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니블 아뢰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현대어 풀이]
동짓달 긴긴 밤의 한가운데를 베어내어,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정든 임이 오시는 날 밤에 굽이굽이 펴리라.
임이 없어 더욱 길게 느껴지는 동짓달의 지루한 밤을 잘라내겠다는 생각이 기발하다. 잘라낸 시간을 넣어두는 ‘춘풍 이불’은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로, 추운 동짓달의 기나긴 밤과 대비된다. 봄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 두었던 시간을 임이 오신 날 밤에 굽이굽이 펼치겠다는 발상 또한 절묘하다. 여기에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낸 ‘서리서리 너헛다가’, ‘구뷔구뷔 펴리라’와 같은 표현이 돋보인다. 이 시는 추상적인 시간을 구체적인 사물로 형상화하여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간절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을 두고 4천여 수에 달하는 고시조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영국인들은 인도를 다 주어도 셰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했지만, 금아 피천득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14행으로 이루어진 유럽의 정형시) 수백 편을 가져와도 황진이의 이 시조 한 편에 견줄 수 없다고 했다.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이 한양에서 명기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친구들에게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쉬이 헤어질 수 있으며 조금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송도에 내려온 소세양이 먼저 황진이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단 한 글자만 적혀 있었다. ‘榴’(석류나무 류)
석류나무 류(석유나무 유)를 한자로 쓰면 碩儒那無遊가 된다. 각각의 한자는 순서대로 ‘클 석(碩), 선비 유(儒), 어찌 나(那), 없을 무(無), 놀 유(遊)’에 해당한다. 직역하면, ‘큰선비가 왔으니 어찌 놀음이 없겠는가?’라는 뜻이다. 즉 내가 왔으니 어서 와서 나랑 놀자며 꾀는 말이다. 이 편지를 본 황진이도 딱 한 글자로 답장을 써서 보냈다. ‘漁’(고기 잡을 어)
고기 잡을 어(고기자불 어)를 한자로 쓰면 ‘高妓自不語’가 된다. 각각의 한자는 ‘높을 고(高), 기생 기(妓), 스스로 자(自), 아니 불(不), 말씀 어(語)’에 해당한다. 직역하면, ‘높은 기생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곧 높은 기생인 나는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먼저 유혹하지 않으니까 네가 직접 와서 말하라고 멋지게 응수한 것이다.
재치 있게 편지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꿈같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너무나 짧기만 했던 30일이 지나고 둘이 헤어지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를 지어주자 소세양이 감동하여 며칠을 더 머물렀다. 소세양이 서울로 떠난 뒤 황진이는 자신도 미처 몰랐던 마음을 시조 한 수에 담아낸다.
어져 내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하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뇌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현대어 풀이]
아아, 내가 한 일이야. 그리워할 줄을 몰랐던가.
있으라고 말했더라면 갔으랴마는 제가 구태여
보내고 나서 그리워하는 내 마음 나도 모르겠구나.
시적 화자는 초장에서 임을 떠나보낸 뒤에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중장의 ‘제가 구태여’는 앞뒤에 모두 걸리는 말로서, 그때마다 주체가 달라진다. 중장의 내용과 연결하면 ‘임이 구태여 갔겠느냐마는’의 뜻이 된다. 종장과 연결하면 ‘내가 구태여 보내 놓고’로 해석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석하든 화자의 자존심이 느껴진다. 종장에서는 보내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여인의 자존심과 연모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황진이의 작품은 오늘날까지 시조 여섯 수와 한시 네 수가 전한다. 계간지 《나래시조》가 2006년에 현대 시조시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고시조를 설문 조사했는데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을’이 1위에 뽑혔다. 황진이의 ‘어져 내일이야’(6위), ‘청산리 벽계수야’(8위)도 10위 안에 들었다. 특히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은 우리말의 묘미를 자아내는 솜씨가 더없이 매혹적인 작품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흠뻑 사랑받고 있다(고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