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삼국지 350
(소설삼국지)
제3권 적벽대전
제39장 적벽대전
5) 남군(南郡) 쟁탈전
손권은 동오로 돌아왔다. 유비와 주유는 남군을 빼앗으러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군해 조인 등과 싸웠다. 조조가 격파되어 도주하자 노숙은 즉시 먼저 돌아와 손권에게 승전보를 올렸다.
손권은 여러 장수들을 대대적으로 불러들여 노숙을 영접하게 했다. 노숙이 전각에 들어와 막 절을 올리려고 하자 손권이 벌떡 일어나 먼저 예의를 갖추었다. 손권이 노숙을 보고 말했다.
“자경(子敬). 내가 안장을 짚고 말에서 내려 영접한다면 경을 충분히 높이는데 부족하다 할 수 있겠소?”
노숙이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말했다.
“충분치 못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경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노숙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서서히 채찍을 들고 말했다.
“원컨대 지존(至尊)께서는 위엄과 덕망이 사해(四海)에 더해지게 하십시오. 구주(九州)를 총괄하고 제업을 성취하시고 나서 다시 좋은 수레를 보내어 저를 초빙하신다면 비로소 저를 높이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손권이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적벽대전은 북방을 평정한 기세로 천하통일을 이루려던 조조의 야심을 좌절시킨 일대의 사건이었다. 또 조조로 대표되는 구세대와 손권으로 대표되는 신세대 간의 세대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이 때 구세대의 일원인 유비도 싸움의 선봉에 서서 싸웠지만 실질적으로 유비, 손권 연합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주인공들은 손권, 주유, 노숙, 제갈량 등이었다.
이 해 조조의 나이는 오십 사세, 유비는 사십 팔세였으나 손권은 이십 칠세, 제갈량은 이십 팔세, 주유와 노숙은 둘 다 삼십 사세였다. 이는 삼국지의 혼란상황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조조는 이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 북방으로 돌아간 조조는 적벽대전을 계기로 근본적인 방향을 수정했다. 조조는 선 천하통일 후 신질서 수립의 꿈을 접고 새로운 정치질서 성립에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했다.
건안14년(209년) 정월, 유비와 주유 등이 다시 추격해 남군에 이르렀다. 남군의 중심은 강릉이었다. 조조는 북쪽으로 돌아가면서 조인을 정남장군(征南將軍)에 임명해 강릉에 머물러 주둔하면서 오(吳) 나라 장수 주유와 유비를 막게 했다. 서황이 남아 조인을 도왔다. 주유군에는 정보, 한당, 주태, 여몽, 감녕, 능통 등 신구의 쟁쟁한 맹장들이 다 종군했다. 유비 또한 당양 장판 싸움에서 용명을 떨친 관우, 장비, 조운을 다 거느리고 왔다. 병력이 도합 수만 명에 이르렀다.
먼저 주유와 정보가 이끄는 동오의 군대가 강릉에 이르렀다. 강릉은 장강 북쪽 기슭에 위치했다. 주유는 먼저 장강 남쪽에 본진을 차리고 수천 명의 병사를 선발해 강을 건너 강릉을 공격하게 했다.
주유의 선봉부대 수천 명이 강릉성으로 다가오자 조인이 강릉성 위에 올라 바라보고는 곧 삼백 명의 병사를 모아 부곡장 우금(牛金)에게 거느리고 나가 적에게 도전하게 했다. 동오군의 수가 많았고 우금의 병력이 적었으므로 바로 적에게 포위되었다. 장사(長史) 진교(陳矯) 등 조인의 참모들이 함께 성위에 있다가 우금의 병력이 포위되어 곧 전멸 당하게 된 것을 보고는 다 얼굴빛이 변했다. 오직 조인만이 몹시 화를 내면서 강한 기상을 보였다. 즉시 좌우 사람들에 명해 말을 내어오라 했다. 진교 등이 모두 조인에게 매달려 붙잡으면서 말했다.
“적의 병력이 매우 강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설사 수백 명의 병력을 포기한다고 해서 얼마나 고통이 있겠습니까? 장군이 직접 나설 일이 아닙니다!”
조인은 대꾸도 하지 않고 갑옷을 입고 말을 탄 후 휘하의 장사 수십 기만을 거느리고 성을 나갔다. 적과 백여 보 떨어진 곳에 해자가 가로 막고 있었다. 진교 등은 처음 조인이 당연히 해자 위에 머물러서 우금을 위해 지원하는 형세만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조인은 바로 해자를 건너 곧장 앞으로 돌진해 적군 속으로 뛰어 들어가 우금 등을 구출했다.
성으로 돌아온 조인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병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인은 바로 다시 돌아서서 돌격해 나머지 병사들도 다 구출해 내었다. 조인의 병사 중 죽은 병사는 불과 몇 명뿐이었나 적의 병력은 패퇴했다.
