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벚꽃동산'
2막 후반부에 무대의 왼쪽 벽을 지탱하던 10m 길이의 나무들이 끼이익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객석에서 탄성이 번졌다. 연극 '벚꽃동산'<사진>을 시각적으로 지배하던 거대한 장치가 드디어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경매로 벚꽃동산을 사들인 소작인의 아들 로파힌(장재호)이 벚나무를 다 베겠다고 말할 때, 낭비벽에 젖어 있던 지주(地主) 라넵스카야 부인(이혜정)은 휘청거리면서 현실을 바로 본다. 계층의 전복(顚覆)이다.이 연극의 주인공은 단연 무대 디자인이었다. 지차트콥스키는 30m 깊이의 토월극장 무대를 다 쓰면서 멀리서 다가오는 기차 소리와 강변 풍경까지 입체적으로 살려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살아 있는 배우'는 증발하고 없었다. 이야기가 겉돌자 관객은 피로해졌다. 이 러시아 연출가는 2004년 '갈매기'에서 보여줬던 내용과 형식의 황금비율을 잃고 말았다.
'벚꽃동산'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이지만 '갈매기' '세자매'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지는 드라마다. 관객은 이야기를 파악할 틈도 없이 파격적인 비주얼에 마비당했다. 배우들도 거대한 무대를 견뎌내지 못한 채 들뜬 마룻바닥처럼 불안하고 거칠었다. 관객과의 공감 없이 지르는 소리와 몸짓은 소음이거나 오버액션이다. 밀도가 부족하니 충격적이어야 할 장면에서도 진동이 크지 않았다.
라넵스카야 부인이 허공에서 세수하면서 차가운 물을 느끼는 장면, 아들을 삼켰던 죽음의 물이 첨벙첨벙 효과음으로 덮쳐오는 장면 등은 좋았다. 하지만 지차트콥스키는 재료를 끈끈하게 뭉치는 데 실패했다. 그렇게 던진 드라마는 관객에게 닿기 전에 허공에서 흩어졌다.
▶13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02)580-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