프린터”로 비유하고 있다. “두 손은 땅에 공손히 놓여 있어 지구의 중심핵에 거주하는 뜨거운 신에게 기도하는 듯하고, 두 다리는 적자생존을 계명으로 삼던 원시 짐승의 빛나는 근육을 탐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본 것이다.
화자는 인간의 역사가 “아킬레우스는 거북의 발걸음을 영원히 추월하지 못한다는 ‘제논의 역설’이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미끄러져 수천 년을 횡단해”왔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오래된 역설을 누르고 논리의 허구를 뚫”으려고 한다. “예의바름으로 가장한 권력이 쌓아놓은 가짜 세상의 옹벽을 파쇄하”려는 것이다. 마침내 “푸른 신호등이 레인의 경계를 밝히”자 화자는 달려나간다. “과연 결승점을 뛰어넘어 무한의 시간과 거리를 밀쳐낼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이 들기도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자신을 역사적 운명에 던진 것이다. (d)
“민들레”의 열매는 바람이 불면 번식을 위해 날아가는데 작품의 화자는 그 모습을 “한 줄기 폭발음 뒤에 소리가 사라지고/정적 속으로 홀씨가 발사했다”고 인식한다. 또한 “민들레는 바람보다 빠르게 날아올라/혜성과 같은 속도로 돌”게 된다고, 그리하여 “민들레”의 “솟아오름에는/바람의 관심이 폭풍의 이름으로 관여”했다고 상상한다. 실제로 “민들레”는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착륙한다.
“빛의 속도로 도착한” “민들레”는 지표면에 “닫는 순간 볼트를 박는 뿌리들”의 모습을 띤다. 마치 “우주까지 와서 취업을” 하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수습 기간도 없이 태양을 따라잡는 일을 시작한다/부서를 탐색하고 상사의 성향을 파악하며 뿌리내릴 궁리를” 하는 것이다. “민들레”는 생명력이 강해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또 다른 “민들레”를 만들어낸다. (d)
1958년 국립의료원 구내식당에서 처음 선보였고, 업계에서는 1978년 세종호텔 ‘은하수’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뷔페”는 어느덧 일반화되었다.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손님들이 골라 먹는 방식이므로 업계는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다. “점심 특선, 저녁 특선, 특선 전략”으로 손님 유치에 나서고 있는 것이 그 모습이다. 그렇지만 “행사 후 버려질 그것들을 눈부시게 전시”할 정도로 낭비가 심하고,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고 빈 그릇을 세척하는 과정에는 손들이 필요하다. 경영주는 이윤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종업원들의 노동력을 최대한 요구하는 것이다.
작품의 화자가 “처음엔 둥근 접시가 달처럼 생겨 달을 씻는 기분이”어서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신나게 노래도 불렀”고, “탑처럼 쌓인 커피잔이 우물 같아서/왕자님, 왕자님 어디 계세요?” 하며 “멋진 남자가 불쑥 튀어나와 두 손을 잡아줄 거라 믿고/환히 보이는 바닥을 뱅글뱅글 닦”기도 했다. 또한 “달인이나 되는 것처럼/포크와 나이프와 스푼과 젓가락을 한 바구니 담아/그것들을 분류하여 빛을”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달을 죽도록 닦아 달인이 되면 우물에서 왕자가 불쑥 튀어나오고/피자와 연어와 스테이크와 보랏빛 와인을 음미하며 살 줄 알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를 지배하는 저 위대하신 지배인은/하늘에다 달을 생산하는 기계만 박아 놓았는지/수천 장의 달을 받아낸 달인에게/은수저 한 쌍 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도대체 이곳은 어디인가”라고 묻는다. 화려한 “뷔페의 뒤편”에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것이다. (d)
작품의 화자는 “벚꽃”과 어울리다가 “벚꽃 아래에/스스로 목숨을 내려놓은 친구”를 떠올린다. 그만큼 친구의 “자살”에 충격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벚꽃들이 내민 수만 손을 잡고/벚꽃들의 눈빛에 끌려/벚꽃 세상을 떠돌며/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아/해마다 벚꽃과 바람나고 싶어”라고 노래하다가 멈춘다. 그 대신 “벚꽃이 눈부신 이 봄날에/벚꽃을 등지고/어디를 가고 있느냐/친구여” 하며 슬퍼하는 것이다.
자살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극단적인 행위로 사회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렇지만 질병이나 가난, 소외, 실업, 소외, 전망 부재 등을 해결해보려는 행동으로 간주하고 당사자를 비난만 하기보다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좀 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자살 방지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자살율이 가장 높다. 자살율을 낮추기 위해서는 “만발한 벚꽃이 네겐 고통스런/눈물이었느냐 종기였느냐” 하듯이 자살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d)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우리의 속담은 공부를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책을 훔친 경우 관용을 베풀어주려고 한 것으로 유추된다.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에게 책은 귀한 것이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은 책이 인간을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든 것으로도 생각된다. 책을 훔쳐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용납할 수 없다. 설령 책을 못 살 정도로 가난하다고 해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책을 읽다 보면 가르침을 받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올바른 선택을 하리라고 믿은 것이다.
위의 작품의 “감시하는 분” 역시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책을 훔쳐간 사람이 언젠가는 책값을 가져올 정도로 바르게 살아가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끌려간 방에서 호주머니에 든 것들을 다 털어 보니/나오는 것이 토큰 달랑 두 개라” “책은 가져가시고 다음에 오시거든 책값을 내시오.”라고 말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보름쯤 지나서 나는 돈을 가지고” 갔다. 책이 사람을 만든 것이다. (d)
작품의 화자와 가까운 사이에 있는 “너는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할 때/언제나 요일부터 묻는다.” “무슨 요일에 만날까?” 하는 것이다. “너”에게는 “날짜보다 요일이 생의 중심으로 먼저” 들어온다. 그 이유는 “날짜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한 엉겅퀴 그물망”인데 비해 “요일”은 “태양과 바다와 대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작품의 화자는 “목성과 토성을 불러본 적이 있기에” “눈부신 요일로 행성의 시간을 대답해준다.” 또한 “너는 일곱 개의 행성을 공중에 걸어놓고/당신은 무엇에 흔들립니까? 질문한 적이 있”는데, 화자는 “날짜보다 더 오래 살고 있는 요일에 대해서/불덩어리가 되어 우주를 떠도는 별에 대해서/아직 발음하지 않은 요일에 더 흔들린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화요일이라고 먼저 쓰고/7월 26일이라고 뒤에 쓴” 것이다.
“날짜”는 일자(日字)로써 역법계에서 표현하는 날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날짜”는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에 의한 것이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율리우스력을 개정해서 시행했는데, 연월일로 나누었다. 이에 비해 “요일”은 한 주(週)의 각 날짜별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에 요일의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요일”은 “날짜”에 비해 좀 더 천체를 따른다. 인간이 우주의 한 구성원이라는 인식을 좀 더 갖게 하는 것이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