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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8일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열다섯 번째 주일)
겸손의 길
렘2:13; 눅14:1, 7~14
오늘 우리의 누가복음 본문은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이야기 모두 잔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잔치에 초대받아 간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두 번째는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한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7~11절에 나옵니다.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초청받은 찬치에 가서 초청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비유 하나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팔레스틴의 결혼잔치 풍습에, 결혼잔치에 초대되어 가면, 남자손님들은 각자의 자리에 비스듬히 앉게 되는데, 중앙의 자리에 부와 권력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앉는 명예스러운 자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와 권력과 지위에 따라 앉는 자리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에게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가거든, 높은 자리(중앙의 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 가운데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더러 ‘이분에게 자리를 양보하셔야 겠습니다.’ 할지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낮은 자리로 내려앉아야 될지 모른다. 그러니 네가 초대를 받아 가면, 아예 맨 끝 자리에 앉아 있으면, 너를 청한 사람이 오히려 너더러, ‘윗자리가 비었습니다. 윗자리로 올라앉으십시오’ 할 것 아니냐? 그러면 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윗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나중에 더 높은 자리로 옮겨 갈 수 있게, 우선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실용적인 가르침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은 비유라고 했지만, 비유라기보다는 권면이나 금언에 가깝습니다. 사실, 이런 권면은 구약의 잠언에 굉장히 많이 나오는 금언입니다. 가령 잠언 25:6~7절에 보면,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높은 사람의 자리에 끼어들지 말아라. 너의 눈 앞에 있는 높은 관리들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을 듣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잠언에는 교만을 경계하라는 수많은 경구와 겸손을 옹호하는 격언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리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짓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라는 권면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12~14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자기를 초대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가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러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는, 가난한 사람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 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은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네가 보상을 바라고 사람들을 대하지 말고, 오히려 아무런 댓가 없이 잘 대해주어라,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네가 부유한 사람들만 초대하여 그들과 교제하지 말고, 오히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식사라도 대접을 함으로써 네 자신을 낮은 자리에 있게 하라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 말씀도 우리의 겸손한 태도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너의 진정한 본심이 뭐냐?, 너는 무엇을 바라고 그 일을 하는 거냐? 하는, 우리 마음속에 늘 상존해 있는 “숨어있는 동기”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실 때, 바로 이 숨은 동기에 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갚아주실 것이니, 사람들에게서 뭔가를 바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겸손하라는 말씀과 보상을 바라지 말고 하라는 이 두 말씀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겸손하라”는 권면을 듣게 됩니다. 겸손하라는 권면은 사실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제가 됩니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여러 번 하셨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박해 시대를 지나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기독교의 수행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 때는 많은 박해와 그에 따른 순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사람들은 이런 박해와 순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장받는 엘리트 코스로 이해했습니다. 순교는 가장 겸손해지는 길이라고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당할 때에도 오히려 기쁨으로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순교의 시대가 끝나고,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자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순교는커녕 기독교를 믿는 것이 특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했던 사람들은 이런 변화에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낮아지는 겸손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겸손만이 그리스도를 만는 길이요, 구원받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사막의 교부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가 4세기 정도가 됩니다. 나중에 이 사막에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막의 교부들이나 나중에 세워진 수도원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인의 덕목은 겸손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낮은 자리에 처할까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수련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수도원 규칙의 모법이 되는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겸손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 됩니다. 그 규칙서에서 겸손에 이르는 열 두 단계를 말하고 나서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이 겸손의 단계를 모두 오른 수도승은 두려움을 몰아내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신속히 이르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전에는 두려움 때문에 지키던 모든 계명을 이제는 힘들이지 않고 마치 아주 자연스럽게 지키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며, 좋은 습관과 덕행의 즐거움 때문이다.” 겸손이 우리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아는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이란 무엇일까요? 사막의 교부들이 그렇게 가려고 했던 겸손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요? 여러분은 겸손하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던지(저 놈이 나를 뭐로 아는 거야?), 아니면, 그 말은 저 옆에 있는 친구에게 해당하는 말이지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사실, 교회 지도자들은 이 겸손하라는 권면을 이용해서 교인들의 입을 봉해버리거나 그들의 행동을 옥죄는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겸손하라는 말은 어쩌면 그들의 깊은 상처를 더욱 억압하는 쪽으로 강화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정말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그것이 심리적이든 아니면 물질적이든) 겸손하라는 권면은 그 사람을 성장시키기 보다는 더욱 위축시키는 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을, 자신을 낮추어 “작은 존재로 만듦으로써” 얻게 되는 덕목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은, “너는 별 볼일 없어, 그러니 니가 별 수 있니? 겸손해야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우리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하고, 시편 기자는 인간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말합니다. 지난 주일에 본 대로, 예수님은 열여덟 해나 허리를 펴지 못하는 여인의 허리를 펴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범사례입니다.
겸손이란 우리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갖춰야 하는 우리의 대외용 마스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종교적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겸손을 영어로 humility라고 하는데, 라틴어 humus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humus는 흙, 땅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humilitas)은 우리가 흙에서 존재임을, 우리가 땅에 밀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땅에서 벗어날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어두운 면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나약함, 자신이 흙에서 온 육체라는 것, 자신의 인간성, 자신의 어두운 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와 어둠을 그대로 숨겨두고 억압한 채, 밖에서는 그것을 가리고 포장하기 위해 거짓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와 어둠, 부끄러움, 자신의 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그대로 자신의 것을 받아들이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키딩 신부님은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겸손이란, 자기비난이나 부끄러움, 분노, 낙심 같은 정서적 반응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편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확신을 갖는 것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결함과 어두운 면을 편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 속에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고 참된 자기인식인 동시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사실, 융의 심리학에서도 자신의 무의식에 있는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의식화하는 것이 성장하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꾸준히 자신의 찾아가는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면, 이 길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믿고 신뢰할 때, 우리는 우리의 고통, 부끄러움과 수치를 그분 앞에서 내려놓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의 고통, 부끄러움, 수치 이전에, 우리 주님이 하늘의 영광을 떠나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수치와 부끄러움을 다 당하셨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중심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우리를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그래서, 겉과 속이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의식적 작동에 덜 휘둘리게 됩니다. 무의식적인 동기가 좀더 순수한 동기로 바뀌게 됩니다. 자신이 진정 도와줄 사람에게는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심지어,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하는 은근한 자부심까지) 그저 단순하게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미안해요, 나한테는 너무 힘에 부치네요! 담백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이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의 숨어 있는 동기를 잘 살펴라! 네가 은근히 뭔가를 가지고 너를 드러내려고 하는(혹은 너의 정체성 입증하려고 하는) 속셈을 잘 보아라, 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겸손의 길은 속은 어찌되든 겉으로만 겸손한 모습을 가지는 길이 아닙니다. 겸손의 길은 겸손한 채 사는 길이 아니라, 진정 겸손한 길입니다. 이 길은 자신의 어두움보다 하나님의 밝음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께 자신을 여는 길입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자신의 어둠을 대면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겸손의 길은 위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됩니다.
오늘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으로 샘을 삼은 것은 바로 겸손의 길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판 샘에 기대고 살지만, 그곳은 물이 고이지 않는 웅덩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겸손히 나가, 내가 판 물이 새는 웅덩이가 아니라, 진정한 생수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겸손의 길은 참된 내가 되어 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