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시타니의 GPR 글러브는 지난 2009년까지 총 다섯 세대를 거쳤다. 자신들의 고집과 자존심이 깃든 다섯 세대를 거쳐 2010년, 새롭게 등장한 것이 GPR6이다.
GPR 글러브의 GPR은 그랑프리 레이싱(Gran Prix Racing)의 약자로, 말 그대로 최상위 클래스 제품임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다. 본격 레이싱 글러브인 GPR 시리즈의 최신작인 GPR6는 쿠시타니의 고집과 자존심을 넘어 절대적인 자신감이 엿보일 정도다.
▲KUSHITANI K-5147 GPR 6 RACING GLOVES
GPR6 글러브는 손목을 완전히 덮는 본격 레이싱 글러브에 해당한다. 실제 레이스에 참전하는 선수들 혹은, 슈퍼 스포츠를 타는 라이더 모두에게 레이싱 글러브는 일반 라이딩 글러브에 비해 까다롭게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GPR 6는 손목을 완전히 덮는 본격적인 레이싱 글러브에 해당한다.
최근 시판되는 슈퍼 스포츠 모터사이클의 경우, 200마력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출력과 최고 시속 300km 이상의 엄청난 성능을 자랑한다. 이런 강력한 출력을 가진 모터사이클을 다루는데 있어, 세밀한 조작성과 보호성을 동시에 갖춰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GPR 6는 세밀한 조작성과 보호 성능을 동시에 추구했다.
쿠시타니, GPR6에 대한 모든 기대
다양한 라이딩 기어를 접하고 또 그것을 전달하는 일을 하면서 때로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제품의 가치가 떨어져 불만족스러울 때나, 그와는 반대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울 때가 그렇다. 전자의 경우는 제쳐두고, 후자의 이유는 스스로가 이미 너무도 만족스러워 그것을 굳이 말로 설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GPR 6의 만족도는 무척 높은 편이다.
객관적인 설명이란 결국 각각의 주관을 종합해 도출된다고 봤을 때, 가장 객관적인 설명은 주관에서 출발해야만 함에도 이것이 용납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 결론을 먼저 내리자면, 쿠시타니의 GPR6는 지금까지 경험한 레이싱 글러브 가운데 최상급의 글러브였다고 밝힌다.
▲GPR6는 한 눈에 보기에도 레이시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한눈에 보기에도 GPR6의 디자인은 슈퍼 스포츠 모터사이클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레이시한 분위기를 풍긴다. 날카로운 디자인의 슈퍼 스포츠 모터사이클과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지만, 타 브랜드의 레이싱 글러브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GPR6는 마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 인체 모형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하드 타입의 프로텍터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일종의 장갑(裝甲)처럼 느껴지는 레이싱 글러브와 달리, 피부 밑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 인체 모형과 같은 느낌이다. 손을 감싸고 있는 글러브가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GPR6는 탁월한 착용감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는 여타 라이딩기어 브랜드와 명백한 차이를 만든다. 손을 보호하는 장갑으로의 기능은 물론이지만, 맨손과도 같은 탁월한 조작성에 더욱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작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 때문에 보호 성능을 포기했다면, 아마 GPR 시리즈는 여섯 번째 제품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보호 성능과 탁월한 조작성을 결합해낸 것이 쿠시타니를 경쟁 브랜드와 차별화시킨 이유가 아니었을까.
부드럽고 명확한 착용감
▲글러브의 손바닥 부분은 캥거루 가죽을 사용했다. 손등의 경우는 소가죽을 사용하고 있다.
GPR6는 이전 세대인 GPR5와 마찬가지로 캥거루 가죽과 소가죽을 혼합해 제작했다. 얇고 부드러운 재질의 캥거루 가죽은 핸들 그립을 쥐거나 레버 등을 조작할 때의 감각을 보다 명확하게 라이더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됐다. 소가죽은 캥거루 가죽보다 두꺼우면서 외부 마찰에 견디는 인장강도가 보다 우수하다는 장점이 있다.
