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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아니면 살기다
증 언 자 : 송태헌(남)
생년월일 : 1955. 7. 24(당시 나이 25세)
직 업 : 옷가게 경영(현재 옷가게 근무)
조사일시 : 1988. 10.
개 요
5월 19일부터 시내전투에 참가하면서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기는 일과 차량시위 때 차를 운전해 사람들을 시내로 실어나르는 일을 했다.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
나의 아버님은 황해도 연안 출신으로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오신 분이다. 6·25 때 인민군 고급장교로 경남 양산지구에서 포로가 되어 54년 6.28 반공포로로 석방되셨다. 그때 가정이 있는 피난민들은 무안, 고흥 등지의 국가땅을 지급받았으나, 단신 귀환자였던 아버님은 그러한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남한땅에 뿌리내리기까지 고생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국민학교 교사였던 어머님과 연애결혼하여 우리 6남매를 낳았어도 아버님의 향수병은 무척 심했다. 생전 돈버는 일은 고사하고 어머님께서 사놓은 땅을 팔아 술을 마실 정도로 재산관리에 소홀했다.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고생도 많이 하고 외롭게 살았다. 어머님께서는 대성국민학교 앞에서 대형 슈퍼마켓을 경영하며 생활을 꾸려나가셨으나 불행하게도 내가 24살 때 돌아가시고 말았다. 6남매 중 장남인 나는 집안이 어렵다는 것을 느끼면서부터는 학교를 때려치우고 군고구마 장사, 두부장사, 공사판 노동, 웅변, 3류 가수, 세일즈 등 안 해 본 것이 없다. 편하게 사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보니 직종에 상관없이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뭐든 다 했다. 일하는 짬짬이 시간을 내어 딴 면허증만 해 도 열서너 개나 된다(운전면허, 정비면허, 2급 건축기사 자격증, 위험물 취급 자격증 등). 한때는 깡패가 되려고도 해봤지만 일하지 않고 남의 돈을 쓴다는 것이 못할 짓이라 여겨졌다. 정의로운 일에는 물불 안 가리지만
1969년 대통령선거 때는 김녹영 씨를 도왔다. 특별히 어떤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배 되는 분이 이런 사람들을 뽑아줘야 광주가 산다고 말씀하셔서 점심 한 그릇 먹고 심부름을 했다. 여당이 돈으로 선거를 치를 때 먹을 쌀조차 없던 김녹영 씨가 이겼을 때의 기쁨이란 말할 수 없었다. 너무나 좋아 김녹영 씨를 업고 다니기도 했다.
부상자를 병원으로
1980년 당시 나는 충장로 3가 동아아케이드에서 조그만 옷가게를 하고 있었다. 5월 12일부터 동생이 대창버스에 의한 교통사고를 당해 제일극장 앞 한일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집안에 달리 간병할 사람이 없었다. 대소변과 식사를 챙겨주는 정도의 가벼운 간병이었으므로 내가 가게일을 보며 동생을 돌봤다. 5·18 항쟁 기간 내내 매일 아침 9시 정도에 병원을 나와 금남로 일대에서 종일 시위에 참여했다. 저녁 10시쯤이 돼서야 병원으로 돌아가 동생을 돌보았다. 5월 16일 평화적인 횃불시위가 도청 앞까지 진행되었으나 이때는 경찰도 묵인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8일 오후 4시쯤 지하상가 부근 약국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약을 구하러 갔다. 그때는 이미 박달나무 곤봉과 M16으로 중무장한 1개 중대 정도의 공수부대가 2인 1조로 충장로에 쫙 퍼져 있었다. 충장로 파출소 앞에서 나를 검문하길래 "나는 학생이 아니다"고 하자 경어를 쓰지 않는다며 방망이를 휘둘렀다. 재빨리 피했으나 왼쪽 어깨를 맞았다. 그러나 나는 키도 190센티미터가 넘는 데다가 몸무게도 100킬로그램이 넘었으므로 그 정도야 우습게 생각됐다. 그런데 상황이 아직 격화되지 않은 때라서 그랬는지 더 이상은 건드리지 않았다. 공수대원들이 "다 들어 가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며 조흥은행 쪽으로 내려갔다. 이날 저녁 대규모 시위대는 아니었으나 가톨릭센터 앞에서의 시위대에 참여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 75세의 할아버지와 학생 2명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몹시 불안해 했다.
