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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20 - 포르투칼 식민지에서 독립전쟁한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중세 시대인 13~4세기 유럽에서 4대 무역 국가는 아말피 와 피사, 제노바에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 지중해를 건너서 알렉산드리아와 레반트 그리고
흑해에서 비단과 향료를 무역하면서 부를 쌓아 북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납니다.
15세기 초가 되면 지중해- 오스만 제국- 동방 루트를 대체하기 위해 포르투갈은 엔히크 왕자 의
주도 아래 아프리카로 탐험대를 보내니..... 카페 베르데와 콩고를 거쳐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1488년에 희망봉을 발견하였고 그후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합니다.
그런데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에는 기원전 600년 경인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 (Necho II) 의 명을 받고 항해에 나선 페니키아인들이 희망봉에 도달했다고도
하는데.... 이집트 동쪽 홍해를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았다는 것입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적도를 넘어 가니 태양이
북쪽(항해사들의 오른쪽) 에 떠있었다고 언급했다더라' 는 기록이 나오는데, 실제로 남반구
에서는 한낮에 태양이 북쪽에 떠있기 때문에 정말로 희망봉을 돌았을 가능성이 제기 됩니다.
이슬람 사라센인을 이어 이슬람 무어인이 다스리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에서 안도라 산맥
아래로 쫃겨갔던 기독교도들이 작은 왕국을 세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14세기에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두각을 나타내니 이슬람 세력들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 가 일어납니다.
포르투갈의 기원은 카스티야-레온 연합 왕국의 알폰소 6세가 딸 테레사 데 레온 공주와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에게 준 포르투갈 백국인데, 이후 부부의 아들 엔히크가 전쟁을 통해 공작으로 독립
하고 레콘키스타중 이슬람 왕조에 승리를 거둔 것을 계기로 독립을 선언하고 아폰수 1세라 칭합니다.
십자군전쟁 중이던 무렵 포르투갈은 이슬람 무어인으로 부터 리스본을 빼앗아 수도를 옮기고는
아프리카로 진출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으니.... 교황의 중재로 스페인과 더불어 토르데질랴스
조약으로 세계를 분할할 정도의 해양 강대국이 되었으니 주요 식민지로는 브라질, 아소르스
제도, 모잠비크, 앙골라, 상투메 프린시페, 카보베르데, 기니비사우, 동티모르, 마카오 등 입니다.
그 중에서도 남아메리카에 있는 큰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스페인의 콜럼버스 가
신대륙(아메리카) 을 발견한 8년 후에....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발견
했는데 포르투갈이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왕실이 피난하기도 했습니다.
1. 앙골라
1483년 포르투갈의 항해사 디오고 캉이 앙골라 북부 해안에 도착하여 콩고 왕국을 방문하면서 앙골라
가 처음 유럽에 알려졌으니 당시 앙골라에는 은동고 왕국을 포함한 몇개의 부족 왕국들이 있었습니다.
디오고 캉(Diogo Cão 1452년~1486년) 은 포르투갈의 탐험가이자 대항해 시대의
가장 유명한 항해사 중 한명이니..... 그는 1480년대에 콩고강과 오늘날의
앙골라와 나미비아의 해안을 탐험하면서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항해했습니다.
디오구 캉은 1452년 포르투갈의 빌라헤알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 곤칼로 캉은 알주바로타
전투에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위해 싸웠으며 1480년, 캉은 주앙 2세를 위해
아프리카 해안을 항해했으니 그는 나포된 스페인 선박과 함께 포르투갈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1480년 알카소바스 조약으로 아프리카 서해안의 무역과 탐험에 대한 포르투갈의 독점이
확인되자..... 주앙 2세는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위해 재빨리 움직였으니 1481년,
10척의 함대가 골드 코스트에 파견되어 상조르즈다미나성이라 알려진 요새를 건설합니다.
이 요새는 무역의 상업 중심지이자 포르투갈의 항해를 위한 중요한 보급지점이 되었으며 주앙
2세는 또한 스페인과의 전쟁 기간 동안 중단되었던.....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탐험 계획을 다시 세웠으니 1482년 주앙의 첫 탐험을 이끌기 위해 디오구 캉이 선발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의 2차 아프리카 진출은 60년 후인 1540년대에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면서 이루어졌으니.... 1575년 포르투갈군이 앙골라를 침공해서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정착하는데 수도 루안다는 물론 벵겔라, 루방고 등 입니다.
