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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선 전역의 마지막에 또 한 명의 국민당 애국 장령이 등장한다. 그는 귀순하지도 않고 투항하지도 않았다. 해방군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포로로 잡혔는데도 애국 민주인사로 기록되었으며 사망한 뒤에는 베이징의 빠바오산(八寶山) 혁명열사 능원에 묻혀 있다. 그 사람은 장제스의 다섯 왕패군 가운데 한 부대를 이끌던 국군 중장 랴오야오샹이다.
랴오야오샹은 황푸 군관학교 6기생이다. 그는 1930년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프랑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E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Cyr)에서 수학했다. 그는 기계화 기병 병과에서 1등으로 졸업한 뒤 귀국했다. 성적이 우수한 만큼 그의 출세도 빨랐다. 중일전쟁이 폭발한 뒤 랴오는 장제스에게 ‘난징 전역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군을 개선해야 합니다.’는 글을 올려서 눈에 들게 되었다. 장제스는 서른 한 살의 랴오야오샹을 소장으로 승진시켜 제5군 참모장으로 삼았다.
랴오야오샹 장제스 비적 동북 부총사령 랴오야오샹으로 적혀 있다
베이징 빠바오산 혁명열사 능원
랴오야오샹은 국군 지휘관들 가운데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노름도 하지 않는 드문 사람이었다. 여색을 멀리하여 축첩 같은 일은 더욱 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그를 가리켜 “후난의 군인 중 자질이나 인품이 으뜸”(1)이라고 평한 일도 있었다. 군벌부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부정축재, 세력증식, 축첩이나 아편 흡연 등을 일삼는 국민당 군에서 매우 드문 유형의 젊은 장교여서 장제스가 더 총애하였는지도 모른다.
중일전쟁에서 랴오야오샹은 여러 번 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구이린 남부 지역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쿤룬관 대첩’ 때 일본군의 퇴로를 끊어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그 공로로 22사단장이 되었으며 그후 인도와 버마 등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45년 2차 대전에 끝나자 그는 부대를 항공편으로 인솔, 베이징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1946년 1월, 린비아오의 동북 민주연군이 동북을 선점하자 그는 신6군을 인솔하여 배편으로 천황다오에 도착했다. 두위밍 휘하의 국군이 기계화 부대를 앞세우고 만주를 석권해가던 시기였다. 랴오야오샹은 두위밍이 기대한 대로 요서 지방을 휩쓸며 동북 민주연군을 밀어 내었다.
랴오야오샹 휘하의 신6군은 장제스의 5대 주력부대, 이른바 ‘왕패부대’(2)중 하나였다. 신6군 산하 22사단은 랴오야오샹과 함께 중일전쟁을 치른 역전의 부대로 경험과 충분한 병력, 좋은 장비를 함께 갖추고 있었다. 랴오야오샹은 이 부대를 이끌고 요서 지방의 철도 교통선을 확보하여 선양, 잉커우 등 요충지 점령에 크게 기여했으며 창춘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는 국군이 기세를 올리던 내전 초기 정동궈, 쑨리런 등과 함께 두위밍의 선봉장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요서 지역을 석권할 때 랴오야오샹의 부대는 랴오허(遼河) 북쪽에서 동북 민주연군과 10대 1의 열세 병력으로 삼일 밤낮을 싸웠다. 민주연군 부대들은 ‘인해전술’로 국군 진지에 거듭 돌격했으나 기관총, 화염방사기, 박격포 등으로 무장한 국군에 참담한 피해만 입었다. 전투 후에 점검하니 사망자 수가 민주연군 2,400여명, 국군은 624명으로 국군의 압승이었다. 민주연군은 부득이 공격을 포기하고 요서지역을 모두 내주게 되었다. 그후 쓰바오린장 전투(3)에서도 22사단은 민주연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를 거두었다. 중국이 나중에 해제한 2급 기밀문서에는 이 전투의 평가가 실려 있다. “지휘관이 적을 경시했고, 정보에 어두웠으며 린비아오 총사령의 전술 지침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랴오야오샹 휘하의 국군이 강하였던 것이다. 국군이 수세에 몰리던 시절에도 22사단은 전투에서 패배한 일이 거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두위밍 휘하에서 5개의 정예 사단을 거느린 9병단 사령원으로 임명되었다. 9병단은 린비아오의 동북 민주연군을 하얼빈으로 밀어 내었다. 쓰핑전투에서 승리한 뒤 국군이 동북 민주연군을 맹추격하여 쑹화장 너머로 쫓아낼 때 랴오야오샹은 주역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쑨리런, 천밍런 등 맹장들이 차례로 동북을 떠난 뒤 그는 정동궈와 함께 동북의 국군을 지탱하던 버팀목이었다.