19일 아침 정상적으로 출근했으나 통근이 9시로 앞당겨진 데다가 장사도 거의 안 돼 이날 오후부터는 장사를 때려치우고 그때부터 하루종일 금남로 일대에서 활동했다. 시위에는 단순가담만 한 것이 아니라 앞 대열에서 '김대중 석방하라', '살인마 전두환을 때려잡자', '신현확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내가 처음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을 업고 뛰게 된 때가 바로 19일 밤이다. 7시쯤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민들은 공수부대를 향해 투석을 했고, 놈들은 발을 맞춰 영차영차 하면서 우리 쪽으로 덮쳐왔다. 공수대에게 밀리면 나는 충장로 동사무소에서 동아극장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으로 잽싸게 빠져나갔다. 그 사이 군인들은 금남로를 지나 지하상가 공사장까지 시민들을 밀어붙였다. 내가 다시 동아극장 근처 골목에서 나와 거리를 보면 군인들에게 밀려 넘어진 사람들, 곤봉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이 돌조각과 화염병 조각이 난무하는 아스팔트 위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포복으로 접근해 들추어업고 한일병원으로 옮기곤 했다. 머리가 깨져 인사불성이 된 사람 둘을 병원으로 옮겨놓으니 병원에는 이미 7명 정도의 부상자가 있었다. 근처에 외과병원이 없어서 환자가 많이 밀렸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응급치료만 해주었다. 이들을 내가 다시 적십자병원으로 옮겨 치료하도록 해주었다 .
무기가 있다면 나도 싸우고 싶다
다음날(20일) 오후 5시쯤 무등경기장에서 출발했다는 택시가 금남로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정면돌파가 시작됐다. 공수대들은 관광호텔과 전일빌딩 옥상, 그리고 도청 앞에 있으면서 시위차량이 동구청에 이르면 엄청난 기세로 최루가스를 쏘았다. 서너 대 가량의 차가 꼬나박혔다. 차가 도청으로 향할 때 연도의 시민들은 모두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약 3천5백 명 정도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 속에는 15, 6살 먹은 중고생도 있었고 공장 근로자들도 많았다. 대개 못사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차림이나 말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날 밤 야간사격 때 나랑 상업은행 앞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던 40대의 남자가 총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쏴대다니, 죽일 놈들이다. 여자들도 도망가지 않는데 우리가 도망가야 되겠느냐"는 따위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총알이 날아온 것이다. 내가 양팔을 잡고 '동해물약국' 앞의 수송차량으로 옮겼다.
이날 밤도 서너 명의 부상자를 한일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에서는 꺼렸지만 나는 내 할 일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한 명이라도 빨리 옮겨 치료받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한일병원에서 적십자병원까지 옮기는 도중 숨이 끊어진 사람도 있었다. 내가 들추어 메고 다른 한 사람이 다리를 받쳤다. 한참 가다가 다리를 받쳐주던 사람이 없어 다시 고쳐 업으려다 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 순간 기분이 섬뜩하니 좋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총이든 박격포든 있기만 하면 들고 싸우고 싶었다. 이렇게 이틀 동안 내가 병원으로 옮긴 사람이 부상자, 사망자 합쳐 모두 10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총을 들고 시가전 벌여
다음날(21일) 아침 태극기로 관을 씌운 시체 3구를 가톨릭센터 앞 아치 밑에 놓고 '님을 위한 행진곡', '투사의 노래' 등을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은 장갑차 위에 앉아 태극기를 흔들며 도청 앞으로 질주하던 사람이 두 방의 총성과 함께 목에서 피가 솟구치던 그 광경! 오후 2시쯤 광주은행 앞 사거리에서 화순에서 뺏어왔다는 M1, 카빈 소총을 나누어주었다.
무기를 싣고 온 사람이 "시민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헛되이 총에 맞아 죽어야 되겠습니까? 우리도 무장을 합시다!"고 하자, 마침 기다리고 있던 참이라 나는 얼른 총을 받았다. 중학생, 대학생, 예비군, 평범한 시민, 예순의 할아버지까지 약 80-90명 정도가 현장에서 총을 지급받았다. 그때 무기가 나무상자로 3상자 정도 풀렸다. 전날의 무자비한 발포와 시민들의 죽음으로 인해 '너희들에게 죽을 순 없다, 뭔가 대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 때문이었다. 그때는 인생을 깊이 생각해 상황판단을 한 후 총을 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 우린 다 죽는구나!'하는 급박한 심정뿐이었다. 또한 19일 시내에서 사귄 친구(권희철)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전화로 확인해 보니 사실이라고 했다. 그 다음부터는 나 자신 투사, 열사라는 의식과는 무관하게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겠다고 생각됐다.