앙골라는 인도 무역을 할 때 지나가는 거점으로 활용되거나, 브라질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노예
인력의 공급지로 이용되었는데... 그후 포르투갈이 콩고를 먼저 발견했다며 식민지 영유권을
주장하였지만 19세기에는 국력이 떨어진지라 콩고를 벨기에가 식민지로 삼으니 빼앗겨 버립니다.
포르투갈은 가장 먼저 해외로 진출해 식민기지를 건설했으나 국력이 약하다 보니 후발국
들에게 다시 빼앗기곤 하는데..... 콩고를 벨기에에 뺏긴 외에도 남아프리카 희망봉은
네델란드 (네델란드도 그후 보어전쟁에 패해 영국에 뺏김) 에 빼앗기고, 인도의
고아는 악착같이 유지했지만 인도 자체는 프랑스와 영국이 싸워 결국 영국이 차지합니다.
말레이시아의 말래카를 침략해 정복했지만 나중에 네델란드와 영국이 싸워 영국이 차지했으며
향료의 산지인 인도네시아도 결국 네델란드에 배앗겼고 마카오는 그럭저럭 유지했지만......
대만 역시 네델란드인에게 강탈당했으며 일본 규슈 히라도에 가장 먼저 와서 무역기지를 건설
했으나 이번엔 천주교 포교 때문에 네델란드에 나가사키 데지마 기지를 빼앗기고 쫃겨났습니다.
게다가 바다 반대편에 포르투갈의 중요 식민지였던 브라질이 1822년에 독립하니 포르투갈
은 본격적으로 앙골라 식민지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니.... 해안에서 비로소
내륙으로 진출이 이루어지고 이후 열강들 간에 체결된 조약을 통하여 오늘날의 앙골라
국경선이 확정되었는데, 포르투갈의 기본적인 식민지 정책은 "동화와 강제 노역" 이었습니다.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기독교로 개종한 흑인과 그렇지 않은 흑인을 철저하게 차별해 대우했으며,
식민지 농업과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을 위하여 무수히 많은 앙골라인들이 '계약노동'
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되었지만 막상 포르투갈어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본국인 포르투갈 조차 20세기 중반에도 식민열강 답지않게 문맹률이 40% 를 한창
넘나들었을 정도로 교육에 대한 열의와 투자가 미비했기 때문에, 앙골라 교육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질리는 만무했으니 1950년대 당시 앙골라의 문맹률이 98% 에
달했는데.... 포르투갈어는 물론이고 ABCD 를 외우는 사람 조차 소수 계층에 불과했습니다.
20세기 초 범아프리카 운동이 대두되면서 독립운동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운동이 본격화되었으니 1956년 앙골라 인민해방
운동이 조직되고... 1958년에는 앙골라 인민연합이 창설되었으며 1961년 이들
단체의 무장독립투쟁 에서 부터 앙골라 독립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앙골라 독립에는 소련, 중국,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의 지원이 활발하였으니... 당시 소련은
공산혁명과 관련하여 식민지 해방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지원한데다가
냉전시기 세력확장을 위하여 아프리카 식민지 독립에 많은 지원을 했으며 중국의 경우
에는 소련과의 대립, 제3세계 주도권을 둘러싸고 활발하게 해외 원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소련과 쿠바가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 을 지원하자 소련의 라이벌인 미국과 서방세계
는 우파 성향의 앙골라 인민연합(UPA) 과 그 후신인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 을
지원하며, 이들은 경쟁관계 속에서 포르투갈이라는 상대를 두고 포르투갈군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포르투갈 식민지 앙골라는 1961년 부터 1974년 까지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단체들이 전쟁
을 벌였는데.... 1934년에 포르투칼은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포르투갈령 인도(고아) 식민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외 식민지를 전부 합치면
유럽 주요 5개국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의 영토를 합친 것만 했습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부터 해외식민지를 개척해 온 식민지 경영에 도가 튼 나라
였으니......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아시아의 마카오와 고아, 다만, 디우, 동티모르 등 세계 각지에 거점을 건설
하고 식민지 착취를 통해 얻은 지하자원과 농산물 등으로 국부를 축적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식민제국 들과의 충돌이 계속되면서 피해가 누적되자..... 작은 나라 인
포르투갈은 1822년 제국의 중심부 브라질이 독립하면서 국력은 쇠퇴기로 접어
