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結社의 추억'
문인 이인로의 숙부 요일 스님
고려 불교 개혁운동으로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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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룡사 전경. 고려때 불교계의 반성운동의 일환으로 신앙결사가 전개된 곳으로 유명하다. | |
대구에서 26번 국도나 88고속도로를 따라 40여분간 남쪽으로 내려오면 삼국에서 소외된 가야, 그 가야사회를 주도했던 대가야의 후손이 살고있는 고령을 만난다. 고령읍내에 들어서면 멀리 주산의 산등성이 위로 낙타등과 같이 솟아있는 지산리고분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지나 26번 국도를 따라 쌍림면 방향으로 3㎞정도 달리다 미숭산 방향(오른쪽)으로 6㎞ 정도 올라가면 쌍림면 용리 미숭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반룡사를 찾을 수 있다. 이 사찰은 대가야의 후손들이 신령스러운 용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곳에 세웠다고 해서 반룡사(盤龍寺)라 이름지어진 절이다.
신라 애장왕 3년(802) 해인사와 함께 창건된 이 사찰은 고려중기 보조국사가 중창하였고 공민왕 때에 나옹선사가 중건했다. 조선초기에는 교종에 속한 사찰이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진된 것을 사명대사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 절과 관련된 고승의 면면만 보더라도 과거 이 사찰이 얼마나 이름나 있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화재로 인해 대웅전을 비롯한 6당과 요사가 전소되었으나 영조 때에 현감 윤심협이 다시 중건, 1930년 이봉조가 다시 중수했다. 최근 법당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반룡사는 고려후기에는 대사찰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고려 불교계는 무인정권이 성립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기존의 불교계에 대한 반성운동으로 신앙결사가 다양하게 전개된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보조(普照)국사 지눌(知訥)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원묘(圓妙)국사 요세(了世)의 백련결사(白蓮結社)라 할 수 있다.
고령지역에서도 반룡사를 중심으로 화엄종 계통의 신앙결사가 전개되었다. 흥왕사의 승려이자 이인로(李仁老)의 대숙(大叔)인 승통 요일(寥一)이 명종 27년(1197) 고령으로 오면서 반룡사에서 신앙결사를 개창하였다. 요일이 반룡사의 신앙결사를 개창한 목적은 '불교를 공부하는 자들이 시류에 빠져 자포자기 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이를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불교 개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충렬왕 즉위년(1274)에 고려와 원나라의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당시 원나라 세조가 사원의 침탈을 방지하라는 방문(榜文)을 영남지역의 중심사찰이었던 반룡사에 붙였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내용을 보면 '원나라 세조 때의 방문이 있는데…(중략) 만일 절 안을 짓밟고 시끄럽게 굴어 불안하게 하면 소재 관청에서 잡아들여서 법에 의하여 처단할 것을 방을 붙여 보게 하라. 이 방을 반룡사에 붙여서 여러사람에게 보여 알게 하라'고 기록돼 있다.
고려 후기 반룡사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이 외에 이인로, 박효수, 유방선 등 명현들이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반룡사로 들어서면 절 입구에 부도탑 4기가 가지런히 서서 불자를 맞이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즉 둥근 부도탑신을 받치는 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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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룡사 부도. 부도의 모양이 각기 다른 것이 특이하다. | | |
모두 엎드린 연꽃과 위로 펴진 연꽃을 형상화한 복련석과 앙련석으로 마련돼 있고 지붕돌은 팔각형, 팔작지붕 모양, 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 반룡사의 다층석탑은 경북도 유형문화재 117호이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석탑과 달리 납작한 옥개석(지붕돌)만 층층이 포개어 놓은 모양이다. 재질도 보통의 석탑처럼 화강암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흑색의 점판암을 사용했다. 이런 모양의 탑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고려에 이르기까지 유행했다. 탑은 모두 11층으로 되어 있으며 이를 받치는 앙련석과 복련석이 2매 있고 그 아래의 기단은 화강석을 사용했다. 반룡사의 다층석탑은 가까운 해인사 원당암에 있는 다층석탑(보물 제518호)과 형태가 흡사하다. 인근의 동종(경북도 유형문화재 288호) 또한 눈길을 끈다. 반룡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전체 높이 50㎝ 정도 되는 종이다. 특히 이 종의 몸통에는 70여자의 한자가 양각돼 있다. 이 명문을 통해 영조 29년(1753) 3월에 고령 반룡사에서 직접 제작된 무게 100근의 중종이라는 사실과 이 종을 만드는데 참여한 희선 등의 승려와 김만세와 같은 신도 등의 이름과 역할 등이 함께 밝혀지기도 했다.
