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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9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8월 설교 시리즈 – 못다 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2.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또 한 사람!
본문 : 누가복음 10장 35절(30~37절)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새번역>
‘약방에 감초’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방의 감초는 한약을 지을 때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감초'의 특성에서 유래한 속담으로, 어떤 일에나 빠짐없이 끼어드는 사람이나 꼭 있어야 할 필수적인 물건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감초는 다양한 약재들의 성질을 조화롭게 섞이게 하고 독성을 중화하는 효능이 있어 대부분의 한약 처방에 필수적으로 사용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도 이런 ‘감초’의 역할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인공 옆에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더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주거나 긴장을 풀어주거나 오히려 극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해서 오늘날에는 주인공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이 조연의 역할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대우 받지 못했던 조연 전문 배우들이 이제는 주연들만큼이나 대우받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명품 조연’이라는 말도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2달 연속 나누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우리가 있지 말아야 할 약방의 감초, 조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잘 다루어지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은 하지만 너무도 중요한 숨겨진 영웅, ‘Unsung Hero’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여관 주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강도를 만나 거의 다 죽어가는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마치고 나귀에 그 사람을 태우고 빠르게 길을 나섰습니다. 다행히 여관이 있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이들이 쉬어갈 수 있는 오아시스와도 같은 여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관 주인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문을 두드리기에 나가 보았는데 한 사마리아 사람과 나귀에 실린 거의 죽어가는, 시체일지도 모를 사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둘 다 깨끗했겠습니까? 땀범벅, 흙범벅, 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한 명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두려웠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평안함 중 불청객이 온 것 같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마음은 우리의 마음이었는지 성경은 그런 모든 내용을 뛰어 넘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누가복음 10장 34절, 새번역>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관 주인이 기꺼이 그들을 맞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사마리아 사람과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피하여 주로 그 길로 다녔을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자주 그 여관에 들러 쉬어갔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관 주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안면을 튼 후,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또는 친해졌기에,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야기 후반부에 두 데나리온을 주며 강도 만난 사람을 맡길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자신이 온전히 맡아야 하는데 돌아 올 것이라는 신뢰도 없이 어떻게 맡을 수 있었겠습니까? 두 데나리온이라고 해봐야 겨우 이틀 치 일당일 뿐입니다. 그것으로 필요한 약을 사고, 청소하고, 음식도 보양식으로 준비해 주었다면, 자신이 일한 대가를 받았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을 것입니다.
여하튼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기록상 시간이 정체되었던 것으로도 보이지 않기에 여관 주인은 바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으로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 또한 유추해 볼 수 있는데 둘째로, 이미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 보았던 여관 주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위치적으로 그 자리에서 여관을 하다 보니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던 적이 처음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빠르게 방을 준비하고 사마리아 사람을 도와 그 사람을 간호해 주었던 것입니다. 한쪽으로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한쪽으로는 사마리아 사람을 도우면서 참으로 긴 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이나 다음 날에는 자신에게 맡기며 길을 떠나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관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요청에 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에 여관을 운영하시던 집사님께 직접 들은 말인데 이 본문을 가지고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여관 주인의 입장에서는 깨끗한 손님, 조용한 손님, 손길이 안 가는 손님이 가장 좋다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당연합니다. 아무래도 손길이 안 가고,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왔다가 그냥 가는 손님이야말로 여관 주인 입장에서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런데 완전히 그와 반대인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불평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여관 주인은 정말 긍휼과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가 아니면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관 주인은 정말로 쉼이 되어 주는 오아시스와 같은, 집과 같은 장소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이었다면 에어비앤비를 통해 별 다섯 개 아니 오만 개라도 주고 싶은 그런 곳이었을 것입니다. 여행객은 물론이요, 누구라도 와서, 설사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사마리아 사람도 차별 없이 누구나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어떠한 유추든 어떠한 설명이든 하더라도 여관 주인이 보인 행동은 정말 놀랍고 대단한 것이라는 것에는 아무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새롭게 살펴 보면서 사마리아 사람뿐 아니라 아니 오히려 그 사마리아 사람보다 더 칭찬받고 닮아야 할 사람은 이 ‘여관 주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이 율법학자에 하신 마지막 질문이 새롭게 이렇게 들렸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누가복음 10장 36절, 새번역>
이 세 사람이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라 제사장과 레위인이라고 하는 그냥 지나쳐간 무리, 긍휼히 여겨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 그리고 그 사마리아 사람과 강도 만난 자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어준 여관 주인 이렇게 세 형태로 말입니다.
