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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치지 말고 살라
만발다 보살님이 책상 위에 소국을 올려놔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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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와 출세간사를 쌍으로. 어디에도 치우치지 말고 실천하라, 살라.”
큰스님께서 화엄경 강설 54권에 ‘권실쌍행(權實雙行)’이라는 글자를 써주셨다.
“여자이면서 남자로도 살고 남자이면서 여자로도 살고. 출가인이면서 재가인으로 살고 재가인이면서 출가인으로도 살고. 어디에도 매이지 말고.”
하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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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 왔는데 스님들이 많이 오셨네.”
큰스님께서 기뻐하시면서도 해인사에서 오신 스님에게는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다.
“비 많이 오거든 오지 마. 인터넷 보제? 염화실 보제? 책은 나중에 와서 챙겨가면 되고 조심해야 돼요.”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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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사에서 나온 성엄스님의 <바른 믿음의 불교>는 큰스님이 대중스님들께 법공양해주신 책이었다. 글씨도 또렷해서 시각적으로도 좋고 재생용지를 사용해서 책이 가벼웠다. 큰스님이 고대하시던 책이어서 번역하시는 대성스님에게 빨리 번역해 달라고 재촉도 하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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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당 조해종 불모가 불화집 도록을 대중공양 올리셨다. 표지를 보고 큰스님이 석정스님 글씨라고 금세 알아보셨는데, 제목은 석정스님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석정스님께 10년간 공부를 한 유발상좌라고 본인소개를 하셨다. 9월에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를 앞두고 있고 이번에 어느 절 대웅전의 상단탱화와 신중과 감로탱화 불사를 맡았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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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불교요지인데 한 20년 전에 변설호스님이라고 유명한 강사스님이 계셨어.”
하고 큰스님께서 법공양실에서 만난 회장스님에게 새로 찍은 4절지 프린트를 보고 말씀하셨다.
“그 스님 글씨야. 변영세(卞榮世), 이 스님이 변 설호(雪醐) 스님이야. 보원스님이 올린거야.”
큰스님의 상좌스님이신 보원스님이 ‘옛날에 공부하다가 꿍쳐놓은’ 1955년도에 처음 인쇄한 도표가 63년 만에 빛을 받고 법공양으로 대중스님들께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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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서 오신 비구니 스님은 몇 번이고 큰스님께 ‘저를 아시느냐’고 확인하셨다. 그동안은 무릎이 아파서 못나오셨는데 책상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셨다고 했다.
“책상 해놨으니까 자주 와요.” 하고 큰스님이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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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로 출가하신 비구니 스님이 여러 가지 선물을 가져오시면서 그동안 겪은 특이한 외모변화도 이야기 하셨는데 큰스님은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좋아요.’라고 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본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대방광불화엄경강설 54권 점안을 하겠다.
벌써 이세간품 두 번째 권이다.
서문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공원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나고 죽음이 보살의 공원이니
싫어서 버림이 없는 연고이니라.
중생을 교화함이 보살의 공원이니
지치거나 게으르지 않은 연고이니라.
일체 겁에 머무름이 보살의 공원이니
모든 큰 행을 포섭하는 연고이니라.
청정한 세계가 보살의 공원이니
스스로 머무는 곳인 연고이니라.
일체 마(魔)의 궁전이 보살의 공원이니
저 무리들을 항복받는 연고이니라.
들은 법을 생각함이 보살의 공원이니
이치와 같이 관찰하는 연고이니라.
여섯 가지 바라밀다와 네 가지 거두어 주는 일과
서른일곱 가지 보리의 부분법이 보살의 공원이니
인자한 아버지의 경계를 이어받는 연고이니라.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법과
내지 모든 부처님의 법이 보살의 공원이니
다른 법을 생각지 않는 연고이니라.
모든 보살의 위엄과 자유자재한 신통을 나타냄이
보살의 공원이니
큰 신통한 힘으로 바른 법륜을 굴리어
중생 조복함을 쉬지 않는 연고이니라.