들었으니 본토는 인구도 적고 변변한 사업도 없으며 자원도 없던 포르투갈은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등 남아 있는 해외 식민지 경영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말라위, 짐바브웨, 잠비아를 장악해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육로로 연결
하여 남부 아프리카의 식민지 영토를 추가로 더 늘리려던 영토 확장 계획
마저도..... 잠비아와 말라위, 짐바브웨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영국의 저지로
실패했으며 1910년 제1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식민지는 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1945년 이후 유럽 식민제국들의 지배를 받고있던 해외 식민지들이 하나 둘씩 독립하는
탈식민지화 현상이 대두했지만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놓아준다는 것은 국가 경제의
파탄을 의미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해외 식민지를 독립시킬 수 없었고.... 이들
식민지는 1951년 이후 공식적으로는 해외주로 취급되었으니 식민지 전쟁이 발발한
1961년 까지 원주민은 포르투갈 시민과 법적으로 차별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에게 있어 국가 정체성과 연결된 문제이기도 했으니 포르투갈은 유럽의 1세대
식민제국으로 해외 식민지와 신항로를 개척하고 대항해 시대를 열면서 세계 무대에
등장했는데..... 탈식민지화가 대두되자 유럽은 해외 식민지를 놓아줘야 할 처지에
놓였지만 포르투갈 식민제국의 수호는 정작 본토에서는 좌우파를 넘어선 문제였습니다.
프레이리는 포르투갈의 따뜻한 기후와 켈트족, 로마인, 서고트족, 무어인등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만들어진 독특한 환경이 포르투갈 제국이 타 문화와 인종에 대해 인간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라고 설명했으니..... 포르투갈 제국이 15세기부터 다문화적, 다인종적, 범대륙적
이었다며 포르투갈이 해외 영토를 잃는다는 것은 "포르투갈 국가의 종말" 이라고 주장 했습니다.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교육 받은 현지 원주민이 포르투갈군의 전문직이나
행정부・교육・위생 및 민간기업에서 고위직에 임명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으며
또한 식민시대 초기 부터 포르투갈인과 현지인의 통혼은 일반적인 현상 이었으며,
포르투갈인뿐만 아니라 원주민에게도 초등~중등교육・기술교육 기회가 보장되었습니다.
독립운동과 식민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아프리카인들 중에 포르투갈 유학파 출신이 적지
않았으니 앙골라의 아고스티뉴 네투와 조나스 사빔비, 모잠비크의 사모라 마셸과 조아킹 시사누,
기니비사우의 아밀카르 카브랄 등이 이에 해당하지만 포르투갈 본토도 독재 정권의 우민화정책
문에 문맹률이 40% 에 육박하는 상황이었는데, 식민지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리는 없었습니다.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 최초의 고등 교육기관이 들어선 것은 식민지 전쟁이 발발한 이후 1962년이고
교육기회를 잡아서 출세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특히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문맹률은 80-
90% 를 넘나들 정도였으니 교육을 받지 못한 대다수 원주민들은 여전히 차별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 미소 양대 초강대국은 사상적・경제적・군사적으로 각자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전세계 각지의 반란세력을 후원하였으니.... 포르투갈은 NATO에 가입
했으나, NATO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소련의 위협으로 부터 서유럽을 방어하는 것인 만큼
아프리카 전쟁에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얻어낸다는 살라자르의 구상은 실패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나토 가입으로 식민지 전쟁에서 작전계획의 입안 및 수행을 실시하는 우수한 군인이 육성될
수는 있었는데 그들은 소위 '나토 세대' 로 불려 출세가도를 달리며 군의 고위직을 차지했으나, 이들
중엔 서유럽식 자유주의 사상에 공감한 이가 적지 않았으며 기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은 희박했습니다.
서유럽의 영향을 받은 군부와 독재정권 사이의 단절은 점차 심화되었는데, 1961년의 쿠데타 미수사건
을 파시즘 체제 붕괴의 시작이라 보는 견해도 있으니.... 식민지에서의 분쟁에 대처하기 위해 별도의
독립된 사령부가 설치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육해공 3군의 협조가 결여되게끔 만든 실책으로 평가됩니다.