1948년 10월, 형세는 바뀌어 진저우와 창춘은 이미 동북 야전군에게 함락 당했다. 동북에 있는 장제스의 주력부대는 랴오야오상 휘하에 신1군과 신6군이 남아 있었다. 왕야오우의 부대는 동북에서 장제스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카드가 되었다. 장제스는 한 장 남은 카드를 어떻게 사용하였을까?
장제스, 진저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
1948년 10월, 랴오야오샹이 지휘하는 “서진병단”은 요서지역으로 나온 뒤 13일에 장우(彰武)를 점령하고 15일에는 신리툰(新立屯)으로 진격하여 점령했다. 랴오랴오샹은 아직 투지가 식지 않았다. 그는 중일전쟁부터 내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웨이리황은 신중했다. 그는 랴오야오샹의 병단이 더 이상 서쪽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진저우를 잃어 전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웨이리황은 랴오의 병단이 신민(新民) 방향으로 빨리 철수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웨이리황은 동북에 온 뒤 늘 해방군의 운동전을 두려워했다. 그는 해방군이 성을 공격한 뒤 구원군을 공격하거나 이동 중인 국군을 압도적인 병력으로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아왔다. 국군은 이미 진저우를 빼앗기고 15만명이 넘는 수비병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처에 해방군이 깔려 있으니 랴오의 병단은 해방군에게 포위되어 소멸당할 위험이 컸다. 그러나 장제스의 판단은 달랐다.
1948년 10월 16일, 장제스는 베이핑으로 돌아가 웨이리황에게 잇따라 전보를 보냈다. 신속히 진저우를 공격하여 재점령하라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본래 진저우의 판한지에 군과 랴오야오샹의 서진병단, 호우징루의 동진병단으로 동북 야전군 진저우 공격부대를 협격할 생각이었다. 진저우 수비군이 전멸당하여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병력도 압도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장제스가 진저우 탈환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이 진저우부터 공격하고 베이닝 철도를 차단한 이유를 장제스가 몰랐을 리 없다. 동북에 주둔한 수십만 국군의 퇴로를 끊고 포위 섬멸하려는 것을 알았다면 남은 병력을 철수시키는 게 급선무이다. 그런데 주력부대에게 진저우에 진격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장제스는 본래 선양의 국군 주력을 진저우로 철수시키려고 하였다. 웨이리황이 위험하다고 반대하였지만 그는 계속 베이핑에서 동북으로 향하는 철도를 개통시키라고 요구하였다. 장제스가 진저우 공격에 집착한 것은 동북의 국군을 철수시키기 위해서였다. 진저우를 탈환하고 베이닝 철도(베이핑-하얼빈) 구간을 장악하지 않으면 대군을 철수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 국군을 관내로 철수시키는 방법은 육상과 해운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국군이 항구도시인 잉커우를 장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배편으로 수십만 대군을 철수하기는 어려웠다.
웨이리황이 보기에 장제스의 명령은 타당한 것 같지만 무모한 것이었다. 진저우가 함락당해 국군의 사기는 떨어져 있고 병력도 해방군이 압도하고 있었다.