잠깐 동안에 모든 곳에서 일체 중생에게
바른 깨달음 이루는 일을 보이는 것이 보살의 공원이니
법신이 온 허공의 모든 세계에 두루 한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여래의 위없는 근심을 여읜 크게 안락한 행을 얻느니라.
2017년 2월 1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자주 말씀드리지만 화엄경 39품 중에서 나는 이세간품을 특히 강조한다.
여기에 ‘공원’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을 ‘놀이터’라고 표현하면 더 리얼하다.
‘나고 죽음이 보살의 놀이터다’ 소승불교는 어떻게 하더라도 나고 죽음을 떠나서 무위열반의 세계에 안착하려고 한다. 부파불교가 되면서 대중불교가 발전을 하고 소승불교는 상좌부 불교로 남아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데, 소위 남방불교, 근본불교, 초기불교 등 여러가지 표현을 많이 쓴다.
근래 우리나라에 초기불교 근본불교 강의나 법회가 상당히 성행을 하고 있다. 거기도 경전을 떠나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안되기 때문에 경전을 강의하는데 보면 우리의 전통 간화선(看話禪)과 뒤섞어서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정직하게 말한다면 한국 불교 현실과 야합하는 표현이다. 근본불교만 가지고 이야기 하려면 그렇게 귀에 달콤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근본불교를 가지고 이야기하려면 근본불교의 이치에 맞게 하고, 아니면 ‘이것은 선불교다’‘전통 간화선 불교다’‘대승사상이다’ 이렇게 두부모 자르듯이 잘라서 이야기 해줘야 한다.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고 죽음이 보살의 놀이터다’라는 이 말에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근본불교나 초기불교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고 죽음을 벗어나서 더 이상 이 세상에 오지 않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영원히 끝내는 것으로써 최종목적을 삼는다.
그런데 그렇게는 될 수 없는 것이 이치다. 잘못 본 것이다. 이치로 보면 누구든지 다 윤회하게 되어 있다. 지금 티벳 같은 데서는 환생이 확인된 사람만도 수 백명이 현존하고, 우리가 잘 아는 달라이라마 같은 분은 열 네 번이나 환생한 것이 확인되었다.
간혹 우리 주변에도 보면 ‘어떤 큰스님이 돌아가셔서 어느 집에 태어났다’고 하는 소문을 많이 듣는다. 향곡스님도 그렇고 지호스님도 그렇고 몇몇 스님들의 이야기도 듣고, 특히 일타스님은 일타스님 스승의 문제 당신의 문제 또 당신의 상좌까지도 ‘어디에서 누구로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 역시 그러한데 다만 확인이 안됐을 뿐이다.
어쩔 수 없이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 보살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서 생사고락을 중생들과 함께 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대승불교의 아주 특징적인 모습이다.
또 ‘일체 마(魔)의 궁전이 보살의 공원이다’라는 표현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더라도 마구니의 궁전을 떠나려고 하고 외면하려고 하고 멀리 도망가려고 한다. 그런데 거기가 우리의 놀이터이고 우리의 공원이 되어야 한다.
마구니도 함께 항복 받고 교화하고 성숙시키는 입장, 그런 자세가 되어야지 외면하고 도망가려고 하고 어떻게 하더라도 나하고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하는 자세는 진정한 부처님 마음으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다.
그런 내용들이 여기 이세간품에 잘 녹아있다.
그런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권실쌍행(權實雙行)이다. 방편과 진실을 쌍으로 행해서 사는 것이 중도적인 삶이고 그것이 바람직한 대승불교의 길이다.
화엄경을 공부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런 문제들을 명확하게 선을 긋고 이해해야 된다.
선을 긋고 이해해야 하는데 분명하게 이치를 알지 못하면 이해를 못하고 설명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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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엄선사의 <108자재어>를 현재까지 13만권이나 찍어서 법공양을 하고 있다. <108자재어>는 20개 국어로 번역이 되었으니까 성엄스님 책 중에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책이고 지금 소개하려는 <바른 믿음의 불교>는 영문판 중국어판 해서 300판 이상을 찍은 책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성엄선사의 이 책을 고대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제사 소개가 됐다. 나는 탐구사의 대성스님에게 ‘왜 이 책을 빨리 번역을 안하냐’ ‘딴 책만 번역을 하고 이 책은 왜 번역을 안하느냐’ 독촉을 했다.
