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으로의 여행 크로아티아, 발칸을 걷다]
Bosnia And Herzegovina
12 평화와 공존을 향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며 해발 537미터의 분지에 위치해 있다. “궁전이 있는 평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라예보는 15세기 중엽 오스만 투르크에게 정복당하였고 16세기에는 아드리아 해와 발칸 반도를 연결하는 상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모스타르에서 사라예보(Sarajevo)로 가는 데는 약 두 시간 정도 걸린다. 140킬로미터 정도 되지만 길이 좁아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은 속도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라예보라는 말은 터키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슬라브 지명 끝에 붙는 evo가 붙어 만들어졌다. 사라예보는 궁전이나 대저택을 의미한다고 한다. 사라예보는 유럽의 예루살렘, 올림픽의 도시라 불린다.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 또한 남동부 유럽의 중심이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사라예보의 인구는 약 42만 명 정도 된다. 주변가지 합치면 약 60만 명 정도이다. 그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보스니아인은 49퍼센트 정도이고 세르비아인 30퍼센트, 유고슬라비아인 11퍼센트, 크로아티아인 6.6퍼센트이다. 사라예보는 가톨릭, 이슬람, 정교, 유대교가 잘 어우러진 도시이다.
“사라예보 도시 역사에 관해 아세요?”하고 나는 엘레나에게 물어보았다.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은 그들의 유황 온천지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7세기경에는 슬라브족과 게르만의 일파인 고트족이 정착하게 되었죠. 15세기 초에는 브르보스나(vrhbosna)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었습니다. 15세기 후반 도시가 만들어졌고 16세기에는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이자 교역의 중심지로서 발달한 도시입니다. 이곳은 오스만 투르크의 이스탄불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상업의 종류에 따라 붙여진 서른일곱 개의 거리가 있었는데 그중 예전에 구리 세공사의 상업 지역이었던 곳은 이전의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17세기 후반인 1697년에는 합스부르크 사보이의 에우제니오 공이 이 도시를 불태우기도 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화재와 역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오스만의 행정도시 역할을 하다가 19세기 후반인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를 몰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공식적으로 합병하는데 그것은 큰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으로 19세였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 소피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1차 세계 대전이 터집니다. 그 후 1918년에는 유고슬라바아와의 통합을 선포하지만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독일군이 사라예보를 점령합니다. 그때 그들에 맞서 여러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전후에는 전쟁 복구 과정에서 다시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4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습니다.
“이 에리사라고 아시죠?” 하고 나는 엘레나에게 물어보았다.
“알죠. 1973년 4월 10일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여자 대표팀은 중국, 일본을 꺾고 우승합니다. 이 우승은 정말 값진 우승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구기 종목에서 처음으로 거둔 세계대회 우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사라예보에서 이루었던 한국인의 쾌거입니다. 1992-1996년에는 보스니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2010년도에는 방문하고 싶은 도시 10위 안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차는 양쪽 산 사이로 달렸다. 사라예보라는 자동차 이정표가 눈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엘레나에게 “‘스마일로비치’와 ‘라트코 믈라디치’를 아세요?”하고 물어보았다.