1950년대 중반 부터 원주민의 독립운동은 격화되었고 1960년대에 들어 무장 게릴라
들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는데..... 주로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고 있었으니 전쟁
기간 중에 포르투갈군과 무장 게릴라 세력은 서로 수많은 잔학행위를 자행하였습니다.
미국은 올뎅 호베르투의 우파 성향 앙골라 인민동맹(UPA) 을 지원하니 1961년 2월 4일, 콩고에 거점을
둔 UPA 게릴라가 국경을 넘어 앙골라 북부에 침공, 형무소를 습격하여 경찰관 7명과 현지인 40명
을 살해한데 이어 3월 15일엔 앙골라 북부를 침공해 농장, 정부 청사, 그리고 시장에 불을 지르고
파괴했으며 백인 1천명과 흑인 6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13년에 걸친 식민지전쟁이 시작됩니다.
UPA 를 후원하고 있던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포르투갈 정부에 조속한 식민지 독립을 요구했고
또한 1961년 4월의 포르투갈 군부 쿠데타 미수사건은 CIA 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는데,
쿠데타는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불발로 끝났지만 살라자르 체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습니다.
미국의 압력과 군부의 반발을 물리친 살라자르는 해외영토를 사수한다는 결의하에 육군장관직을 겸임
했으며, 대규모 증원부대를 아프리카에 파견하였으니 모든 성인 남성은 3년간의 병역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대부분이 식민지에서 싸울수 있도록 소집령이 내려지는 등 군국화 현상이 농후해져 갔습니다.
포르투갈은 다른 열강에 비해 보다 오랫동안 아프리카에 군림해 왔기 때문에, 현지에 강력한 기반
을 구축해 놓고 있었으니 게릴라와의 전투는 시종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포르투갈의 승리가
확정적이자 미국은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서서히 중단해버렸으며 소련도 별 성과를 얻지 못합니다.
개전 당시 앙골라는 중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 무력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게릴라들
이 사회기반시설 파괴 및 민간인 살해등 활동지역에서 혼란을 유발시키자 포르투갈군은 '사회
혼란을 유발시키는 게릴라에 맞서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함께 싸운다' 는 프란시스쿠
고므스 포르투갈 앙골라 주둔군 사령관의 공투(共鬪)전략에 따라 지방 농민을 회유하는데 성공합니다.
동맹국 남아공 백인정부의 지원도 가능해, 순조로운 토벌작전을 수행할수 있었으니 모잠비크 전선 역시
남아공과 로디지아, 그리고 흑인국가였음에도 반공주의에 친남아공, 친로디지아, 친포르투갈 노선을
견지하던 말라위의 지원을 얻은 포르투갈군이 북부 지방에 고립된 게릴라들을 밀어붙이고 있었고
카보베르데나 상투메프린시페는 바다에 고립되어 있는 섬나라인지라 게릴라 활동이 불가능 했습니다.
1970년대 초가 되면 포르투갈의 군사적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지만 포르투갈군의 공세로 게릴라는
대부분 산간벽지로 밀려났고, 앙골라의 모든 도시와 대부분의 농촌을 장악한 포르투갈군이 인종
을 불문하고 주민들을 군사적 위협으 로부터 보호하고 있었으니 후반기에 미국, 프랑스, 영국,
서독, 네덜란드, 이탈리아, 그리스등 서방 국가들도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배를 인정합니다.
남아공, 로디지아, 말라위의 지원을 얻은 포르투갈군에게 게릴라군들이 밀려나가던 모잠비크, 앙골라등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기니비사우에서는 총력전으로 전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으니 중국, 쿠바,
소련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인접국인 세네갈과 기니의 지원을 받은 게릴라가 전세를 역전시켰고 앙골라,
모잠비크에서는 남아공이 포르투갈을 지원해준 것과 달리 기니비사우 전선에서는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포르투갈은 국제사회의 비난에 따른 무기 금수・경제제재에도 대처해야 했으니 무장 게릴라 집단 중에는
앙골라의 MPLA・UNITA・FNLA, 기니비사우의 PAIGC, 모잠비크의 FRELIMO 등이 있었지만,
독립의 성공은 조직의 전과라기 보다는 포르투갈 본국에서 발생한 카네이션혁명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74년 포르투갈 제2공화국 독재정권이 카네이션 혁명으로 붕괴되고, 혁명후 들어선
포르투갈 신정부가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1975년 앙골라는 독립을 쟁취하게 되는데
독립의 기쁨도 잠시, 앙골라는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독립군 단체들 끼리 내전에 휘말리게 됩니다.
