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독서의 시대다. 종이책이 자폐증을 앓고 있다. 현실이 이런데 하물며 시집이 어찌 읽히는 시대이겠는가? 고민하다가 온라인 서점을 방황하던 중 눈에 번쩍 뜨이는 책이 있어 무조건 주문을 냈다. 『페이퍼 엘레지』, 애도와 비탄과 애처로움. 시의 한 종류인 엘레지의 특징들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사자를 위한 송가(送歌)나 애가(哀歌)로 쓰인다. 종이가 죽었단 말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종이와 같은 불멸의 물체를 두고 도대체 죽음 이후를 슬퍼할 수 있단 말인가. 『페이퍼 엘레지』에서 영국의 작가 이언 샌섬은 경쾌하고 유머로 가득하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사망 통지를 받아 버린 종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기록해 나간다. 종이가 죽고 인간이 살아남았다면(정녕 그럴 수 있기만 하다면), 어둡고 우울한 제목이 붙은 이 책은 아마도 ‘살아남은 자의 변명’에 해당할 것이다.
2.
그러나 기이하게도 이 책 어디에서도 종이의 죽음은 없다. 실종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생생하게, 모든 곳에서, 모든 순간에 종이가 나타난다. 종이는 모든 사물에, 모든 사유에,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다. 연리지(連理枝)처럼 일단 종이는 어떤 것과 결합하고 나면 그 자체로 변해 버린다. 아니, 어떤 것이 종이로 변해서 분리불가능하게 된다. 지도, 책, 돈, 광고, 건축, 예술, 장난감, 게임, 정치, 영화, 패션 등 어디에서도, 심지어 전자적 화면 내부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종이를 전혀 물리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은 비가(悲歌)가 아니라 송가(頌歌)의 형식으로, 침묵과 절제의 언어가 아니라 수다와 과잉의 언어로 쓰였다. ‘종이 예찬’, 사실 이 책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야 마땅하다. 적어도 오늘을 걷는 시인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