손등 방향에서 글러브를 바라보면 봉제선이 글러브 바깥쪽으로 하고 있는 타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손바닥을 위로 하고 바라보면 글러브 내부에서 봉제가 마무리된 타입이다. 가죽과 가죽을 연결하는 봉제선이 글러브 안쪽에 자리하면 아무래도 손가락 끝에 이물감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손가락 봉제선은 글러브 내부로 처리된 타입이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걸리는 이물감은 크지 않다.
하지만 GPR6를 직접 착용해보면, 이런 이물감은 조작성에 영향을 줄 정도의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글러브를 완전히 뒤집어 볼 수 있었다면 시각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겠지만, 가죽과 가죽을 연결하고 남는 가죽의 양은 크지 않음이 분명하다. 숙련된 기술과 경험이 없다면 불가능한 부분이다.
소프트 타입 보호대의 이유
쿠시타니의 거의 모든 글러브가 그러하듯 GPR6 역시 카본이나 티타늄, 강화 플라스틱 따위의 하드 타입의 보호대는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K-FORM+(케이 폼 플러스)라고 이름붙인 소프트 타입의 보호대가 가죽 소재 안쪽에 배치된다. 이런 소프트 타입 보호대는 하드 타입의 보호대가 사고에서 미칠 수 있는 역효과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손의 부상을 전제한 사고 사례를 통해 직접 증명하지 않는다면 보호대의 효과와 역효과에 대한 설명은 탁상공론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소프트 타입의 보호대가 하드 타입에 비해 보호 성능이 뒤떨어진다고 단정할 순 없다.
하드 타입의 주먹 보호대가 부착된 글러브를 갖고 있다면 직접 살펴보자. 하드 타입의 보호대가 피부에 직접 닿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드 타입의 보호대를 사용할 때, 그 안쪽에는 부드러운 폼이 덧대지고 결국 외부로 드러난 보호대가 아닌 이 부드러운 폼이 충격을 흡수, 분산시킨다.
▲중세 시대의 건틀릿
중세 기사의 철제 장갑을 끼고 벽을 향해 주먹을 힘껏 뻗는다면, 과연 철제 장갑이 충격을 흡수해 주먹에 충격이 전해지지 않을까? 의심된다면 주먹이 들어갈 만한 철제 깡통에 손을 넣고 벽을 때려볼 필요가 있다.
그럼, 외부에는 하드 타입 보호대가 위치하고 내부에 폼이 덧대진 구조라면 안전할까? 이 역시도 완전히 신뢰할 순 없다. 상상력을 조금 더 발휘해, 하드 타입 보호대를 적용한 글러브를 낀 후 손바닥을 바닥에 댄 다음 망치로 하드 타입 보호대를 가격하면 과연 손이 보호될 수 있을까?
▲동영상은 쿠시타니의 레이싱 수트 용 프로텍터를 제작하는 모습이다.
아마도 손가락 관절은 무사하더라도 하드 타입의 보호대가 눌리면서 압박하는 부위의 뼈가 으스러질 것이다. 가해지는 충격이 보호대를 부술 수 없더라도 뼈를 부술 정도라면 오히려 보호대는 또 다른 위협이 될 수도 있다. 긴 이야기가 되었지만, 결국 ‘단단한 프로텍터가 아니기에 위험하다’는 생각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란 것이다.
쿠시타니의 자랑쿠시타니는 GPR6에 자사가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고기능성 소재를 적용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소프트 타입의 충격 흡수재인 케이 폼 플러스(K-FORM+)을 비롯해, 방탄복에 사용되는 케블러, 케블러 보다 2배 이상 인장 강도가 뛰어난 자일론(ZYLON)이 적용됐다.
고기능성 소재를 아낌없이 적용한 것이 특별할 것은 없지만, 6개의 레이어 구조로 제작되었음을 설명하는 개요도를 살펴보면 쿠시타니의 섬세함에 감탄하게 된다.