1975년부터 2002년까지 앙골라를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 내전은 앙골라에 있던 세 부족의 갈등에 냉전
시기 이데올로기 문제, 앙골라의 자원을 둘러싼 열강들의 개입에서 비롯되니 최초에는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주요 독립군 단체인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 앙골라민족해방전선(FNLA), 앙골라전면
독립연맹(UNITA) 인물들이 골고루 섞인 내각을 구성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내전으로 들어갑니다.
포르투갈군은 초기에 '특수 경보병대' 라 불리는 대 게릴라전에 특화된 특전부대를 투입했으니 페르난두
호블르스 중위가 이끄는 제6중대는 '효과적인' 식민지 게릴라 토벌로 명성이 자자했으니 포르투갈
군은 공세를 펼쳐 UPA 의 앙골라 내 주요 거점인 페드라베르드를 탈환하고 콩고-킨샤사
지역으로 UPA 게릴라를 몰아앴고 루안다 동북쪽의 뎀부스 지역을 점령한 MPLA를 내쫓는데 성공합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61년 6월 안보리 결의 163호를 통과시켰는데, 이 결의는 앙골라를 비자치
지역으로 규정했으며 포르투갈군에 앙골라인에 대한 핍박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으니 미국,
소련, 중화민국을 포함한 9개국이 찬성했으며, 같은 유럽 식민제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기권했습니다.
1962년 3월, UPA의 올뎅 호베르투는 앙골라 민주당과 세력을 합쳐 앙골라 민족해방전선
(FNLA)를 결성했으며 몇주 뒤 앙골라 망명 혁명정부가 구성되었고, 혁명정부는 콩고
민주공화국의 실권자였던 모부투 세세 세코와 이스라엘 정부 그리고 이스라엘과 정치적
으로 적대관계에 있었던 알제리와 튀니지등 일부 아랍국가들로 부터 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은 자이르의 레오폴드빌에서 당 대회를 열고 투쟁에 소극적이인 지도부를
아고스티뉴 네투가 이끄는 급진파로 교체했으니 MPLA는 해방된 앙골라 가치를 사기업의 국영화,
비동맹주의, 모든 식민지의 민족해방 지원 등이라고 천명했고 1965년 쿠바의 체 게바라를 만난
네투는 소련, 동독, 쿠바의 지원을 약속받았고 얼마 되지않아 그들의 자금과 무기 지원을 받았습니다.
1964년, 혁명정부의 외교부 장관이자 FNLA 의 지도자 중 한명인 조나스 사빔비가 FNLA 를
탈퇴하고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ITA)을 결성했는데 사빔비는 호베르투가 FNLA
활동을 구 콩고 왕국의 영역 바깥으로 확장하려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이 많았으니......
초기에 마오주의의 영향을 받은 UNITA는 농촌 해방과 모든 인종의 자주권을 주장했습니다.
포르투갈군은 앙골라 전선에서 승기를 잡았는데, 첫째는 앙골라의 중심부와 이웃 국가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외부 세력이 게릴라를 지원하기 어려웠고 두번째는 저항세력 내부의 갈등이 있으니
세 기둥인 MPLA, FNLA, 그리고 UNITA는 이념 갈등에다가 서로 다른 부족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 세력은 포르투갈에 저항하는 것만큼이나 서로 싸우고 견제하는데 열중했습니다.
앙골라 주둔군 사령관 고므스 장군은 현지인의 민심을 얻는 것이 전쟁 승리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 판단하고 대민작전을 펼쳐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으니 열세에 놓인 게릴라
세력이 사회기반시설 파괴와 학살을 일삼을수록 주민들의 포르투갈에 대한 지지는
더욱 견고해져 갔고 남아공 군대의 지원은 게릴라 세력을 소탕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공수여단, 특수 경보병대 등의 포르투갈 정규군 부대와 식민지 현지인으로 구성된 수많은 친포르투갈
민병대가 게릴라를 상대했고, 현지인들은 대체적으로 포르투갈 식민 정부를 지지했습니다.