이제 이 책이 번역이 되어서 나와서 우리가 이 책을 받아 보게 되었다.
제목이 <바른 믿음의 불교>라고 했듯이 불교를 바르게 아는 것이 참 중요하다.
원래 제목은 <정신적불교(正信的佛敎)>라고 되어 있는데 70개의 문답을 가지고 불교에 대해 소상하게 잘 밝혔다. 여러 스님 중에 절을 가지고 포교를 하고, 포교 일선에 있는 분들은 이 책으로 강좌를 열어도 좋다. 아주 좋은 강좌 재료가 된다.
탐구사에 물어보지도 않고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인터넷 염화실 까페에 매일 조금씩 올리고 있다. 내가 운영하는 인터넷 염화실 까페는 회원이 2만명 이상 된다. 이 책의 내용을 매일 한 꼭지씩 올리고 있으니까 필요하신 분들은 거기에 가서 복사를 해서 자기 한글문서에 저장을 해서 입맛에 맞게 글씨를 만들고 프린트를 해서 신도들에게 나눠 주거나 강의를 해도 좋다.
책은 이미 제본이 되어 있으니까 원하는 부분을 편집하기 어렵지만 염화실에 가면 자기가 필요한 부분을 마음껏 복사하고 편집해서 사용할 수가 있다. <바른 믿음의 불교>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인용하면 신도들 교육 교재로 아주 잘 활용할 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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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양올린 도표 한 장은 내 상좌 보원이가 어디 걸망을 뒤지다가 옛날에 공부하다가 꿍쳐놓은 게 있어가지고 나왔는데 이게 너무 불교를 잘 정리했다.
이것도 불교 전체적인 졸가리를 취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심심하면 머리맡에 두고 펴서 누워서 봐도 좋고 앉아서도 보고 여러 번 숙지해야 되는 그림이다.
다른 것은 여러 스님들이 다 각자 공부하시기로 하고 제일 왼쪽 밑에 귀퉁이에 있는 그림 밑의 글을 한 번 보겠다.
1번 종암입암(從暗入暗)이라고 했다. 어두운 데서부터 시작해서 다시 어두운 데로 들어가는 인생이 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는 부처님 법을 만나서 종암입명(從暗入明)이다. 어두운 세속적인 삶에서 시작은 했지만 밝은 출세간의 삶, 불법의 삶, 보살의 삶을 우리가 공부하게 됐다. 얼마나 실천할지는 각자 평생의 과제지만 어두운 데서 출발해서 비로소 밝은 곳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은 참 근사한 이야기다.
그 다음은 종명입암(從明入暗)이다. 밝은 데서 이렇게 잘 중노릇을 하다가 아니면 불법을 만나서 불교의 신행생활을 잘 하다가 또 어떻게 타락을 해서 그만 아주 좋지 아니한 속된 삶으로 전락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본다.
한마디로 꼬집으면 이렇게 화엄경 공부를 잘하고 있는데 또 돌아가서는 엉뚱한 데서 휩쓸린다. 그것이 종명입암 밝은 데서부터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공부한 것이 물론 100퍼센트 생활화 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답도 없는 그런 엉터리 부류들에게 휩쓸려서 아까운 시간을 보낼 것은 아니다.
그것이 종명입암이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은 종명입명(從明入明)이다. 밝은 데서부터 출발해서 끝까지 밝은 데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부처님의 법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대승불교를 만났으니 앞으로 계속 보살행으로 그리고 바른 불교로 살아야 되겠다는 각오를 갖는다면 종명입명이 되는 것이다. 밝은 데서부터 또 밝은 데로 향해 나아간다.
이 도표에 이런 명언들이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불교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내용들로 꽉 차 있다. 한 두 시간에 설명이 다 될 문제가 아니니 여러분들이 공부로써 생각하고 열심히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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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당 조해종 선생님께서 불화하시는 분인데 도록을 공양 올렸다.