글러브의 외부층에는 튼튼한 소가죽 소재를 적용했다. 이 외피 구조는 손목을 조이는 벨크로 방식의 조임끈과 연결되며, 엄지와 검지 사이는 셔링 구조를 적용해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손등을 보호하는 외피 구조는 손가락 사이에 걸리고 벨크로 방식으로 고정하는 방식이다.
이 아래에 위치하는 것이 너클 가드의 역할을 하는 최초의 충격 흡수층이다. 이 아래로 배치된 것이 5mm 두께의 케이 폼 플러스이며, 최초 충격 이후의 충격을 흡수 및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너클 가드의 역할을 하는 부분은 베이스 글러브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다.
이 3개의 층은 하나로 합쳐져 글러브 위에 손가락이 없는 반 글러브를 하나 더 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손가락 관절에는 반지를 끼운 듯 연결된다. 충분한 충격 흡수층을 배치하는 것이 라이더의 조작감을 방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베이스 글러브와 분리해, 덧입히는 구조를 택했다.
▲스위스 쉘러의 등록 상표인 케프로텍이 적용됐다.
4번째 층은 쉘러(Schoeller)의 등록 상표인 케프로텍(Keprotec)이 적용됐다. 케프로텍은 코듀라(Cordura)와 다이나필 TS-70(Dynafill TS-70), 케블러(Kevlar), 폴리우레탄 소재를 혼합해 찢어짐에 대한 강성이 우수하면서도 신축성이 뛰어난 소재다. 또 다시 케프로텍 아래에는 케이 폼 플러스가 배치됐다.
5번째 층인 K 폼 플러스는 손가락 관절 전체와 손등, 팔목 전체에 고루 적용되고 있으며 두께는 3mm에서 5mm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피부와 글러브가 맞닿는 안감에는 손바닥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케블러 니트를 배치해 마무리했다.
▲손가락을 비롯해 손등 전체에는 케블러 니트가 배치됐다.
설명이 길어진 만큼의 구성으로 그 두께는 하드 타입 보호대를 적용한, 타 브랜드의 레이싱 글러브와 비교해도 거의 같은 정도다. 하지만 쿠시타니의 진가는 복잡한 구성이나 기능성 소재가 아니라 뛰어난 착용감에 있다.
▲손날 부분에는 폼을 덧대고 가죽을 보강했다.
6단계의 층으로 이뤄진 글러브 상단과 달리 손바닥은 매우 얇은 캥거루 가죽으로 제작됐다. 물론 스웨이드와 소가죽 소재로 덧댄 부분도 있지만, 그립을 조작하는 손가락은 모두 캥거루 가죽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은 매우 정확한 편이며, 컴퓨터 키보드의 F와 J 키에 돌출된 부분도 완벽하게 찾아낼 수 있을 정도다. 손가락에 감기는 피팅감도 매우 훌륭하다.
설명이 필요없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엔 쿠시타니의 자일론으로 마무리했다.
물론 장점만이 전부일 순 없다. 개개인에 따라 피팅감에 대한 정의도 다를 것이며, 조작성의 정도에 대한 차이도 있을 수 있다. 글러브 안쪽의 이물감이 거의 없다고 해도 정말 민감한 라이더라면 신경이 쓰일 수도 있다.
▲손목의 움직임도 자유롭다.
리뷰 제품인 화이트 컬러의 경우, 오염에 대한 부분도 고려해야만 한다. 가격 또한 저렴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부분들은 각각의 취향과 선택에 따라 큰 문제이거나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 있을 것이다.
라이딩 기어 리뷰의 목적은 직접 써보지 않더라도, 사전에 정보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이 리뷰는 실패한 리뷰다. 결과적으로 진가를 맛보려면 직접 착용해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GPR6를 라이더가 직접 착용해보았을 때의 일반적인 평가가 어떨지는 분명히 자신할 수 있다. GPR6는 바로 그런 글러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