2. 기니비사우
서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 에서는 1963년 1월 공산주의 계열의 기니 카보베르데 독립
아프리카당(PAIGC)이 전투를 개시했으며, 쿠바와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소련등
여러 공산주의권 국가들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니
포르투갈의 역사학자들은 기니비사우 전쟁을 '포르투갈의 베트남 전' 이라고 평가합니다.
PAIGC가 잘 훈련되어 있고 무장상태도 좋았으며 이웃 국가 세네갈과 기니에서 상당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며 남아프리카에서 멀리 떨어진지라 남아공등의 지원을 받을수 없었고 정글이 많은 데다가
게릴라 세력에 우호적이었던 이웃 국가들 때문에 포르투갈은 이 전역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포르투갈군은 수도 비사우등 주요 도시와 도로를 지키는 데에만 집중했으며 수도와 일부
해안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이 PAIGC 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1968년, 안토니우
드스피놀라 장군이 포르투갈령 기니비사우의 총독겸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스피놀라 장군은 PAIGC 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개혁과 공작에 착수합니다.
대민 작전이 개시되었고 학교, 병원, 도로, 교통시설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아프리카화' 정책에
따라 식민지 현지인의 포르투갈군 입대가 대규모로 증가했으니 반격에 나선 포르투갈은
스피놀라 장군의 전략에 따라 특수 해병대를 동원, 늪지에서의 기동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황을 점차 개선시켜 갔으니 주도권을 탈환하는 데엔 실패했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둡니다.
1970년 11월, 포르투갈군은 '녹해(綠海) 작전' 을 실행하였으니 작전 목표는 기니 공화국의
세쿠 투레 정권을 전복시키고, PAIGC의 수장 아밀카르 카브랄을 체포하는 한편,
PAIGC의 공병기를 파괴하고, 포르투갈군 포로를 구출한다는 것이었는데 특수부대가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를 공격, 카브랄 체포엔 실패하였으나 포로 구출과 선박 파괴엔 성공합니다.
포르투갈군의 기니 공격에 충격을 받은 나이지리아와 알제리는 기니에 대한 원조를 늘렸으며,
소련도 서아프리카 연안 경호를 명목으로 전함을 파견했으니 포르투갈의 또다른
공격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는데 1968년부터 72년까지 포르투갈군은 공세를 강화, PAIGC의
거점들을 차례로 공략했으며 동시에 반군에 대한 공작에 착수하여 PAIGC의 분열을 도모합니다.
이 전략은 73년 1월에 카브랄이 암살당함으로써 결실을 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PAIGC
는 소련과 쿠바, 체코, 중국 등 공산주의권 국가들의 든든한 군사 지원을 배경으로
전력 소모를 보충할 수 있었으니 소련의 Il-14 폭격기와 스트렐라 대공 미사일 지원
으로 포르투갈 공군의 작전은 심각하게 제한되었으며 포르투갈의 제공권이 위협받았습니다.
기니비사우 전선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 독립 전쟁의 전선들 중 포르투갈군이 가장 고전한
곳이었으며, 그만큼 피해도 컸는데 남아공의 지원으로 포르투갈군이 전선에서 우위를 차지하며
정세가 안정되어 있던 앙골라・모잠비크 등과 달리, 경제적・사회적으로도 침체를 면치 못했습니다.
3. 모잠비크
모잠비크에서는 1964년 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민족주의/공산주의 성향의 식민지 독립운동
게릴라 저항 조직인 모잠비크 해방 전선, 약칭 '프렐리무'(FRELIMO)가 포르투갈군과의
식민지 독립전쟁을 주도했으니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중부의 잠베지강 유역까지 전쟁이 확산됩니다.
모잠비크 주둔 포르투갈군 병력이 소수인지라 프렐리무가 1960년대 까지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니
전쟁중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비롯 중국, 소련, 쿠바,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등 여러 공산권 국가와
당시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맹주였던 이집트의 지원을 받으며 전선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포르투갈군은 잠비아・말라위와의 국경을 봉쇄하여 양면에서 프렐리무를 압박한다는 전략을
세웠으며 모잠비크와 인접해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 등 남부 아프리카의 백인
통치 국가들과 흑인 국가였음에도 친포르투갈 성향이 강했던 말라위도 프렐리무와 싸우던
포르투갈을 지지하면서 모잠비크에서 포르투갈군과 프렐리무군의 전쟁은 국제 대리전으로 확대됩니다.