웨이리황은 장제스의 명령에 따를 수도 없고 자신의 판단대로 용병할 수도 없었다. 동북에는 장제스의 심복인 두위밍이 부사령관으로 파견되어 있었으며 랴오야오샹도 자신보다는 장제스의 명령에 따를 것이었다. 웨이리황은 랴오야오샹에게 서쪽으로 가라고 하지도 못하고 신민으로 회군하라고 명령하지도 못하였다. 그저 해방군의 매복을 조심하고 신중히 용병하라고 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1948년 10월 19일, 장졔스는 베이핑에서 푸쭤이와 웨이리황 그리고 두위밍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진저우를 어떻게 할 수복할 것인지 의논하려고 한 것이다. 웨이리황은 선양에 병력을 집중하여 수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장제스는 진저우를 수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두위밍은 동북 국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각 군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싸우더라도 먼저 병력을 보충하고 부대 정돈과 훈련을 거친 뒤 기회를 보아 진저우 공격에 나서야 한다고 건의했다. 측근인 두위밍까지 신중한 입장을 보였는데도 장제스는 진저우 수복을 고집하였다. 진저우를 탈환해야 육로나 해로로 국군을 철수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선양이 제2의 창춘처럼 완전히 퇴로가 차단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장제스는 랴오야오샹에게 잉커우(營口)를 후방으로 하고 전력으로 진저우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류위장(劉玉章)의 52군은 먼저 잉커우를 점령하여 랴오의 서진병단을 엄호하게 하였다. 장제스는 또 두위밍을 동북 “초비총사령부” 부총사령 겸 기요열(冀遙熱: 허베이, 랴오닝, 러허 관할) 변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웨이리황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두위밍에게 넘기는 조치였다. 그런 다음 장제스는 두위밍에게 진시(후루다오)의 부대를 지휘하여 진저우를 함께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장제스는 “당신들 모두 공비와 싸우는데 자신이 없다. 나는 아군 주력이 선양에서 나와 공격하고, 진시(후루다오)의 여러 부대와 남북으로 협격하면 공비를 반드시 패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진저우를 수복할 수 있다.”하고 말했다. 랴오야오샹 부대의 회군과 관련하여 장제스는 “만약 공비와 싸워 물리지치 못하면 52군이 잉커우를 점령하여 퇴로를 엄호하고 랴오야오샹 부대가 철수해도 늦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동북 야전군, 랴오야오샹의 서진병단을 섬멸하다
1948년 10월 21일, 창춘이 해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창춘 수비병 10만명이 섬멸되었으며 수비군 사령관이던 정동궈는 투항했다. 창춘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마오쩌둥은 다음 전투를 생각했다. 마오쩌둥은 동북 야전군이 만주 남쪽 항구도시인 진시(후루다오)의 적을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마오쩌둥의 생각은 동북 야전군이 진시(후루다오)를 점령하여 잉커우나 진시, 천황다오 등으로 국군이 철군할 퇴로를 끊으려는 것이었다.(4)
린비아오는 이번에도 마오쩌둥과 판단을 달리 하였다. 린비아오는 “만약 진시(후루다오)를 공격하려면 해안에 있는 적 12개 사단과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지역이 비좁아 대병단이 기동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적은 이미 진지공사를 튼튼하게 해두고 완강하게 저항할 것이다. 그러면 전투를 빨리 끝낼 수 없게 된다. 랴오야오샹의 서진 병단이 빈틈을 노려 진저우를 점령하면 우리가 불리해진다.” 진시(후루다오)는 진저우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조금 아래쪽에 항구도시인 천황다오가 있어 텐진 등 화북의 병력이 증원하기도 쉬웠다. 그리고 러허 등에도 화북의 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지만 린비아오의 용병은 여전히 치밀하고 신중하였다.
1948년 10월 19일, 린비아오는 군사위원회에 전문를 보내 건의했다. “랴오야오샹이 진저우로 계속 전진하기를 기다린 뒤 공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랴오가 전진하지 않거나 잉커우에서 철수하여 선양으로 돌아가려는 정황도 약간 있습니다. 그럴 때 랴오의 병단을 신속하게 포위, 각개 격파하여 섬멸해야 합니다. 적이 잉커우에서 선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마오쩌둥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정예부대를 거느린 랴오야오샹 병단이 잉커우에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랴오의 병단을 요서 지역의 선양과 진저우 사이에서 포위 섬멸하는데 완전히 동의했다. 그는 린비아오에게 회신 전문을 보내어 “당신들 방침에 따라 즉각 배치하라. 전군이 임무를 완성하도록 고무 격려하라.”고 지시했다.
