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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관 노상추, 그가 남긴 68년간 기록 |
▣방송 : 2010. 7. 10 (토) 20:0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김진희 아나운서 ▣연출 : 김장환 PD ▣글 : 김세연 작가 ------------------------------------------------------------------------
조선시대 한 양반의 일생이 담긴 68년간의 일기가 공개됐다
일기의 주인공은 조선 후기 정조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었던 무관 노상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 무관의 삶을 노상추 일기를 통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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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을 기록한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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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 중인 노상추 일기 |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중인 노상추 일기. 그가 열일곱되던 해부터 여든넷의 나이로 죽기 직전까지 쓴 그 속에는 노상추 자신과 가족들의 결혼과 출사, 관직업무와 농사 현황 등 집 안팎의 소소한 일상들이 담겨있다. 개인의 소회 보다는 가문의 역사를 남긴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최대한 솔직하게 기록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느껴지는데, 그 행간에서 한 시대를 살았던 남자의 고뇌도 충분히 엿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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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반 노상추는 어떻게 살았을까? |
▶시대가 그에게 무인이 되라 했다. “옛적의 이름난 유학자들은 무부를 비류라 칭하였는데, 이는 염치가 없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며 주색만 좋아하고...” 무인에 대해 노상추 스스로가 평가한 일기 내용이다. 조선시대에 무과에 대한 양반가들의 경시는 노골적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노상추는 문과가 아닌 무과를 선택했고 십수년 공을 들여 급제했다. 그는 왜 무과를 선택해야 했을까? 그가 낙동강 지역에 세거한 양반이었다는 사실에서 두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노론에 밀려 세력을 잃었던 영남의 남인이었고, 전통적인 한전지대로 가문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던 것. 이런 상황에서 무인의 길을 걸어야 했던 노상추는 어떤 심정으로 징비록을 읽고 활을 쏘았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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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 시험 재현 |
▶무인 정조와 맺은 인연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을 중용하고, 서얼허통과 같은 개혁을 단행했던 정조는 노상추에게 있어서도 특별한 의미였다. 과거에 급제했다고 해서 모두다 관직을 받을 수 없었던 당시, 그래서 인사청탁도 횡행했는데, 남인이기에 관직을 얻기도 쉽지 않고 그나마다 말단직을 전전했던 노상추가 어느 날 정조의 눈에 들어 고속승진을 하게 된 것. 남인 영수였던 영의정 채제공까지도 노상추를 특별히 생각하게 될 만큼 정조는 그의 관직생활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는데... 왜 정조는 노상추를 발탁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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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혼의 아픔, 끝내 해로의 꿈을 이루지 못하다. |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아내가 요절하고, 남겨진 자식 또한 죽으니 하늘의 뜻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 노상추는 세 번 결혼한다. 17세에 초혼, 23세, 29세에 각각 재혼, 삼혼 했다. 노상추 뿐만 아니라 노상추의 아버지나 동생도 두 번 이상 결혼을 했는데... 당시 결혼한 여성이 일찍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이유와 사별 후 남자들이 서둘러 재혼을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노상추는 여러 자식들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심지어 족보에도 오르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자식들도 있었는데... 모든 것을 하늘의 뜻이라 여기면서도 그 아픔이 너무 버거워 괴로워하는 노상추의 속내가 일기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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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조선, 갈등하는 양반 노상추 |
적서를 철저하게 따졌다.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천주교에 대해 진심으로 우려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고, 개인 보다는 가문을 걱정하며, 계급과 사회가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노상추! 그는 양반가에서 태어나 철저하게 양반으로 교육받고 자라서 그 가치관을 진리로 여기며 살았던 조선의 양반이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위험했고 걱정스러웠지만 시대가 변화하고 있음은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그의 사후 100년도 안 돼 사라져버린 조선의 마지막 시대에 그가 살았던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