간혹 나는 ‘지금도 국악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순전히 나의 착각이다. 국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온다.
‘지금도 중노릇하는 사람이 있는가’하지만 끊임없이 중노릇 하는 사람이 있다. 계속 중노릇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3천년의 전통을 끊임없이 이렇게 이어받아서 100퍼센트 다 원만한 중노릇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래도 이 일이 좋다고 이어져 나오는 것이다.
불화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같은 시대에 누가 이런 불화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또 끊임없이 불화를 좋아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계승 발전하는 분들이 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알아줘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 중에 우리 중노릇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이 서로가 그렇게 상부상조 하는 내용이다.
이 시대에 이렇게 예스럽게 이런 그림을 그리고 현대적인 아름다움도 가미가 된 이런 그림을 보니까 너무나도 좋다. 이러한 좋은 것을 우리 스님들이 이해해주고 그리고 동참할 수 있으면 동참해 주고 전시회도 가서 한 번 봐주고 한다면 이런 일을 하는 분들에게는 더욱 용기가 나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전혀 내 상식으로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또 거기에는 그 나름의 그야말로 화장장엄 세계가 그곳에 펼쳐져 있는 것들을 우리가 가끔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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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강의는 332쪽(화엄경 제2권 민족사刊) 금강당 보살의 게송부터 할 차례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三十一
十廻向品 第二十五之九
11, 第九無着無縛解脫廻向
(14) 金剛幢菩薩의 偈頌
가, 廻向의 善根
爾時에 金剛幢菩薩이 承佛神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普於十方無等尊에 未曾一起輕慢心하고
隨其所修功德業하야 亦復恭敬生尊重이로다
所修一切諸功德이 不爲自己及他人이라
恒以最上信解心으로 利益衆生故廻向이로다
未嘗暫起高慢心하며 亦復不生下劣意하고
如來所有身等業을 彼悉請問勤修習이로다
所修種種諸善根이 悉爲利益諸含識이라
安住深心廣大解하야 廻向人尊功德位로다
그때에 금강당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살펴보고 게송을 설하였습니다.
시방에 같을 이 없는 어른님께
한 번도 소홀한 마음 일으키지 않고
닦으신 그 공덕과 업을 따라서
또다시 공경하고 존중한 마음 내도다.
수행한 일체 모든 공덕을
자기나 다른 이를 위하지 않고
언제나 가장 높은 신심으로써
중생에게 이익 주려고 회향하도다.
잠깐도 교만한 마음 내지 아니하고
또한 다시 못난 생각도 내지 않으며
여래의 몸과 말로 하시는 업(業)을
그가 모두 물어서 부지런히 닦아 익히도다.
닦은 바의 가지가지 모든 선근은
중생에게 이익 주기 위한 것이니
깊은 마음 광대한 이해(理解)에 안주하여
높은 어른 공덕의 지위에 회향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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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째 무착무박해탈회향(第九無着無縛解脫廻向)이다. 열 가지 회향이 있는데 이 이름이 워낙 좋은 이름이어서 어떤 불자님은 ‘무착무박해탈심, 무착무박해탈심’하고 염불하듯이, 관세음보살 이름 부르듯이 읊조리면서 포행을 하고 산책을 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나도 아주 공감을 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곳에 집착을 하고 또 얼마나 많은 곳에 속박을 하는가. 그런데 내가 집착하고 속박하는 그것은 과연 그렇게 집착하고 인생을 걸어서 속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과연 그럴 가치가 있어서 집착을 하고 거기에 속박을 당했는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한낱 흘러가는 구름과 같고 꿈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한 생을 다 집착하고 속박해서 살아온 것들을 되돌아보게 되면 어이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말 한마디가 그만 가슴을 쾅 때리고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다.
