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임오교변 80주년을 맞아 출간된 단행본 한 권.
제목은 '임오교변 - 대종교 탄압과 박해'
80년 전 일제가 단 하루 만에 21명의 대종교 지도자를 만주와 국내 각지에서 동시 체포한 그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책이다.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종교 박해였음에도,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왜 일제는 마지막까지, 그토록 집요하게 대종교를 지우려 했을까.
단순히 반일운동을 했기 때문이라면, 설명이 부족하다. 3·1운동에 참가한 수많은 종교 단체가 있었고, 만주에서 총을 들었던 무장 독립군도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패망 직전까지 가장 집요하게 추적한 집단은 대종교였다. 그 이유는 무장 세력이라서가 아니었다. 정체성의 문제였다.
신교(神敎)와 신도(神道), 뿌리를 둘러싼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대종교를 1909년 중광(重光)한 홍암 나철은 일본의 신도(神道)를 조선 고유의 신교(神敎)의 아류로 단정했다. 단순한 주장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 총리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일본 신사의 삼보한궤(三寶韓几)와 궁내성의 오십한신(五十韓神)이 모두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라는 내용을 명시했다. 일본 정체성의 뿌리 자체가 조선 신교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일제로서는 이것이 종교적 불편함을 넘어 국가 정체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일본은 당시 신도를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다.
이른바 국가신도(國家神道).
해외 식민지에 신사(神社)를 세우는 행위는 "일본의 신이 강림하는 영토"를 물리적으로 확장하는 의식이었다. 신사 건립은 종교 침략이었고, 그것의 정점은 조선의 국교를 신도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종교는 그 신도의 원조를 자처했다. 더 정확히는, 신도가 조선 신교를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허용한다는 것은 일제의 식민 지배 정당성 전체가 흔들리는 일이었다. 대종교와 신도의 충돌은 단순한 종교 갈등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 이 땅의 원래 주인인가를 다투는 싸움이었다.
대종교는 1909년 교단을 세운 직후부터 일제 통감부 경시청의 감시를 받았다.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일제는 대종교 해산을 논의했다.
당시 일본 잡지 '태양(太陽)'이 '손에 촌철도 없는 교인들을 굳이 지금 강제 해산하면 종교 탄압이라는 원망을 살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일단 유예되었을 뿐, 감시는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1915년이 결정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하면서 조선의 공인 종교를 신도·불교·기독교 세 가지로 한정했다. 대종교는 '유사종교단체'로 분류되었다.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 공식 선언이었고, 그 순간부터 대종교의 국내 활동은 사실상 불법이 되었다.
이후 대종교인들은 고정 교당도 없이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집회를 가졌다. 교사(敎師) 원고가 압수되고, 집회가 해산되고, 교인 명단이 경찰에 넘어갔다.
1920년대 한 대종교인의 회고가 당시 분위기를 잘 전한다.
"피가 뛰고 이가 갈리는" 핍박 속에서 대종교에 다니기를 포기했다는 고백이었다.
1914년 나철은 대종교 총본사 자체를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옮겼다. 일제강점기 종교 단체 중 유일한 해외 망명이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었다. 만주는 대종교에게 종교적 원류의 땅이었다. 백두산 자락, 고조선과 부여의 활동 무대. 나철에게 그 땅은 돌아가야 할 성지였다.
만주로 옮긴 대종교는 빠르게 성장했다. 1912년 10월 개천절 행사에는 700여 명이 모였고, 나철의 포교 13개월 만에 500호의 신자가 한 번에 입교하기도 했다.
그 힘이 곧 무장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1911년 서일이 중심이 된 중광단(重光團), 이후 대한정의단을 거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한 조직은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이 조직의 핵심은 대종교인들이었다.
1918년 대종교 2세 교주 김교헌이 주도한 '대한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서)에는 39인의 서명이 담겼다. 몇 명을 제외한 전원이 대종교인이었다. 이 선언은 이후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의 기폭제가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대종교인들이 깊숙이 참여했다.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박찬익, 조완구, 조성환 등 임정의 핵심 인사 37명 이상이 대종교와 연결되었다.
1926년, 길림성장 장쭤샹(張作相)은 만주 지역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내렸다. 대종교총본사는 만주 각지를 전전하며 은둔해야 했다. 교단의 체계는 무너졌고, 연락망은 끊어졌으며, 기록들이 사라졌다. 1929년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3년간의 공백은 교단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남겼다.