미숭산은?
반룡사 뒤편에 우뚝 솟은 미숭산은 휴일 가족단위 산행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 정상부에는 대가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적들이 있다. 이 산에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버리지 않았던 이미숭(李美崇) 장군에 대한 전설이 전해진다. 장군은 조선이 건국되자 상원산(上元山)에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여 후일을 도모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져 순절을 하자 휘하 장군들도 잇따라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 후 세인들이 그의 충의를 추모하기 위해 상원산을 미숭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미숭산성에는 갑옷과 칼을 묻었다는 갑검릉(甲劒陵), 말을 달리던 주마대(走馬臺), 개성(開城)을 멀리 바라보았다는 망향대(望鄕臺), 병사들의 조련장인 연병장(練兵場), 순사암(殉死巖) 등 유서가 서린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대가야의 철기문화와 관련된 제철유적이 반룡사 인근 미숭산 일대를 중심으로 경남 합천군 야로면과 경북 고령군 쌍림면 용리 등의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용리 지역의 제철유적은 반룡사의 서쪽 미숭산의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 지표조사를 통해 철광석을 녹이기 위한 제련로의 노벽(爐壁)편과 철생산 과정에서 생성되는 불순물인 슬러지(철재:鐵滓), 철의 원료가 되는 철광석 등이 채집됐다.
노벽편 가운데는 국내 고대 철생산 유적의 송풍관과 달리 일본의 전통 방법에 보이는 소형의 송풍구(送風口)를 사용하였음이 주목을 받고 있다. 철의 왕국 대가야의 각종 철제품들이 이곳 반룡사가 있는 용리에서 만들어져 가까이는 삼국 및 가야 여러나라와 멀리는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되기도 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출처 : 영남일보
위 치 : 경북 고령군 쌍림면 용리 187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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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 고령군 www.goryeong.gyeongbuk.kr
문 의 : 반룡사 종무소 054-954-0054
개 요 :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해인사와 같은 시기에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고려 중기 보조국사
가 중건하고 고려말 나옹선사가 다시 중건하였다. 반룡사에는 반룡사 다층석탑(유형 문화재
제117호)과 반룡사 동종(유형문화재 제288호)이 소장되어 있다. 반룡사 다층석탑은 고려시
대의 것으로 화강암 기단위에 1층 탑신이 남아있고 그 위에 점판암으로 만든 옥개석이 다층
으로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석가여래의 사리탑이라 하며 일명 수마노석탑이라고도 한다.
2단의 화강암 지대석위에 세워진 높이2.4m의 단아한 소형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며, 해
인사 원당암 다층석탑과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이 이 유형에 속한다.
반룡사 동종은 1753년에 제작된 것으로 높이는 50㎝이고 무게는 100근이다. 이 종은 중종이
란 명문을 지니고 있어 본래부터 반룡사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대 부분에 육자진
언의 법문과 함께 종신에는 명문을 지니고 있다. 조선후기의 동종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
다.
교통안내 : 1) 88올림픽 고속국도- 고령 나들목-월막교 방향 지방도-용리 반룡동-반룡사
2) 고령읍내 버스편 이용
정보제공자 : 717-800 경북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190번지 고령군청 문화체육과 관광홍보담당자 |
출처 : 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