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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한 섬진강은 아름다운 풍경화가 되고 굽이굽이 강물 적신 대지엔 가을 풍요로움 가득 걸음걸음 풍경에 취하고 푸근한 인심에 반하고
얽매이지마, 느낀데로 발길 닿는데로 가는 거야…그것이 인생이라고.” 바람재에서 능선을 벗어나 임도를 따라 율동마을로 내려간다. 하동읍을 출발한 후 만나는 첫 마을인 율동마을은 야트막한 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포근하다. 들판너머로 하동군 적량면 소재지가 바라보인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율동마을과 관동마을을 연결하는 길이자 농사를 짓기 위해서 통행하는 농로다. 학생들은 적량면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기 위해 걸어야 했던 등굣길이기도 하다. 대체로 산골마을이 그렇듯이 길게 뻗어 내린 양쪽 산줄기 가운데에 논이 있고, 산자락에 관동마을·원우마을·상우마을·서당마을 등 여러 마을이 들판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다. 푸른 논에는 벼들이 피어 올 가을 풍년을 예고한다. 풍요로운 들판 너머로 바라보이는 마을에서 넉넉한 기운이 느껴진다. 우계저수지에서 내려오는 개천을 건너 서당마을로 가는데, 350년 된 이팝나무가 일행을 맞이한다. 높이 8.6m, 둘레 3.5m에 이르는 이팝나무는 서당마을의 당산나무 역할을 하고 있다. 이팝나무는 5월에 꽃이 피면 나무에 흰 눈이 덮인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 이팝나무는 꽃잎이 흰 쌀밥 같이 생겨서 이밥나무라고 부르다가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포장도로는 우계저수지 오른쪽으로 이어지고 둘레길은 저수지 둑을 건너 반대편 산자락 밭둑길을 따른다. 우계저수지를 지나자 골짜기는 조금씩 좁아지고 농경지는 층계를 이룬다. 다랑이논의 일종인 갓논이라 불리는 작은 논들이 경사지고 비탈진 언덕에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갓으로 덮어질 정도로 작은 논이라는 의미에서 갓논이라 했다. 경사지에 논을 일구면서 크기가 다른 돌을 짜 맞추어 2-5m 높이로 쌓은 돌 축대와 층계를 이룬 갓논들은 농민들의 건강한 생존의지가 만들어낸 예술품이다. 신촌마을을 지나 농로를 따르다가 임도로 접어든다. 솔숲 향기 그윽한 임도를 돌고 돌아 신촌재로 고도를 높여간다.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걷고 또 걸으며 걷기수행을 한다. 내려 보이는 우계저수지와 논경지가 여러 마을과 어울린 풍광이 그 동안 흘린 땀방울을 보상해준다. 구재봉과 분지봉 사이에 있는 신촌재(460m)에 올라선다. 칠성봉과 구재봉을 지난 산줄기가 이곳 신촌재와 분지봉을 거쳐 하동읍까지 이어간다. 먹점마을은 온통 매화천지다. 그래서 먹점마을을 하동의 매화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2004년부터는 먹점마을에서 매년 ‘산골매화꽃축제한마당’을 열고 있다. 먹점마을은 검은 흙이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구재봉 남서쪽 해발 400-500m 고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구재봉에서 양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먹점마을을 감싸고, 좁게 트인 골짜기 사이로 백운산에서 억불봉까지 이어지는 백운산 능선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어느 매실농원 앞을 지나는데 주인인 노부부께서 우리 일행을 불러 시원한 매실차 한 잔씩을 대접한다. 후덕한 인심에 지친 몸에 힘이 솟아난다. 먹점재(474m)를 넘어서서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더 이상 발을 떼지 못한다. 산자락을 굽이굽이 돌면서 흘러오는 섬진강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아버린 것이다.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유유히 흘러오는 섬진강은 형제봉 능선과 악양들판이 함께 어울려 강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이 된다. 백운산과 지리산을 가르면서 굽이쳐 흘러온 섬진강은 하동군 화개면을 지나면서 강폭이 더욱 넓어져 강다운 위용을 갖춘다. 섬진강 뒤로 멀리 왕시리봉이 우뚝 서서 하염없이 흘러가는 섬진강을 지켜보고 있다. 아름다운 섬진강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은 시간까지도 멈추게 하는 마력이 있다. 넓은 악양들판과 악양들판을 감싸고 있는 시루봉-형제봉-고소산성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남부능선 끝자락이 정면으로 등장한다. 형제봉 자락에는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악양면 평사리가 포근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600년 수령의 천연기념물 제491호 문암송 앞에 서니 저절로 숭엄해진다. 높이 12.6m, 둘레 3.2m에 이르는 문암송은 바위틈에서 용틀임하면서 낙락장송이 되었다. 매서운 추위와 거센 비바람을 견디며 의젓하게 서 있는 문암송은 악양들판의 부부 소나무를 굽어보고 있다. 옛날에 이 나무 아래에서 문인들이 모여 자주 시회를 열어서 문암송이라 불렀다. 소나무 앞에는 문암송과 악양들판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문암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문암정에서 대축마을로 내려오는데 감나무가 유난히 많다. 그래서 대축마을을 하동 악양 대봉감마을이라고도 부른다. 감나무와 어울려 있는 돌담도 정다움을 더한다. 대축마을 앞으로 펼쳐지는 악양들판이 풍요롭다.
-지리산둘레길 하동읍-서당구간은 샛길(지선)구간으로 7.1㎞이고, 서당마을에서 대축마을까지는 13.4㎞로 하동읍-서당-대축 구간은 총 20.5㎞로 7시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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