M1 소총을 장전해서 하늘로 몇 발 쏴보니 잘 나갔다. 총을 잡으니 힘이 났다. 총알을 양쪽 호주머니에다 넣고 도청을 향해 사격했다. 광주은행 사거리에서 주택은행, 가톨릭센터 부근까지 접근해 총을 쏜 후 한미쇼핑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날 저녁까지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목포와 벌교의 공수부대가 들어오니 외곽 방어를 맡아달라고 했다. 대성국민학교 앞 건물 옥상에서 총을 들고 다른 2명과 함께 경비를 서다가 밤 11시경 동생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돌아왔다. 한일병원 원장이 어디 가지 말고 병원경비를 서달라고 했다. 시민들이 환자를 데려와서는 '빨리 고쳐라'고 욕부터 하고 흥분한 경우엔 총까지 들이댈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의사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뚝딱 방망이가 아니다. 이 사람도 의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시민이다"고 말해 돌려보내곤 했으므로 나에게 부탁을 한 것 같다. 이날부터 26일까지 매일 새벽 3-4시가 되도록 병원경비를 섰다. 한번은 25, 6세 되는 젊은이 2명이 제일극장 앞에서 여자를 겁탈하려고 했는지 비명소리가 들려 병원 청소용구를 들고 쫓아갔더니 도망쳤다. 아가씨 얼굴이 꾀죄죄하길래 깨끗이 닦아 한일은행 앞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
차를 운전해 시민들의 발이 되기도
22일 도청이 뚫렸다는 소리를 듣고 가봤더니 정말로 계엄군은 한 명도 없었다. 소문으로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조대 뒷산으로 도망갔다고 했다. 이날부터 차량을 운전하며 시민의 발 노릇을 했다. 전남대-화정동-황금동-도청 등지를 돌며 시민들을 운반한 뒤 시민궐기대회에 참여했다. 또한 시민군이 형성되어 무기를 거둬 들인다는 말을 듣고 총을 반납하러 도청에 갔다. 처음엔 도청 출입이 엄격했으나 나중엔 들어갈 수 있었다. 도청 안에는 시내에서 사귄 사람이랑, 연줄로 아는 이들이 많았다. 나더러 시내 지리와 무기 다루는 데 능통하니 상황실장을 해보라고 권했지만 워낙 학문이 짧은 데다가 악필이어서 사양했다. 도청 안에서 특별히 맡은 일은 없었지만 거의 매일 운전하고 도청을 드나들었다. 아무나 운전하던 때라 운전부주의로 광주역 앞에서 교통사고로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구두닦이, 양아치들이 총 들고 거만스럽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자 웬지 싫었다.
어느 땐가 충장로 파출소 소장을 시민들이 괜히 두들겨 패려고 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경찰이 그렇게 밉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말해 구해 낸 뒤 불로동다리까지 호위해 주었다. 푸른 제복만 보였다 하면 군인이건 경찰이건 관계없이 눈이 돌 때였으니 시민들을 나무랄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차량이 많이 돌아다니고 어린애에게까지 총이 넘어가는 등 무정부상태였지만 다행한 일은 이런 상황에서도 강도나 파렴치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런 경우 아마도 대약탈극이 벌어졌을 것이다. 당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활필수품과 기름뿐이었다. 이런 행동을 민주화의 의지 또는 시민들의 단결된 행동이라고 듣기 좋은 말로 미화하지만 그때 당시는 안 죽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사망자가 2백 명이라고 하지만 그 정도 죽을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최소한 천 명은 넘게 죽었을 것이다. 5·18 이후 실제로 2, 3년간은 거리의 부랑자, 거지가 없었다.
23일과 24일 나는 전남대병원과 적십자병원에서 헌혈을 했다. 26일 밤 11시까지 도청에 있다가 동생 때문에 병원으로 돌아와 어찌나 곤히 잤던지 27일 새벽의 총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리고 27일 오후에 군인들이 청소하는 것을 보았다.