엘레나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더니 내 말을 받아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마일로비치’와 ‘라트코 믈라디치’는 아주 대조되는 인물이죠. 스마일로비치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 불리고 라트코 믈라디치는 발칸의 도살자라고 불리죠. 이 두사람의 이야기를 해보면 모순된 발칸의 두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스마일로비치는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1992년 5월 26일 10시경 사라예보의 한 빵집 앞에서 빵을 사기 위해 줄서 있던 사람들 위로 갑자기 포탄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스물두 명이 그자리에서 사망합니다. 이러한 장면을 목격한 35세의 젊은 첼리스트는 그 날 이후 22일 동안 매일 오후 4시 정각에 콘서트 복장을 하고 포탄으로 폐허가 된 빌딩에서 “G단조 알비노니의 아다지오(Albionis’s Adagio in G minor)”를 연주하였습니다. 연주하는 동안에도 주변에서는 포탄 파편이 튀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과 인간의 존엄성과 평화를 위해 그는 연주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감동적인 연주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2008년 캐나다 작가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쓰게 하였고, 또한 영국의 작곡가인 데이빗 와일드도 이 소식을 듣고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는 무반주 첼로 곡을 작곡하였습니ㅏㄷ. 전쟁과 파괴, 죽음과 비극에서의 희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후 스티븐 갤러웨이에 의해 동명의 소설로 다시 한 번 태어나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반면에 ‘발칸의 도살자’라 불렸던 라트코 믈라디치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군사령관으로 내전 당시 인종 청소를 주도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는 전후 전범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그 후 16년 동안 도피생활을 해오다가 결국 2012년 5월 붙잡히게 됩니다. 그는 헤이그 유고슬라비아 전범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그에 의해 사라예보에서만 민간인 1만 명이 숨졌습니다. 그리고 1995년 7월에는 스레브니차 마을의 이슬람 주민 8천 명을 학살한 혐의로 또 기소됩니다. 하지만 그는 죄를 부인하고 단지 내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했을 뿐이라고 변명을 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러한 상반된 행동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러게 이야기하는 사이 엘레나와 나는 사라예보로 들어왔다. 사라예보에는 다른 발칸 도시와 다르게 높은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넓은 대로 양옆 구릉지 위로는 집들이 있는데 한국의 달동네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컬러풀한 집들의 모습은 이색적인 풍격을 자아냈다. 엘레나와 나는 우선 구시가지의 중심인 바슈카르지아(Bascarsija) 광장으로 향하였다. 가면서 보니 이 도시가 예전의 사라예보에서 새로운 사라예보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왼편 한번 보실래요? 노란 홀리데이 인 호텔, 저 호텔이 어떤 호텔인지 아세요?” 하고 나는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엘레나는 차창 밖을 보더니 나에게 말하였다.
“저 호텔은 내전 때 외신기자 회관으로 사용하였던 호텔입니다. 그때 취재하던 기자들의 요청으로 파괴되지 않고 보전된 유일한 건물입니다. 내전 때에도 저곳만은 폭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엘레나와 나는 바슈카르지아 광장 근처에 차를 주차하였다. 이곳에서 라틴 다리까지는 가까웠다. 하지만 동선을 우선 페르하디야(Ferhadija)거리로 잡았다. 돌로 포장한 터키 식 거리인 바슈카르지아를 지나 대리석으로 바닥을 포장한 페르하디야 거리에 들어섰다.
페르하디야 거리의 번화가로 들어왔다. 번화가에 있는 예수 성심성당은 로마 가톨릭 성당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곳 사라예보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으면서 보스니아인들의 40퍼센트 정도가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오스만 투르크는 적극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그것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여러 종교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사라예보 시내 곳곳에서 이슬람교 사원과 정교회와 가톨릭 성당을 볼 수 잇다. 엘레나와 나는 거리에서 약간 안쪽에 위치한 예수 성심성당 앞에 서 있었다. 성당은 두 개의 탑을 가지고 있었는데 네오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미해 1879년에 건축하였다고 한다.
엘레나는 성당 입구에 있는 예수님 상을 보면서 나에게 말하였다.
“예수님 동상이 손가락 세 개를 펴서 위로 향하고 있는데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세요?”
“저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성당은 적암과 사암으로 지어졌습니다.” 성당 광장에서 거리로 나왔다. 사라예보의 최대 쇼핑가다. 이곳에는 노천카페가 줄지어 있었다. 서유럽의 그 어느 곳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다니는 것이 활기차 보였다. 길 건너에 있는 정교회로 가보기로 하였다.
신바로크 양식의 정교회는 1868년에 건축된 보스니아 정교회의 주교좌인 사라예보 동방 정교회(Sarajevo Orthodox Church)이다. 이 정교회는 내전 당시 파괴되었으나 가톨릭, 이슬람 등의 종교 단체의 기부에 의해 복원되었다고 한다.
엘레나와 나는 거리를 따라 걸었다. 바슈카르지아 광장을 향해 걸었다. 바슈카르지아는 자갈로 덮인 옛 터키 구시가의 중심이다. 신시가지를 건너 구시가지로 들어가자 꼭 터키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바슈카르지아 거리를 따라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걸었다.
오른쪽으로 녹색 지붕의 ‘가지 후스레프 베그 모스크’가 보였다.