그러자 오히려 율법학자의 대답이 이해가 갔습니다.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7절, 새번역>
저는 처음에 이 대답을 듣고 율법학자가 차마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이름조차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충분하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선한 행동을 들었지만 그 이름은 차마 말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율법학자가 볼 때에도 사마리아 사람뿐만 아니라 여관 주인도 만만치 않게 자비를 베푼 사람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오히려 여관 주인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기에 복수형이 아닌 여관 주인만을 두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 즉 먼저 한 행동의 중요함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없었다면 여관 주인도 등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에 두 사람 모두 칭찬받아야 하고 우리가 닮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그렇게 이 여관 주인에 대한 묵상을 마치고 나니 곧바로 이 여관 주인을 통해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인지 이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여관 주인은 바로, ‘교회’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교회는 이 시대 모든 영혼의 ‘피난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느낄 수 있는, 성령님의 위로를 느낄 수 있는 피난처가 교회는 반드시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그 황량하고 위험하고 막막한 길에 정말 다행히도 강도 만난 사람을 뉘일 수 있었던 오아시스 같은 여관이 있었던 것처럼, 그 길과 같은 우리의 인생에도 쉬어갈 수 있는 교회가 있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피난을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 교회로 피난을 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느껴야 합니다. 교회에서 천국을 맛보아야 합니다.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도움의 손길을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 진짜 이 말씀을 실천하는 피난처이길 소망합니다. 교회가 그냥 거룩과 경건이란 말만 있는 곳이 아니라, 거룩과 경건을 실천하는 곳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 새번역>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피난처, 도무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그 여관처럼, 이 험한 세상에 이처럼 따뜻한 교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우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선한 연합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 혼자서 행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도움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서로가 상호 보완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모여 교회가 되고, 교회가 하나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 된 모습’이 필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여관 주인은 한 가지 뜻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바로 강도 만난 사람의 회복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만으로도 부족했고, 여관 주인만으로도 부족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교회를 떠나 그리스도인 혼자서 행하기에 부족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놓칠 수 있는 부족한 부분을 성도 한 명 한 명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따로, 교회 따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하나의 공동체가, 하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해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각자의 그리스도인을 이해해 줌으로 사랑으로 연합할 수 있는 노력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라고 원하는 것이 바로 ‘가나안성도’ 라는 말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없이 떠도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정말 자신과 하나 될 교회를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회가 점점 줄어져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8절, 새번역>
주님의 교회입니다. 사람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도, 그리스도인도 주님께 속하여 다시 하나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세상 속에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치열한 세상 속에서 거룩을 유지해야 합니다. 결코 ‘세상 밖에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길, 정말 그건 우리의 인생길과도 같습니다. 그 내리막길이 우리의 인생의 내리막길과 같고, 그 사망의 골짜기같은 풍경이 우리네 인생의 풍경과 같습니다. 여관은 바로 그 내리막길 안에, 그 풍경 안에, 그 황량하고 치열하고 두렵고 떨리는 세상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함’을 유지했습니다. ‘다름’, ‘구별’, ‘거룩’을 유지했습니다. 교회가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저 산 위에서,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이 찾아올 수 없는 곳 외딴 곳에 만들어진 섬이 아닙니다.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세상 안에 있는 교회’로 세상을 섬기며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된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교회이지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내고자 이웃과 더불어 그 세상 가운데 머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라고 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셔야 합니다. 혼자 있거나, 믿는 이들끼리만 있거나, 교회에만 머물러 있다면 빛과 소금의 정체성을 결코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빛이 없는 어둠이라는 세상에 여러분이라는 빛이, 썩어져 가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 그 부패를 막는 여러분이라는 소금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마태복음 5장 13~14절, 새번역>
하나님은 독생자를 특정 믿는 이들이 아닌 이 세상 한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7절, 새번역>
이제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과 그 세상을 화목하게 하실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 새번역>
그래서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을 이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예배자 여러분! 오늘 우리는 숨겨진 영웅, Unsung Hero, 아니 어쩌면 진짜 주인공일지도 모를 ‘여관 주인’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 여관 주인의 행보는 사마리아 사람만큼이나 큰 울림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여관 주인을 보며 교회의 오늘을 생각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의 피난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느낄 수 있는, 성령님의 든든한 위로를 느낄 수 있는 피난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이제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한 가지 목표로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 있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별되어, 거룩한 교회로, 오히려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조금씩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중심에, 그 여관 주인과 같은 교회, 피난처와 같은 교회, 하나된 교회, 구별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교회로, 우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가 존재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결단 찬양 – 우리가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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