1948년 10월 20일, 린비아오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류쩐(劉震)의 2종대, 한셴추(韓先楚)의 3종대, 덩화(鄧華)의 7종대, 돤쑤첸(段蘇權)의 8종대, 잔차이팡(詹才芳)의 9종대, 리텐우(李天佑)의 1종대와 6종대 17사단과 포병종대는 즉시 진저우 지역에서 은밀히 신리툰(新立屯), 따후산(大虎山), 헤이산(黑山) 방향으로 진격하라. 양쪽에서 랴오야오샹 병단을 우회하여 포위한다. 완이(萬毅)의 5종대, 황용성(黄永胜)의 6종대는 각각 푸신(阜新), 장우 지역에서 남하하여 랴오 병단이 선양으로 가는 퇴로를 차단하라. 량싱추(梁興初)의 10종대와 1종대 3사단은 신리툰 동북 지역 뒤에서 헤이산, 따후산 지역으로 철수하여 진지공사를 구축하라. 적의 전진을 견결히 저지하고 시간을 벌어 주력이 돌아와 합류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 뒤 주력부대와 협력하여 적군을 포위 섬멸하라. 우커화(吳克華)의 4종대, 허진넨(賀晋年)의 11종대는 타산지역에서 계속 진시 방면의 적을 저지하여 주력이 안전하게 작전하도록 보장하라. 독립 제 2사단은 4일만에 잉커우에 도달하여 적의 해상 퇴로를 차단하라.”
헤이산 전투를 지휘했던 10종대 사령원 양싱추
린비아오의 구상은 랴오야오샹의 서진병단을 진저우와 선양 사이에서 저지 차단한 뒤 미리 우회 포위한 대병으로 모두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진시(후루다오)에서 올 국군 지원 병력을 저지하고 항구도시 잉커우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여 서진병단 10만명을 모두 해치우겠다는 주도면밀한 부대배치였다.
1948년 10월 23일, 린비아오는 다시 10종대에 전문을 보내 명령했다. “적의 아군 진지 공격을 견결하게 저지하라. 당신들은 3일만 지키면 된다. 랴오야오샹 병단을 반드시 전멸시킬 것이다.”
1948년 10월 23일 9시, 랴오야오샹 병단은 헤이산, 따후산에 맹공격을 시작했다. 그곳 해방군 진지를 돌파해야 진저우로 가는 공격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동북 야전군 10종대 사령원 양싱추는 각 사단에 명령했다. “3일간만 사수하면 된다. 적을 한 발자욱도 들이지 말라.” 공격하는 국군 병사들과 수비하는 해방군은 한 치의 땅을 가지고 다퉜다. 헤이산의 격렬한 공방전은 진저우 회전에서의 타산 공방전, 화이하이 전역에서의 쉬둥(徐東) 공방전과 함께 국공내전의 3대 공방전으로 꼽히고 있다.
헤이산 전투에서 포격하는 해방군
헤이산 전투 상황도. 붉은 색이 해방군의 진격로이다.
전투의 향방을 가르는 공방전인 만큼 양군은 삼일 밤낮을 격렬하게 싸웠다. 해방군은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 국군은 포위망을 돌파하고 전진하기 위해 병사들의 생사에 아랑곳없이 돌격하며 백병전을 펼쳤다. 10월 24일, 국군이 해방군 3개 진지를 점령한 뒤 스투산(石头山)에서 격렬한 백병전을 벌이고 있을 때 국군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진지를 맹폭했다. 양군이 모두 폭사했을 때 국군의 다른 부대가 밀어닥쳐 스투산을 점령했다. 이처럼 피어린 공방전 속에 국군은 진지 여러 개를 점령했으나 그날 오후 여섯시, 결사적으로 반격한 해방군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10월 25일까지 3일간 격전을 벌여 해방군 10종대는 헤이산, 따후산 진지를 사수했다. 랴오야오샹 병단은 서진할 시간도 남쪽으로 철수할 귀중한 시간도 모두 잃었다. 랴오야오샹은 5개 사단 병력으로 연일 헤이산, 따후산 진지를 공격했으나 모두 좌절하였다.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저우를 공격하려던 결심이 흔들렸다.
1948년 10월 25일 저녁, 랴오야오샹은 마침내 동남쪽 잉커우 방향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부대가 타이안(台安)부근에 이르렀을 때 동북 야전군 8종대 23사단과 마침 명령을 받고 판산(盤山)에서 북진해 오던 독립 2사단과 조우했다. 랴오야오샹은 적이 공산군 주력이라고 오인했다. 잉커우 항으로 철수할 길이 막힌 것이다.