나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저기 보이는 녹색 지붕이 ‘가지 후스레프 베그 모스크’입니다. 사라예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건축물로서 1521-1541년 보스니아를 통치하던 가지 후스레프 베그의 지시로 1530년에 페르시아의 건축가가 지은 것입니다. 26미터의 초록색 돔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샘, 학교, 기도처 등 많은 것이 내전 중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이슬람 국가들의 도움으로 1996년 복구되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애잔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엘레나와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기도하기 전에 씻는 수도가 있었다. 그리고 정원이 있는데 그곳에는 성직자들의 무덤이 있었다. 모스크 안은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다섯 개의 문이 있는데 남성, 여성, 성직자 등이 다니는 문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엘레나와 나는 모스크에서 나왔다. 구시가지의 상점은 신시가지보다 동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바슈카르지아 거리의 끝으로 갔다. 가는 동안 이슬람권의 어느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케밥집, 금속공예 상점들, 모스크 등 이러한 것들이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광장 주위에는 트램이 다니고 있었는데 아주 오래전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열차에 올라타면 아주 먼 과거로 데려다 줄 것 같았다.
거리의 끝에서 나와 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라틴 다리로 가기로 하였다. 라틴 다리 앞에는 박물관이 하나 있었다. 이곳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가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가블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됐을 때 카페가 있었던 곳이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 대신 종신형을 선고 받았고 결국 4년 뒤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이곳은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거사 직전 앉아서 커피를 마시던 카페였으나 후에 이렇게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나는 엘레나에게 “이 박물관이 생기기 전에 이곳에 있었던 카페 이름이 무엇인지 아세요?”
하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정부는 사건이 있은 후 이 자리에 있던 카페를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려 했는데 카페 이름이 ‘용기 있는 자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정부가 카페를 수용하면서 높은 보상가격을 제시했는데 거절했다고 해서 시민들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엘레나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엘레나에게 이야기하였다.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였을까요? 저 자리에 앉아 거사를 치르기 전까지요.”
“그 시간 수많은 상념과 심적 고통이 동반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남아 있는 자기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을 텐데, 저곳에 앉아 어린 젊은이가 커피를 마시며, 아니면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앞에 놓고 뚫어져라 창밖을 보며 조금 있으면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무슨 감정을 느꼈을까요?”
엘레나의 말을 듣고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저 다리 위로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다. 다리 위의 많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역사의 한 장면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엘레나에게 “드리나 강의 다리”라는 소설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엘레나는 “이보 안드리치(Ivo Andrich)”하고 짧게 대답하였다.
“1961년도에 노벨상을 받은 작품이라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는 엘레나에게 “그럼 책과 작가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어요?” 하고 물었다.
“사실 그가 쓴 <드리나 강의 다리>라는 책을 읽어 보면 이 나라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잇을 것 같아요. 이책의 내용과 배경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약 400년 동안 보스니아의 소도시 비셰그라드(Visegrad)에 놓인 다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다양한 문화의 충돌과 공존 그리고 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지닌 사람들의 갈등과 공존 그리고 발칸을 지배했던 제국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요.”
“여러 발칸 나라들이 있지만 보스니아만큼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는 곳도 드물죠.” 하고 나는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그렇죠.” 하고 엘레나도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보스니아는 여러 문화가 동시에 공존하는 독특한 색깔을 지닌 지역입니다. 지도를 펴서 주위를 둘러보면 아시다시피 보스니아는 아드리아 해를 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문화의 영향을 받은 크로아티아, 그리고 정교회의 세르비아와 접해있으며 거기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이슬람 문화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곳입니다. 보스니아는 여러 가지 색깔의 문화가 합쳐진 모자이크 같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문화적 충돌과 공존이 이보 안드리치의 작품에 나타납니다. 그의 작품은 철저히 그의 조국 보스니아의 이야기입니다.
이보 안드리치는 가톨릭계의 크로아티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금 세공사인 아버지와 양탄자 공장에서 일하시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모가 살았던 비셰그라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그의 어린 시절 불행했던 삶과 고독이 후에 그의 생애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고등학교는 사라예보의 명문 학교인 벨리카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하던 시절 자그레브와 빈에서 철학 공부를 하다가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는 진보적 민족단체 ‘청년 보스니아’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 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의 징역을 살게되고, 이 때 옥중에서 읽은 도스토예프스키와 케르케고르는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 후 유고슬라비아 연방 외교관이 되어 서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그의 많은 소설의 무대는 보스니아였습니다. 그는 아주 철저하게 보스니아인으로 살다간 사람이고 보스니아의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대표작은 <드리나강의 다리>, <트리브니크의 연대기>, <아가씨>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고뇌, 고독, 허무주의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1975년 심장마비로 숨졌습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모스타르. 이것들은 왠지 애틋한 느낌이 드는 이름들이다. 무엇인가 생각나면 그것을 보기 위해 시간을 거꾸로 돌려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엘레나와 나는 다리를 건너 차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