누구에게나 5·18을 이야기 해
5·18 이후 서울, 부산, 대전 등지에 갈 때마다 5·18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물론 나도 1983년까지는 하도 무서워 마음속에 품고만 있을 뿐 이런 얘기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그때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특히 젊은 사람들을 만났을 땐 그때 그 일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늘상 말한다. 후에 군인이 쓴 글을 잡지에서 보니
"우리들을 무서워 하지 않아서 화가 났다. 공수부대는 대한민국의 최고 정예부대인데 우리가 착검을 하고 진압을 하는데도 대항을 하다니 "
이렇게 씌어 있었다.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 사회의 거대한 민주화 물결을 그렇게 총칼로 짓밟고는 이제 와서 용서와 화합 차원으로 넘어가려 하는데,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온전한 처벌을 해야 하며, 군사정권이 물러간 후 역사를 밝혀야 한다. 지금 군사정권 하에서는 절대로 진실을 밝힐 수 없다.
50년대 태어난 사람은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어떤 경우에도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고 공산당은 무조건 나쁜 것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에 반미 구호를 처음 들었을 때는 섬뜩했다. 그러나 지금은 '양키 고 홈'이 조금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5·18 당시 군작전지휘권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미국의 묵인이 없었다면 어떻게 군대가 출동할 수 있었겠는가? 그 후부터 반미 구호가 전면에 등장한 것 아닌가? 당시 주한미대사가 "전혀 근거 없다"고 하지만 말이 안 된다. 미 대사가 우리나라 국민을 들쥐와 같다고 공개석상에서 말할 수 있는 정도로 약소 국가이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살기를 원한다. 동등한 지위의 우방이기를 원한다. 또한 우리나라가 특수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하나 툭하면 공산주의자로 내모는 일도 이젠 그만둘 때가 됐다. '반공'을 40년 동안 팔았으면 많이 팔아먹었지 않은가? 13살의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죽어갔다지만 그때 누가 본 것도 아니고 녹음을 해둔 것도 아닌데. 문제는 나이든 사람들의 판에 박은 보수적인 의식이다. 못사는 사람들이 뭉쳐서 우리도 좀 먹고 살자, 똑같이 나눠먹자고 하면 좌익으로 몰고, 잘사는 사람들이 자기 몫 움켜쥐고 뭉치면 체제수호 세력이라고 말한다. 민족적 자존심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국민들이 더욱 성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50년대에 태어나 밀가루죽, 옥수수빵 , USA 상표를 먹고 산 사람이다. 요즘 애들은 한쪽 날개는 오전에 먹고 다른 한 쪽은 오후에 먹고, 몸체는 저녁에 먹는 비행기과자를 모를 것이다. 우유, 빵, 과자, 쵸콜릿 등을 한입 먹고 버릴 수 있는 물질적 풍요의 시대가 되면서 아까운 것, 중요한 것이 없어졌다. 청소년들에게 국가관, 사회관을 심어줘야 한다. 중고생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팝송을 들으면서 몸을 비비 꼬는 디스코텍에도 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외래문화가 아무 여과 없이 받아들여져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치니 문제다. 내가 패션계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남대문 시장부터 뒤져 민족적 자존을 갖고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바꾸고 싶다. 알지도 못하는 영문이 새겨진 옷과 비싼 패션 대신 충분히 우리 고유의 의상을 살릴 수 있다. 나는 돈벌면 광주에 생산공장을 만들어서 생산비와 원가를 절약하고 판매마진을 줄여 시민들에게 좋은 옷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싶다. 장이나 호텔, 유명메이커 대리점 따위 소비적인 것만 쌓아올리지 말고 생산적인 일에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실업자라도 한 사람 줄고 우리 무등골이 발전할 수 있는데 요즘 광주에 건물 들어서는 것 보면 너무나 한심하고 답답하다. 돈벌면 꼭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데 사람이 독하지 못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양보하고 만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돈벌려면 다른 사람을 딛고 올라서야 자기 몫을 챙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서 남이 피해입을 것을 생각해 그냥 포기해 버린다. 하지만 언젠가 여유가 생긴다면 어머님 묘자리도 다시 봐드리고 싶고 여동생들 결혼도 잘 시키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행 청소년들 재교육하는 기관을 만들어 봉사하고 싶다. 단순히 사회사업의 수준에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과거 나의 삶과 경험을 통해 절실히 필요한 일이라고 느껴 품고 있는 희망이다. 1980년 당시 경영했던 옷가게가 망하는 바람에 지금은 30만 원 정도의 월급 받고 시내 옷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요즘도 시내에서 데모하면 빠짐없이 꼭 참여한다. 작년 6월에도 18일간을 서현교회 앞에서 꼬박 살았다.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월간중앙이나 신동아 같은 잡지를 꼬박꼬박 읽으며 젊은 사람들과 늘 대화한다. (조사.정리 양선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 합니다.
힘차고 행복한 화요일 시간 보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