1948년 10월 26일, 웨이리황이 랴오야오샹에게 잉커우 쪽을 고집하지 말고 선양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국군이 선양 방면으로 철수하여 이동하고 있을 때 황용성이 인솔하는 6종대가 길을 막았다. 그렇게 되자 랴오야오샹 병단 10만 인마는 전부 동북 야전군 수십만 대군의 겹겹 포위에 빠지게 되었다. 랴오야오샹은 막다른 골목에 빠지자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했다. “하늘이여, 10만 정병을 모두 죽이시렵니까?” 동북 야전군은 랴오의 병단에 대하여 맹렬하게 포격하며 섬멸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체 병단을 대포위한 가운데 부대의 가운데로 치고 들어가 여러개로 분할하고 섬멸하는 전법을 선택하여 지휘중심을 곧바로 공격했다.
한센추의 3종대는 겨우 세 시간 만에 랴오야오샹 병단 지휘부와 신1군, 신6군, 신3군 사령부를 휩쓸었다. 랴오야오샹의 10만 인마는 수뇌부를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랴오야오샹은 다급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부대를 얼다오강즈(二道剛子)(5)에 집결시켜라!”
그때 린비아오는 공격부대에 명령을 하달했다. “어지러우면 어지러운 대로 대응하라. 총소리가 나는 곳을 공격하라. 얼다오강즈에서 랴오야오샹을 반드시 사로잡으라.” 1948년 10월 26일, 장제스는 베이핑에서 랴오야오상 병단이 요서회랑에서 해방군의 포위 섬멸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동북 전 군의 명운이 다 되었다. 근심이 언제 그칠지 실로 알 수 없다.”
요서 지역의 회전이 한창일 때 린비아오는 벌써 다음 부대 배치를 하는 등 다음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1948년 10월 26일, 린비아오는 종웨이(鍾徫)의 12종대와 5개 독립사단 및 1개 기병사단에 선양에 있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부대들은 한밤중에 별을 보며 이틀 거리를 하루에 강행군해야 했다.
1948년 10월 28일 새벽, 요서 지역의 회전이 끝이 났다. 랴오야오샹 서진병단 소속 신1군, 신6군, 신3군, 71군과 49군 등 모두 5개 군, 12개 사단, 10만 병력이 완진히 섬멸당했다. 병단 사령 랴오야오샹 중장과 신6군 군단장 리타오(李濤) 중장, 71군 군단장 샹펑우(向風武) 중장, 49군 군단장 정팅지(鄭庭芨) 중장은 포로가 되었다. 신1군 군단장 판위쿤(潘裕昆)과 신 3군 군단장 룽텐우(龍天武)는 겨우 몸을 빼어 선양으로 달아났다.
1948년 10월 28일, 린비아오는 랴오닝(遙寧) 군구에 랴오허(遙河) 도하점을 신속하게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부교를 준비하여 대군이 강을 건너 선양으로 진군하기 위해서였다.
별 표시가 헤이산현. 주변의 주요 도시는 원으로 표시
린비아오, 선양을 점령하고 동북을 평정하다
1948년 10월 27일, 장제스는 두위밍을 베이핑으로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장은 해군 수송함을 이용하여 진시(후루다오)의 부대를 잉커우로 상륙시키려고 생각했다. 랴오야오샹 병단을 잉커우에서 철수시키는데 호응하기 위해서였다. 두위밍은 진시(후루다오)의 부대를 잉커우로 수송하는데 적어도 일주일이 걸릴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일주일 안에 랴오야오샹 부대가 살아남는다면 스스로 싸워 잉커우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이틀 사이에 끝장날 것이었다. 그러면 진시(후루다오)의 지원 병력을 보내도 모두 헛일이 될 게 뻔했다. 그는 장제스에게 잉커우의 부대를 배로 빨리 철수시키라고 건의했다. 장제스는 잉커우의 52군을 배로 철수시키는 데 동의했다. 그는 저우푸청(周福成)에게 53군, 제 6군 207사단을 지휘하여 선양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두위밍을 선양에 보내 저우푸청 부대등을 소집하여 선양 방어임무를 맡게 하였다.
