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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세계/한국) 일반역사 스크랩 윌리엄 린튼 선교사(William Alderman Linton1891-1960)
KESLL 추천 0 조회 132 15.11.17 21:08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윌리엄 린튼 선교사(William Alderman Linton1891-1960)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1891-1960)은 1891년 2월 8일 미국 조지아 주 토마스 빌에서 아버지 텔 린튼과 어머니 폰더 앨더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6월, 조지아 공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당시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제너럴 일렉트릭(GE) 회사 입사를 마다하고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 교육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윌리엄 린튼은 1912년 8월 23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항하여 9월 20일 목포항에 도착, 입국했다. 그의 첫 선교지는 목포였다. 곧 군산으로 가서 영명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17년 영명 학교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때에는 군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갔다. 린튼은 일본의 부당한 압제에 분노했고, 한국의 억울한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해에 미국 애틀란타에서 열린 남부 지역 평신도 대회에서 자신이 목격한 3.1 운동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일본은 10년 동안 조직적인 방법으로 5천 년 동안 존재해온 한국의 정체성과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려고 한다. 3.1 운동은 비폭력 항거 시위였다.…… 일본은 평화 행진하는 사람들을 기병대의 말발굽으로 짓밟았고, 총검으로 찔렀다.한국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비폭력 시위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세계를 향해 자유 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다.’또한 애틀란타 신문에 3.1 만세 운동에 대한 기사를 송고하면서 독립 국가를 염원하는 한국인들의 마음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주변 국가들의 도움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윌리엄 린튼은 주로 전주, 이리, 군산 등지에서 교육 선교를 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는 4, 5년에 한 번씩 주어지는 안식년 기간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교육학을 공부했다 (1919~1921). 1922년 유진 벨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입국한 그는 유진 벨 선교사의 딸인 샬롯 벨(Miss Charlotte Bell)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샬롯 벨은 아그네스 스콧 대학을 졸업했고, 당시 23살이었다. 윌리엄 린튼과 샬롯 벨의 결혼은 린튼가(家)의 사람들이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사 참배 강요를 받았다. 신사 참배가 가장 먼저 강요된 곳은 교육계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신사참배 강요의 시작은 1935년 평양의 기독교 학교에 정기적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할 때부터였다. 1935년 11월 평양 숭실 전문학교 교장 맥큔(G. S. McCune) 박사와 숭의여고 교장 수누크(V. L. Snook) 여사는 학교의 대표자로서 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신앙 양심을 내걸고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때 평안남도 지사는 60일간의 여유를 주면서 그 때 회답하라 했다. 만일 그때 참배를 거절하면 학교를 폐쇄하고 강제 추방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맥큔은 물러나와 평양 시내 27개의 교회 목사들과 이 문제를 놓고 협의했다. 협의 결과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전원이 신사 참배를 반대했다. 선교사들은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신사(神社)의 제식(祭式)에 있어서 종교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신사의 신들을 경배하고 있음이 확실하므로 신앙 양심상 도저히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한 숭실 학교 맥큔 교장의 회답서(1935년 12월)> 평안남도 지사는 맥큔과 스누크를 면직시키고 강제 출국시킨 다음 대대적인 신사 참배 강요에 나섰다. 당시 신흥학교 교장 윌리엄 린튼은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1937년 신흥 학교를 자진 폐쇄시켰다. 이때 호남지역에서는 전주 기전 여학교,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 여학교, 목포 영흥학교, 정명 여학교가 문을 닫았고, 순천 매산 학교, 매산 여학교, 군산 영명학교 등이 문을 닫았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은 선교사들에게 출국 명령을 내렸다. 1940년 10월 주경(駐京) 미국 영사 마쉬(G. Marsh)는 선교사의 철수를 명령했다. 윌리엄 린튼은 가족을 이끌고 1940년 11월 14일 출국했다. 대전 대학 설립하고 한국이 국권을 회복하고 난 후 1946년에 윌리엄 린튼은 다시 한국으로 와서 1946년 11월 신흥학교 교장직에 복직했다. 그는 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48년에 대학 설립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1950년 전쟁으로 설립이 지연되었다가, 1954년부터 2년 가까운 준비 기간을 거쳐 1956년 대전에 대전 대학을 설립하였고, 대전 대학은 후에 한남 대학교로 명칭이 바뀐다. 린튼은 1957년 벨 하우벤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윌리엄 린튼은 학교 부지를 물색하러 다닐 때부터 이미 자신이 전립선 암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학 개교 후 병이 깊어져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고 완치되기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남아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난 후에 병상에 누운 채 미국으로 건너가 1960년 그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학교 일에 매달리고 주일에는 시골 교회에 나가 봉사하였다고 한다. 그는 학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병상에 누운 채 미국으로 건너가 1960년 8월 13일 테네시 주 녹슨빌의 큰 아들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윌리엄 린튼은 21세에 입국하여 48년 동안에 500 교회를 세웠다. 인돈(Linton) 학술원은 선교사이며 한남대 교수로 재직한 Dr. John N. Somerville - 한국 명, 서의필 박사는 1994년 9월 한남대학교 설립자 인돈(W.A. Linton) 박사의 숭고한 뜻과 그의 생애를 기리고 한남대학의 창학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기관으로 인돈 학술원을 설립하고 서의필 선교사 본인이 사택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인돈 학술원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인돈 학술원에서는 <한남 인돈 문화상>을 제정하여 기독교 정신에 따라 선교, 교육, 사회 봉사에 공로를 세운 숨은 일꾼을 발굴 선정하여 그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그들의 생애를 연구, 집필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곳에선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없는 특화된 기독교 자료인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관련 선교 역사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인돈 학술원은 한남 대학교 캠퍼스 경상 대학 건물 뒤에 있다. 이곳 건물은 린튼 선교사의 설계로 지어졌는데, 건평은 약 68평이며 한옥의 전통 가옥처럼 ㄷ자 형으로 지붕에 기와를 입혔다. 건물의 전체적 구조를 보면 한옥과 양옥의 복합형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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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11.17 21:26

    첫댓글 정확한 한국의 장로교회사는 모르겠습니다. 단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장로교는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가 있었는데 그때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부류의 선교사는 캐나다 장로교,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단이었던것 같습니다.

  • 15.11.18 15:04

    윌리암 린튼가에 대해서 잘 정리된 글을 보게되니 참으로 유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윌리암 린튼의 손자인 존 린튼과는 제가 개인적으로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의 형 스테판 린튼이 대북 결핵 퇴치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한국에 많은 유익을 끼친 선교사들중의 하나인 가문일 것입니다. 유진벨 가문은 한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여러 불행을 겪음으로서 선교사의 일이 일상의 여러 사고 위험을 안고 있음을 가르쳐주었다고 생각됩니다. 신사참배에 항거하고 일제의 잔학상을 미국에 알렸지만, 미국의 정치까지는 영향을 미칠수 없었던 현실을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글에서도 과연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 15.11.18 15:07

    불리울만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한남대학교가 그만큼 기독교 정신에 바르게 서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신흥학교, 기전학교는 저에게 매우 친숙한 학교들입니다. 오늘날에도 General Electric 에 입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 회사와 거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만, 그곳에 들어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흑암같은 조선 땅에 와서 선교사로 자기 생애를 바친 윌리엄 린튼에게 하나님은 후히 보상하시리라 믿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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