그리고 카울자 드 아히아가 모잠비크 주둔 포르투갈군 준장 지휘하에 1970년 6월, 북부지방에 산재한
프렐리무 기지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고르디우스의 매듭 작전' 이 개시되었으니 작전의 결과,
프렐리무는 와해 직전 상황까지 몰린 반면 모잠비크 전선에서도 포르투갈의 주도권 장악이 확정됩니다.
앙골라와 마찬가지로 모잠비크에서도 현지인이 중용되었으며, 현지인 지원자로 구성된 특수작전부대가
운용되기도 했으니 포르투갈 제국은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위한 근대화 작업에 착수해 새로운 도로,
철도망, 다리, 관개시설, 학교, 그리고 병원들이 모잠비크에 건설되었고 또한 카오라바사 댐 건설을
시작했으니 포르투갈이 현지인들에게 약속한 '문명화'가 진행 중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요소였습니다.
테테주의 카오라바사 댐 건설에는 모잠비크 주둔 포르투갈군 병력의 절반이 투입되었으며 이곳은
프렐리무의 주요 공격 목표였으나 공격은 번번히 실패로 끝났고 전쟁기간을 통틀어 프렐리무
가 도시를 공격하여 성공한 것은 단 한차례뿐이었으니 1973년까지 포르투갈군은
북부의 프렐리무 점거지들을 제외한 영토의 대부분을 수복하며 승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잠비크 전선에서 눈부신 전과를 거둔 아히아가 준장은 74년초 갑자기 경질되는데
정황상 카에타누 수상이 '쿠데타 방지' 를 위해 내린 조치였을 가능성이 높으니
카에타누 정부는 아히아가 준장이 해외 식민지를 수호하고 포르투갈 좌파
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한 보수-우파 성격의 쿠데타를 조직하려 했다고 의심했습니다.
1972년, 1966년에 시작되 앙골라 동부 전선의 전투는 1972년 들어 포르투갈의 승리로
끝났으니 네투를 위시한 MPLA 수뇌부는 해외로 도주했으며 남아 있던 MPLA
잔당은 분열되었고 소련은 MPLA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중단했으며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 MPLA 대신 FNLA를 지원하라 종용합니다.
1973년 모잠비크의 FRELIMO 세력은 대부분 변두리 지역으로 후퇴했으며,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온건파가 쫓겨나고 강경파인 사모라 마셸이 FRELIMO의 주도권을 쥐게 되니 게릴라 세력은
시민들의 포르투갈 정부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기 위해 민간인 거주지에 대인지뢰를
매설했으며 포르투갈 이주자들은 리스본의 카에타누 정부에 전쟁을 빨리 끝내라고 항의합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게릴라 세력이 지탄받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 FRELIMO가 포르투갈군과의
전면전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세력이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포르투갈군이 개시한 고르디우스 매듭 작전의 대성공과 1972년에
이루어진 테테주에 대한 FRELIMO의 공세작전 패전으로 모잠비크 전역은 안정되기 시작합니다.
1973년까지 포르투갈은 기니비사우를 제외한 나머지 식민지를 평정하는데 일단 성공했으니
1974년에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게릴라 활동은 남아공과 로디지아의 지원을 받는
포르투갈군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시골과 변두리 지역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기니비사우에서만 이웃 기니 공화국과 세네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게릴라가 수도 비사우와 일부
포르투갈군 점령지역을 제외한 기니비사우 영토 전역을 석권하는등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포르투갈 정부는 기니비사우 전선에서의 패배를 인정했지만 전투를 포기하는 것은 다른
두 지역 게릴라들의 세를 불려주는 것으로 여겨졌기에 기니비사우 전선에서의 전쟁을 이어갑니다.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내부 게릴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앙골라, 모잠비크, 그리고 포르투갈의
경제는 매년 성장하고 있었으니 1960년대부터 그동안 낙후되어 있었던 앙골라에선 유례가 없는
경제성장이 계속되었고 포르투갈 정부는 도시화되고 잘 개발된 해안지방과 낙후된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건설했고 메트로폴르라 불리는 유럽계 포르투갈인 이민자들이 아프리카
식민지로 몰려들어 앙골라의 유럽인 인구는 1944년 4만 명에서 1974년엔 40만 명까지 늘어납니다.