그날 정오, 두위밍은 베이핑에서 비행기를 타고 선양으로 날아갔다. 도중에 진시(후루다오)에 있던 부대에게 진저우 공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진시(후루다오)로 돌아와 방어진지 설치를 하고 해방군의 반격에 방어하라는 것이었다. 본래 장제스는 진시(후루다오)의 부대들로 동진병단을 편성하여 랴오야오샹의 서진병단과 함께 진저우를 협격하게 하였다. 저녁에 두위밍은 비행기로 선양에 도착하여 웨이리황과 선양 방어 및 잉커우 철수를 검토했다.
웨이는 이때 심사가 어지럽고 앉거나 누워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거듭 “나는 진작부터 총통에게 말해 왔소. 요서회랑을 나오면 전멸당한다고 해도 그는 믿지 않았소. 내가 열십자를 그려도 그는 믿지 않았소.(6) 당신이 보기에 내 말이 맞지 않았소?” 할 뿐이었다. 그는 다시 “지금까지 나는 지켜야 한다고 했는데 그는 지키려 하지 않았소.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지킬 수 있소?” 두위밍이 웨이리황에게 물었다. “잉커우로 후퇴하는 건 어떻습니까?” 웨이리황은 “창춘에 있는 적 몇 개 종대가 이미 남하했소. 물러난다고 해도 곧 결딴날 거요.”하고 대답했다. 두위밍이 생각해도 확실히 진퇴양난이었다. 겨우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저우푸청을 불러 지금 있는 부대로 선양을 사수하라고 일렀다.
다음날 두위밍은 진시(후루다오)로 돌아가 잉커우, 진시(후루다오) 부대의 철수에 착수했다. 웨이리황은 대세가 이미 글렀다고 생각하여 30일 비행기를 타고 선양을 떠났다. 일설에는 장제스가 전용기를 보내어 웨이리황을 베이핑으로 불러 들였다고 한다.
이때 린비아오와 동북 야전군 수뇌부는 부대 배치에 고심하고 있었다. 랴오야오샹의 병단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부대 배치가 완전히 흐트러졌다. 각 사단과 연대들은 단독으로 작전했으며 국군을 뒤쫓거나 돌진했다. 총소리가 나는 곳에 가서 싸우는 식이었다. 28일 요서회전이 끝난뒤 각 부대는 집결할 방법이 없었다. 사단과 연대 위치가 완전히 분산되어 있었다.
동북 야전군 참모장 류야러우는 각 종대, 각 사단 위치 지도를 바라보더니 뒷통수를 긁었다. 뤄룽환도 초조해하며 걱정했다. “부대 건제가 엉망이오. 행동 통일이 안되면 선양의 적이 잉커우로 달아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오.” 린비아오는 볶은 콩을 한줌 쥐더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지러우면 어지러운 대로 하는 거지. 명령을 내리시오. 전군은 선양을 향해 출발한다. 종대와 사단, 연대, 대대, 중대는 집결할 필요없다. 각 부대는 그 자리에서 즉시 출발하라.”
둥북 야전군 각 부대는 신속하게 선양을 향해 출격했다. 노정을 앞당기는 강행군이었다.
1948년 10월 31일, 동북 야전군 대병이 선양을 포위했다. 1948년 11월 1일 새벽, 해방군은 선양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날 정오, 8병단 사령 저우푸청과 그의 경호대 300명은 은행건물에서 무기를 내려 놓았다. 다이푸(戴朴)가 지휘하는 6군 207사단이 마지막까지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해방군이 신속하게 섬멸했다.
1948년 11월 2일, 해방군은 선양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같은 날, 해방군은 잉커우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국군은 류위장(劉玉章)이 인솔하는 52군 군사령부 및 소속 25사단 등 수천명이 배를 타고 철수했다. 나머지 14,000여명은 해방군에게 모두 섬멸당했다.
1948년 11월 8일, 국군 동진병단 5개군 12개 사단은 두위밍의 지휘 아래 진시(후루다오)에서 배를 타고 철수했다. 그중 화북에 속해 있던 부대들은 천황다오로 철수하고 나머지 부대들은 상하이와 난징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52일에 걸친 랴오선 전역이 완전히 끝이 났다. 국군은 동북에 주둔해 있던 50만 대군 대부분을 잃었다. 랴오션 전역은 52일이 걸렸다.
