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가장 깊은 절망 끝에 남은 것
― 조지 프레더릭 와츠, 《희망》
조지 프레더릭 와츠(George Frederic Watts), 《희망(Hope)》1886, 캔버스에 유채, 142.2 x 112.2 cm, 테이트 브리튼(영국 런던) 소장.
① 이름과 풍경의 잔인한 불일치
어떤 이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설이 된다. 영국의 상징주의 화가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희망》을 처음 마주한 사람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희망'이라는 제목과 달리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밝은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푸른빛이 감도는 적막과 깊은 고독이기 때문이다.
그림 속 여인은 둥근 지구를 닮은 작은 구체 위에 홀로 앉아 있다. 그녀의 눈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고, 얇은 옷 한 벌만 걸친 몸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다. 희망이라면 흔히 새벽빛이나 단단한 대지, 앞으로 나아가는 힘찬 발걸음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와츠가 그려 낸 희망의 풍경은 그 모든 익숙한 이미지를 거부한다.
얼핏 보면 화면 어디에도 희망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 시선을 머물면 화면 위편에 작은 별 하나가 희미하게 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압도적인 어둠 속에서는 쉽게 지나칠 만큼 미약한 빛이다. 하지만 바로 그 작은 별이 그림 전체를 조용히 지탱하고 있다. 희망은 처음부터 환하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는 사람에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② 끊어진 현, 그럼에도 이어지는 연주
와츠는 "나는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그린다."라고 말한 화가였다. 그의 그림 속 상징들은 대부분 삶에서 길어 올린 경험과 오랜 사유에서 태어났다. 《희망》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는 여섯 살 무렵 두 남동생을 잇달아 잃었고, 세 해 뒤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죽음을 마주한 경험은 그의 내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후 그는 사랑과 죽음, 희망과 구원이라는 주제를 평생 붙들며 수많은 상징적 작품을 남겼다.
《희망》을 완성하기 직전에도 또 하나의 비극이 찾아왔다. 와츠가 법적 보호자로 돌보던 블랜치 클로그스타운은 어린 딸을 병으로 잃었고, 그는 그 슬픔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와츠는 자신의 눈앞에는 불확실성과 갈등만이 가득하고, 기존의 믿음은 흔들리고 있으며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확신도 보이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바로 이러한 절망의 시간을 지나며 《희망》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이 작품을 단순한 상징화가 아니라, 개인의 상실을 인류 모두의 희망으로 확장한 작품으로 읽기도 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여인이 품에 안고 있는 고대의 현악기 리라가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줄은 이미 끊어져 있고, 단 하나의 줄만이 가까스로 남아 있다. 여인은 그 마지막 줄에 귀를 가까이 댄 채 조용히 연주를 이어 간다.
현실적으로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내기 어려운 악기다. 눈은 가려져 있고, 남은 줄마저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여인은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미술사에서 《희망》은 빅토리아 시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산업혁명과 급격한 도시화,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기존의 가치와 신앙에 깊은 균열을 가져왔다. 와츠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며 눈앞의 현실보다 인간 내면의 근원적인 고독과 믿음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그에게 희망은 현실을 외면하는 낙관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마지막 한 줄을 붙잡고 연주를 멈추지 않는 인간의 태도였다. 그래서 이 그림은 희망을 설명하는 작품이라기보다, 절망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에 가깝다.
③ 판도라의 상자가 남긴 철학적 유산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는 흔히 인간의 호기심이 불러온 재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희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기도 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질병과 가난, 슬픔과 상실,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재앙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황급히 뚜껑을 닫았을 때 상자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것이 바로 희망이었다.
철학자들은 오래도록 의문을 품어 왔다. 왜 하필 희망은 재앙들과 함께 같은 상자 안에 머물러 있었을까.
어쩌면 희망은 고통이 없는 세상에서 피어나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절망이 삶을 모두 뒤덮은 뒤에도 인간이 끝내 놓지 않는 마지막 내면의 자원이기에, 가장 깊은 곳에 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와츠의 그림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눈을 가린 천은 미래를 분명히 볼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끊어진 줄은 이미 지나온 상실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한 줄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기에 품는 낙관이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이며 삶을 향한 의지인지도 모른다.
④ 마지막 한 줄을 퉁기는 밤
소중한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뒤의 삶은 줄이 거의 끊어진 리라를 손에 쥔 여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함께 나누었던 시간도, 미래를 향한 약속도, 익숙했던 일상의 리듬도 어느 날 갑자기 끊어져 버린다. 남겨진 사람은 거대한 우주 한가운데 홀로 놓인 듯한 깊은 고독을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삶은 더 이상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슬픔을 오래 견딘 사람들은 언젠가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아직 끊어지지 않은 마지막 한 줄이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먼저 떠난 이가 남겨 둔 기억일 수도 있고, 끝내 지켜 내고 싶은 약속일 수도 있으며,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작은 이유 하나일 수도 있다.
비록 눈은 가려져 있고 주변은 적막뿐일지라도, 그 한 줄을 조용히 쓰다듬으며 하루를 살아가는 일. 어쩌면 그것이 희망의 가장 본래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
와츠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희망은 거창한 승리의 노래가 아니다. 거의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도 마지막 한 줄을 끝내 놓지 않는 인간의 조용한 용기이다.
희망은 절망이 사라진 뒤에 피어나는 꽃이 아니라,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마지막 한 줄의 연주를 멈추지 않는 인간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묵묵한 몸짓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 앞에서 오래도록 불러 온 가장 아름다운 찬가일 것이다.
---
🎨 작품 캡션
희망
조지 프레더릭 와츠, 1886, 캔버스에 유채, 142.2 × 111.8cm, 테이트 브리튼 소장.
눈을 가린 여인이 대부분의 줄이 끊어진 리라를 품에 안고 마지막 남은 한 줄을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빅토리아 시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희망을 낙관이나 확신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태도로 형상화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 작품 캡션
눈을 가린 여인이 대부분의 줄이 끊어진 리라를 품에 안고 마지막 남은 한 줄을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빅토리아 시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희망을 낙관이나 확신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태도로 형상화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