진교 등이 처음 조인이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일을 그르칠까 봐 다 두려워했으나 마침내 조인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다 감탄하면 말했다.
“장군은 진정 하늘이 내린 사람입니다!”
삼군은 그의 용맹에 감복했다. 조인의 군대는 사기가 치솟았다. 주유군은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강릉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다시 군대를 물려 강남으로 돌아갔다.
장강을 사이에 두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감녕이 먼저 지름길로 이릉(夷陵)을 취하자는 계책을 건의했다. 이릉은 장강 북쪽에 있었다. 조인이 전 병력을 강릉에 집결해 수비하고 있었으므로 이릉의 수비는 허술했다. 이릉을 점령하면 강릉과 북방과의 연락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리되면 조인은 꼼짝없이 강릉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주유는 감녕의 의견에 선뜻 동의하고 그에게 가서 이릉을 점령하게 했다. 감녕은 자신의 휘하 병력 수백 명만을 거느리고 이릉을 공격하러 갔다. 이릉을 수비하던 장수가 도망쳤으므로 감녕은 가는 즉시 이릉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곧 입성해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조인은 이릉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자 곧 오륙천 명의 보기병을 보내 이릉성을 탈환토록 했다. 조인이 보낸 병사들은 이릉을 겹겹이 포위했다. 그때 감녕의 휘하에는 원래 거느리고 온 수백 명의 병사와 아울러 이릉에서 새로 얻은 병사들 천 명 정도가 있었다.
조인의 군대가 며칠 동안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댔다. 높은 누각을 설치해 성안으로 비 오듯 화살을 쏘아댔다. 감녕의 병사들이 다 두려워했으나 오로지 감녕 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자약하게 담소했다. 다만 병력이 적어 위급한 상황이었으므로 주유에게 사자를 보내어 원병을 요청했다.
이 무렵 조인의 휘하에는 유장이 조조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했던 익주(益州)의 장수 습숙(襲肅)의 군대도 있었다. 습숙은 조조가 적벽에서 패해 북방으로 돌아가고 동오의 군대에 의해 차단되어 고립되자 병사를 거느리고 여몽에게 투항했다. 여몽이 그를 포위하고 적극적으로 회유했기 때문이었다.
주유는 손권에게 표를 올려 습숙의 병사들을 여몽에게 보태주려 했으나 여몽은 극구 사양하고 습숙이 담력이 있다고 칭찬하면서 그를 임용할 것을 주장했다. 여몽의 주장은 습숙이 멀리서 동오를 사모해 찾아왔으므로 그 의로움을 높이 북돋워 주어야지 병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손권이 여몽의 말을 듣고 습숙에게 병사들을 돌려주고 장수로 삼았다.
감녕이 사자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자 여러 장수들이 병력이 적으므로 부대를 둘로 나눌 수 없다는 이유로 원병을 파견하는 것을 반대했다. 여몽이 주유와 정보에게 말했다.
“능공적(凌公績)을 본진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두분 장군과 이 여몽이 함께 구원하러 가면 포위를 풀고 감녕의 위급함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남은 병력이 오래 버티기는 어렵겠으나 능공적이 능히 십일은 버틸 능력이 있음을 이 여몽이 보장합니다.”
주유가 여몽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병력의 반을 나누어 능통에게 주어 본진을 고수해 조인의 공격을 막아내게 하고 나머지 병력은 주유, 정보, 여몽 등 여러 장수들이 거느리고 일제히 감녕을 구원하러 출동했다.
가는 도중에 여몽이 또 주유를 설득해 삼백 명의 병사를 별도로 나누어 파견해 조인이 보낸 군대가 패해 달아날 것으로 예상되는 험한 길목에 통나무를 베어 방책을 쳐 두게 했다. 적이 도주하면 그들의 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주유가 그의 말을 따랐다.
주유 등이 이끄는 구원병이 이릉에 도착해 당일 즉시 교전해 이릉을 포위하고 있던 조인의 군대를 과반수 넘게 죽였다. 조인의 남은 군대는 야음을 틈타 도주하다가 통나무 울타리를 만나게 되자 기병들은 다 말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났다. 주유의 병사들이 추격하다가 들이닥쳐 공격해 말 삼백 필을 얻고 즉시 배에 태워 돌아왔다. 강남에는 좋은 전마가 많지 않았다. 이리하여 주유군의 기병대가 배가되었다.
주유가 이끄는 동오의 군대는 바로 강을 건너 조인이 지키는 강릉을 포위했다. 주유와 조인은 서로 날짜를 정하고 군대를 내어 크게 싸웠다. 주유가 친히 말을 타고 상대방의 진을 향해 돌격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어깨를 맞았다. 상처가 매우 심했으므로 바로 돌아왔다.
다음 날 조인이 주유가 누워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병사를 재촉해 주유의 진영을 공격했다. 주유가 바로 침상에서 일어나 군영을 다니며 안정시키고 군리와 병사들을 격려해 사기를 북돋웠다. 동오군이 다시 사기가 크게 일어나 조인군이 패퇴했다.