국민당군 47만명을 섬멸했는데 사상자가 57,000여명, 포로 및 기의가 41만명에 이르렀다. 국군은 진저우, 창춘, 선양 등 거점의 수비군 사령관을 비롯하여 소장 이상의 고위 장교만 186명이 포로로 잡혀 엄청난 인적 손실을 가져왔다.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장비와 무기는 그대로 해방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해방군이 노획한 무기는 대포가 4,709문, 기관총이 13,347정, 소총이 175,361정에 이르렀고 그밖에 자동차, 탱크, 장갑차등 장비와 무수한 군수물자를 획득하였다. 국군 포로중 상당수가 도로 해방군으로 편입되었다. 국군은 동북에서 36개 사단을 잃었으며 이때부터 해방군의 병력수가 국군을 넘어서게 되었다. 즉 1948년 11월 국군이 290만명, 해방군 300만명으로 내전 이래 처음으로 병력대비가 역전된 것이다.
공산당은 랴오선 전역의 승리로 동북이라는 광대한 전략적 후방을 얻었다. 그리고 강력한 전략적 예비대를 갖게 되었으며 국공 쌍방의 총병력 대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마오쩌둥은 랴오선 전역이 끝난 뒤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우리가 국민당 반동정권을 타도하는데 1946년 7월부터 대략 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대략 일년 정도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장제스, 책임을 웨이리황에게 전가하다
장제스는 동북을 잃은 책임을 전부 웨이리황에게 전가했다. 1948년 11월 26일, 장제스는 웨이리황을 해임하고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처음 명령은 “동북 초비 총사령 웨이리황은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고, 앉아서 전기를 잃었다. 요충지를 내주었으니 즉시 직을 거두고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그 뒤 웨이리황은 난징의 집에 연금되었다. 1948년 신화사가 전범 43명의 명단을 발표했을 때 웨이리황은 13번째로 거명되었다. 웨이리황이 전범으로 거명된 것은 마오쩌둥 등 중공 지도부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포함시켰다는 설도 있다. 그만큼 웨이리황에 대한 중공 지도부의 호감이 컸던 것이다.
그후 장제스가 하야하고 리쫑런이 총통대리로 부임했을 때 웨이리황도 석방되었다. 그 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갔다가 역시 배편으로 홍콩에 갔다.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이 성립되었을 때 웨이리황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등에게 축하전보를 보내어 기쁨을 함께 하였다. 웨이리황은 1955년에 중국의 배려 속에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직접 그를 접견하며 환영하였고 마오쩌둥도 그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전범에 대한 대우가 아니라 대단한 유공자를 영접하는 모양이 되었다. 웨이리황이 2차 국공합작 때 중공 지도부를 그만큼 우대하고 동북에서도 해방군에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웨이리황은 정치협상회의 위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1960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베이징의 빠바오산 혁명열사 능원에 묻혔다.
랴오야오샹은 전범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1961년 말 석방되었다. 그후 인민공사에서 노동자로 1년간 노동개조를 받았다. 그는 전국 정치협상회의 위원 등을 지냈다. 중국 지도부에서 그를 상당히 우대한 셈인데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의 표적이 되었다. 대부분의 국군 출신들처럼 테러를 당하는 등 고초를 겪다가 1968년 심장병이 발작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980년 사인방이 타도되고 덩샤오핑이 국가 지도자가 된 뒤 비로소 그에 대한 추도식이 열렸다. 랴오야오샹도 베이징의 빠바오산 혁명열사 능원에 묻혔다.
<주석>
1. 중화민국 시절의 군사평론가인 장바이리(將百里)가 한 말이라고 한다.
2. 국군 5대 주력은 쑨리런(孫立人)의 신1군, 두위밍의 5군, 랴오야오샹의 신6군, 후롄(胡蓮)의 18군, 왕야오우의 74군을 가리킨다. 이 부대들은 정예병력과 함께 미제 무기와 장비로 무장하여 전투력이 강했다.
3.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동북 민주연군이 남만주의 린장(臨江) 부근에서 국군을 공격한 전투이다. 정식 명칭은 싼샤장난 쓰바오린장(三下江南四保臨江) 전투라고 한다.
4. 당시 후루다오의 명칭은 진시(錦西)로 1994년 후루다오로 개명하였다.
5. 얼다오강즈(二道剛子)는 높은 언덕을 뜻하는 지명이다. 역자 주.
6. 당시 서명할 때 이름을 쓰지 못하면 열십자를 그려 넣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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