3세 교주 윤세복은 1934년 일본 관동군 특무기관과 협상해 '순수한 종교 활동'이라는 조건으로 포교 허가를 받았다. 이것이 일제의 함정이었다. 포교 허가는 대종교 지도자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한꺼번에 검거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대종교 내부에서도 나중에 "일대 착오"라는 비판이 나왔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임오교변 - 1942년 11월 19일>
1942년 여름, 윤세복이 이극로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빌미가 되었다. 봉투 안에는 '널리 펴는 말'이라는 원고가 들어 있었다. 원고 끝부분에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일제 검열관은 이 문장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날조해 '조선독립선언서'라고 규정했다.
1942년 11월 19일. 일제는 치안유지법 위반을 명목으로 만주와 국내 각처에서 윤세복을 포함한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동시에 체포했다. 같은 날, 국내에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한글학자들이 일제히 검거되었다.
두 사건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조선어학회는 대종교 정신으로 무장한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신명균 등 조선어학회 핵심 인물들은 모두 대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민족 언어를 지키는 일과 민족 정신을 지키는 일은 대종교 안에서 하나였다.
일제의 기소장은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함으로부터 조선민족정신을 배양하며, 조선민족의 결합을 도모하고 조선독립의 의식을 앙양하며…궁극에서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제국 통치권의 지배를 이탈시켜 독립국으로 하고, 또 그 독립형태를 이상국가인 배달국을 지상에 재건을 목적으로 한 단체'라는 것이 기소 이유였다. 범죄가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4개월이 넘는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부산 백산상회를 운영하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백산 안희제는 병보석으로 풀려난 다음 날 숨졌다.
나철의 장남 나정련은 액하감옥에서 고문 끝에 사망했다. 차남 나정문도 병보석 출옥 직후 숨졌다. 권상익, 이정, 김서종, 강철구, 오근태, 이창언, 이재유. 열 명이 고문과 옥중 병사로 목숨을 잃었다.
대종교는 이 열 사람을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 부르며 추모한다. 살아남은 간부들은 교주 윤세복의 무기징역을 포함해 7년에서 15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이 감옥에서 걸어나온 것은 1945년 8월, 해방 며칠 전이었다.
그때 일제는 대종교 총본사 소장 신간서적 2만여 권, 구존 서적 3천여 권, 각종 도서 문서 6백여 종을 모두 압수해갔다. 교리와 교사를 담은 기록물 대부분이 사라졌다.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었다. 기억을 지우려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 기반을 잃은 상태에서, 분단이 덮쳤다. 남북 모두에서 밀려났다. 북쪽의 유물사관은 대종교의 역사를 신비주의 환상으로 매도했고, 남쪽에서는 친일의 대가로 온존된 종교·문화 기득권 속에서 대종교가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대종교가 남긴 것들은 오히려 살아남아 다른 이름으로 제도화되었다.
단기(檀紀)연호,
개천절 국경일,
홍익인간 교육이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이것들이 공식 제도로 채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종교 지도자들이 직접 움직인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집단의 이름은 점점 지워졌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단기연호가 폐지되었다. 개천절은 형식적 공휴일로 바뀌었고, 홍익인간은 교과서 첫 줄의 장식 문구가 되었다.
경제성장제일주의가 밀어닥쳤다. 마을 공동제, 사당, 민속 신앙들이 미신으로 분류되어 사라졌다. 대종교의 잔영들이 하나씩 지워져갔다.
2024년 학계에서 발표된 대종교 연구 논문은 이렇게 지적한다.
대종교 연구가 오랫동안 표면적 독립운동에만 집중해왔으며, 그 저변의 정체성 충돌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고.
일제가 대종교를 끝까지 없애려 한 이유는 독립운동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대종교의 등장이 조선의 국시(國是)·국전(國典)·국교(國敎)·국어·국사 전체의 부활을 의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쪽에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정점으로 한 신도 국교화 정책이 있었다.
다른 한 쪽에는 단군을 민족의 원류로 삼은 신교(神敎)의 부활이 있었다. 두 종교가 같은 땅 위에 설 수는 없었다. 일제는 그것을 처음부터 알았다.
그래서 1909년부터 1945년까지, 36년 내내 지웠다. 포교 금지, 유사종교 분류, 밀정 침투, 만주 군벌과의 협정, 치안유지법 적용, 대량 체포, 고문, 기록 압수. 수단을 바꿔가며 집요하게.
일제가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 지운 것이 있다면, 거기에 무언가 있었다는 뜻이다.
단군이라는 이름,
홍익인간이라는 말,
개천절이라는 날,
신교라는 정신.
그것들이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왜 지워지려 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남았느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