주유와 조인이 해를 넘기며 서로 대치해 싸웠다. 양쪽 모두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이 사생결단하고 형주의 패권을 놓고 싸웠다. 양쪽 모두 죽고 상한 병사가 매우 많았다. 싸움이 장기화되자 조인군이 불리했다. 주유군은 강을 따라 병력과 물자의 보급이 끊이지 않는데 반하여 조인군은 강북이 차단되어 아무런 외부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조인이 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유가 강릉성에 입성하자 드디어 남군을 점거하고 형주를 위압하고 어루만져 평정했다. 조인은 비록 패주했지만 조조는 그가 고립된 상황에서 오래 동안 잘 지켜낸 것을 장하게 여겨 안평정후(安平亭侯)로 작위를 높여 주었다.
한편 유비는 강릉에서 유비와 함께 조인을 공격하면서 관우를 보내 장강 북쪽의 형주 땅을 공략했다. 임저(臨沮) 현에는 두보(杜普), 정양(旌陽) 현에는 양대(梁大)를 보내는 등 남군의 여러 현에 별도로 관리들을 보내 현장에 임명했다. 관우는 별도로 군대를 이끌고 양양을 공략하러 나섰다.
이 때 양양에는 악진이 머물러 수비하고 있었고, 당양에는 만총이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했다. 원래 만총은 여남태수가 되어 원소에게 호응해 봉기한 도적들을 토벌한 후 여남에 주둔하고 있다가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때 일군을 이끌고 종군했다. 조조가 적벽에서 패해 돌아가면서 만총을 분위장군(奮威將軍)에 임명해 당양(當陽)에 주둔시켜 양양과 강릉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겼다.
조인이 조조의 승낙을 받아 강릉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하자 관우가 이를 차단해 격멸하고자 했다. 관우는 수륙군을 거느리고 한진(漢津)으로 북상했다. 그는 당양에서 조인군을 맞아 격파한 후 그 여세를 몰아 양양까지 진격할 계획이었다. 주유는 황조의 장수였다가 항복한 소비(蘇非)를 보내어 관우를 지원하게 했다.
조조가 악진과 만총에게 명을 내려 관우를 요격하고 조인의 퇴로를 확보하게 했다. 또 한편으로는 새로 임명한 강하태수 문빙과 여남태수 이통에게 각각 병력을 이끌고 가서 지원하게 했다.
이통은 양안도위로 있으면서 회(淮水)와 여수(汝水) 사이의 지역을 평정하고 나서 만총의 뒤를 이어 여남태수(汝南太守)가 되었다. 이통은 여남태수로 있으면서 군내의 장적 등이 이끄는 도적 오천여 호를 도산(桃山)에서 공격해 크게 무찔렀다.
관우는 조인군의 퇴로를 미리 차단하고 녹각을 설치해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악진과 만총은 이통의 부대와 합류하여 북쪽에서 관우군을 공격했다. 조인은 서황에게 정예병을 주어 선봉에 나서서 관우의 군진을 돌파하게 했다. 앞뒤로 적군을 맞은 관우군이 크게 불리했다.
이 때 조조군에서는 이통이 선봉에 서서 공격했다. 이통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공격을 가하면서 직접 말에서 내려 녹각들을 뽑아내고 전진했다. 한편 싸우면서 또 한편으론 전진해 포위를 뚫고 조인의 군대를 맞아들였다. 이통의 용맹이 여러 장수들 주에 으뜸이었다.
이 싸움에서 이통은 심한 부상을 입었다. 결국 돌아오는 길에 부상을 치료하다가 죽었다. 그 때 이통의 나이 사십 이세였다. 조조는 그에게 식읍 이백호를 추증하여 전의 것과 합해 사백호가 되게 해 주었다.
한편 강하태수 문빙은 별도로 관우의 후방을 지키고 있던 소비(蘇非)를 심구(尋口)에서 공격해 패주시켰다. 소비는 이 싸움에서 죽었다. 이어서 문빙은 악진, 만총 등과 합류해 패주하는 관우를 추격해 한진(漢津)에서 관우의 치중을 공격하고 형성(荊城)에서 관우의 선단을 불태웠다. 문빙은 이 공으로 연수정후(延壽亭侯)로 높여서 봉해지고 토역장군(討逆將軍)의 벼슬이 더해졌다.
악진 등이 관우를 패퇴시키자 그 때까지 조조에게 귀순하지 않고 있던 남군의 여러 산골짜기의 만이(蠻夷)들이 다 양양으로 악진을 찾아와 항복했다. 악진은 또 유비가 임명한 임저현장 두보, 정양현장 양대 등을 다 크게 격파했다.
만총은 그 후 손권이 동쪽 변방을 여러 번 침입하자 다시 조정의 명을 받고 여남태수에 복귀했다. 만총은 한진 싸움의 공으로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