그러나 장기간 지속된 식민지 전쟁으로 국가경제는 파산 직전이었고 국민들 사이에선
반전 사상이 퍼져나갔으니 1970년대에 들어서는 게릴라 활동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이 감행되었고, 국가 예산의 44% 가 군비로 지출되었으며
모든 남성은 군대에서 3년 이상에 최소 2년 이상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복무해야 했습니다.
징병에 반대한 많은 포르투갈 젊은이들이 해외로 탈출했고 포르투갈군은 식민지 현지인
들을 징집하기 시작했으며 전쟁이 시작한 1961년 식민지 흑인들이 포르투갈군
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74년
4월에는 50% 를 넘어섰으며 전쟁 말기에는 초급 장교로 진급한 흑인도 많아집니다.
포르투갈의 카에타누 총리는 기니비사우의 PAIGC 게릴라와 협상을 개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스피놀라 장군을 경질했는데 사람들이 스피놀라 장군을 전쟁 영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카에타누
총리의 결정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나 포르투갈군이 기니비사우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포르투갈의 승리가 확정적이라고 믿었습니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와 영국, 서독, 프랑스 등 서방 주요 강대국들은 포르투갈 식민 제국이 마지막
까지 게릴라들을 진압하며 살아남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니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승리가
포르투갈 국내 여론분열을 해소할 것이라고 믿었으며 식민지 무장 게릴라 지원으로는 전쟁
을 이길수 없다고 판단한 소련과 공산 진영은 국제무대에서 포르투갈을 고립시키는 데 집중합니다.
1964년 4월, 포르투갈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민주사회 행동위원회는 식민지 문제가 전쟁보다는
정치적 협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1966년, 사회주의자 정치인 마리우 소아르스는
범국민적 합의를 거친 국민투표를 통해 포르투갈 해외 영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상황이 달라졌으니 반전운동이 대학가에서 확산되었고 이스타두 노부 체제
를 비방하는 선전물이 곳곳에 붙여졌으며 무장혁명행동이나 혁명여단 같은 좌파 무장테러
단체가 조직되어 군 시설에 대한 테러와 사보타주를 감행했고 오에이라스에 있는 NATO
사령부가 공격당했으며 탕쿠스 공군기지가 공격받아 군용 헬리콥터가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카에타누 정부는 여론을 돌리기 위해 재정 정상화를 위한 군 예산의 삭감과 함께 개혁 조치를 발표
하자 많은 장교들에게 불만을 샀는데, 출신환경이 좋지 않았던 젊은 장교단이 크게 반발했으니
동시기에 소련의 영향을 받은 포르투갈 국내 좌익세력이 군부 내부까지 침투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이스타두 노부 체제에 불만이 많은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군부 쿠데타
를 통한 카에타누 정부 전복과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신체제 건설이 논의되기 시작 합니다.
1974년 4월 25일 새벽, 좌익계열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된 '국군 운동' 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리스본
과 포르투갈 전국의 전략 요충지를 점령했는데 초기에는 일부 병력만이 쿠데타 세력에 동조했으나
점차 그 세가 불어났으며..... 정부에 충성하는 부대는 병력을 출동시키길 꺼리자 카에타누 총리는
투항하고 쿠데타 세력에 추대된 스피놀라 장군에게 권력을 이양하니 '카네이션 혁명' 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쟁과 전시 체제에 지친 리스본 시민들은 군인들의 궐기에 환호했으며 좌파 장교들이 중심이 된
임시정부는 해외 식민지들을 모두 포기하기로 결의하자, 포르투갈 군대와 관료들이 식민지
를 포기하고 떠났으며...... 해외에 나가있던 수십만의 포르투갈 노동자들, 소상공인들,
그리고 농부들도 포르투갈로 귀국했는데 포르투갈 본토 사람들은 이들을 '귀환자' 라고 불렀습니다.
카네이션 혁명에 의한 혼란은 식민지 주민과 군 관계자의 대규모 탈출을 초래하였으니 최대의
식민지인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백인과 흑인을 불문하고 "총 1백만명" 이상의 주민이
떠났는데, 이 일련의 대탈주는 역사상 평시에 행해진 집단 이주 가운데서도 최대 규모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