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리영희, 『우상과 이성』
리영희는 1971년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후 1972년 한양대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긴 호흡의 글들을 쓰고 책을 펴내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미제국주의와 베트남 전쟁의 본질, 중국사회주의 이해, 권력과 언론의 야합, 청년계몽과 의식의 개조 등과 관련한 글을 다수 발표했다. 2년여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1980년 출소한 후에는 여러 악조건 속에서 주로 중국과 제3세계 관련 문서들을 번역 소개한다. 권력에 의해 글쓰기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1984년 이후 일본교과서와 우경화 문제, 군사독재권력 비판, 국가보안법과 남북관계, 핵무기의 위험, 냉전체제이후 국제관계 등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1957년 예편과 동시에 합동통신사 기자가 된 리영희는 외신부에 배속돼 제3세계에서 벌어지던 피압박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샅샅이 추적했다. 리영희의 관심은 특히 베트남전쟁과 함께 마오쩌둥의 현대 중국에 집중됐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대결 속에서 중국이 열어가던 제3의 길에 모였다. 탐구가 진척되면서 시야가 국제관계 전반으로 넓어졌고 그 국제적 시야에서 리영희의 눈은 한반도의 남과 북이 만들어가야 할 미래로 향했다. 또 그럴수록 이웃 나라 중국을 연구할 이유도 뚜렷해졌다.
1964년 ‘조선일보’로 특채된 리영희는 외신부장으로서 국제문제의 진실을 가감 없이 보도하려고 분투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기사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박정희 정권은 조선일보를 압박했고 리영희는 1969년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이어 1970년 합동통신사로 돌아가 외신부장을 지냈지만 여기서도 1년 만에 다시 해직당했다. 그러는 중에도 중국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식지 않았다. 1972년 한양대 교수 자리가 나 둥지를 옮긴 뒤 중국 현대사를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20여년의 경험과 탐구가 맺은 결실이 ‘전환시대의 논리’ 속 중국 관련 논문들에 담겼다.
1977년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이 잇따라 나왔다. 독자들의 반응은 함성과도 같았다. 박정희 정권은 그해 말에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을 엮어 저자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정권의 수족이 된 검사는 문맥과는 아무 상관 없이 문장과 글자들을 따와 책의 내용과는 반대되는 결론을 짜맞추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이적행위’가 되는 시대였다. 검사가 쓴 엉터리 기소장을 판사는 오자까지 그대로 베껴 판결문이라고 내놓았다. 리영희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창살 안에 갇혔다. 독재정권의 눈에 리영희는 그 두뇌를 어떻게든 사회와 격리해야 할 ‘의식화의 원흉’이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젊은이들의 피와 함께 리영희의 혼을 먹고 자랐다. 리영희는 청년·학생·민중의 눈을 뜨게 한 ‘사상의 은사’였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나온 지 50년, 저자가 세상과 작별한 지 14년이 됐지만, 리영희의 꿈과 뜻은 후배·후학의 가슴에 여전히 살아 있다
1984년 한양대에 복직한 후 1987년에는 미국 버클리 대학과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동아시아와 냉전체제에 대해 강의하였다.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했고 이후 논설주간으로 근무하며 ‘한겨레논단’을 집필한다.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다섯 번째로 구속되었다. 1957년 기자가 된 이후 리영희는 기사와 저술의 반공법위반 등의 혐의로 모두 아홉 차례 연행되고 5차례 구속되었다. 직장이던 언론사와 대학에서도 네 차례 해직된다.
199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한반도 핵·미사일’ 문제, 남북통일의 의미 등 첨예하고 심각한 문제들에 천착하였다. 1995년 한양대학교를 정년퇴임하고 ‘단재학술상’을 수상했다. 1998년에는 ‘햇볕정책’ 덕분에 꿈에 그리던 고향을 방문하여 조카와 상봉하기도 한다. 1999년에는 문익환기념사업회에서 주는 ‘늦봄통일상’ 받았고, 2000년에는 만해상을 수상했다. 2000년 11월 독재정권의 오랜 탄압과 감옥살이 후유증으로 뇌출혈이 찾아와 투병을 시작한다.
리영희는 이후 3년간 집요한 투혼으로 마비되어가던 몸을 살려낸 후 몇 가지 작업을 마무리했다. 2005년에는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대담형식으로 방대한 자전에세이 <대화>를 펴냈고, 2006년에는 총 12권에 달하는 <리영희저작집>을 교열 후 완간한다. 이후 많은 단체에서 시상을 통해 리영희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한국기자협회의 ‘기자의 혼 상’(2006년), 한겨레신문사의 ‘한겨레통일문화상’(2007년), 전남대학교의 ‘김대중학술상’(2008년)이 그것이다. 2009년 7월에는 반신이 마비되어 가는 몸을 이끌고 광장으로 나와 이명박 정부의 야만적 통치와 파시즘 회귀 행태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2010년 12월 5일 작고하여 광주 5.18민주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