무착무박해탈심.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는 그런 해탈하는 마음, 모든 것에서부터 해탈해 버린 편안하고 자유로와진 마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 이 불경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뛰어난 깨달음에서 나온 한마디 한마디다. 그래서 무심코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이런 것들이 가슴에 와 닿을 때는 그야말로 한 줄기 눈물을 흘리기에 충분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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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당보살(金剛幢菩薩)의 게송(偈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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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회향을 게송으로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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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廻向)의 선근(善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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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 이시에
금강당보살(金剛幢菩薩)이: 금강당 보살이
승불신력(承佛神力)하사 :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 시방세계를 널리 관찰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게송을 설해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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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시방무등존(普於十方無等尊)에 : 널리 시방 무등존, 그 누구와도 같을 이 없는 어른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다. 거기에
미증일기경만심(未曾一起輕慢心)하고 : 한 번도 일찍이 가벼운 생각을, 가벼워 하는 마음 가벼운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옛날에 어떤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면서 좁쌀 한말을 부처님 앞에 올리고 갔는데 그만 시험을 뚝 떨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법당 옆에서 담뱃대를 툭툭 때리면서 ‘그래 오냐 내 좁쌀 한 말 잘 따먹고 얼굴이 놀놀해져가지고 그래 앉아서 사람들이 갖다 주는 좁쌀이나 뚝딱 따먹고 있느냐’고 뭐라고 하다가 부처님 앞에 담뱃대를 막 휘저으면서 꾸중을 했다. 그런 이야기를 어릴 때 들었다.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보라. 부처님도 모르고 불경도 모르던 선비지만 그래도 이웃에 절이 있고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이니 ‘내가 부처님한테 좁쌀이라도 한 말 올리고 가서 과거시험을 보면 그래도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좁쌀을 올렸는데 그만 시험에 떨어졌다. 쌀을 올렸더라면 좀 어땠을지, 가난한 동네니까 좁쌀 한 말도 사실 은 대단하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 모신 쪽으로는 발을 뻗어서도 안 되고 부처 불(佛)자를 쓴 종이도 함부로 버려서도 안되고 반드시 태우든지 한다.
경전을 사경해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 거기에는 부처 불(佛)자 부처님 말씀이 가득히 있기 때문에 그것을 태워야 된다. 제대로 모시지 못할 경우는 태워야 옳고 그렇게 하는 것이 불자의 도리고 불교를 믿는 사람의 마음이다.
일찍이 한 번도 가벼이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수기소수공덕업(隨其所修功德業)하야: 그의 닦은 바 공덕업에 따라서, 부처님의 공덕업이다. 부처님의 공덕을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는가.
화엄경 마지막 부분에는 ‘찰진심념가수지(刹塵心念可數知)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이라고 하였다.
찰진심념가수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유정 무정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 헤아리고 대해중수가음진 저 큰 바다 물을 다 마시고 허공가량풍가계 이 드넓은 허공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를 다 헤아려 알고 또 바람도 휘어잡을 수 있는 능력이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무능진설불공덕 능히 부처님의 공덕은 말할 수가 없다.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얼마나 근사한가. 부처님은 그런 분이다. 그런 업을 따라서
역부공경생존중(亦復恭敬生尊重)이로다 : 또한 다시 공경하면서 존중하는 마음을 한 번 더 낸다. 늘 공경하고 존중하지만 한 번 더 부처님의 공덕을 되뇌이고 더 생각한다.
나는 어디서 커피를 한 잔 맛있는 것을 얻어먹어도 부처님 공덕이라고 생각한다. 그 뿌리를 찾아 들어가 보면 전부 부처님의 공덕이다. 내게 커피를 건네 준 사람은 바로 앞의 사람이지만 내가 스님이 아니면 누가 나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했을 리가 없다. 근원을 따져가면 일상생활이 전부 부처님의 공덕이다. 그렇게 알아야 된다. 전부 부처님의 공덕이므로 그 공덕을 찬탄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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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일체제공덕(所修一切諸功德)이 : 닦은 바 모든 공덕들이
불위자기급타인(不爲自己及他人)이라: 자기를 위한 것도 아니고 타인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항이최상신해심(恒以最上信解心)으로 : 항상 최상 가는 믿음과 이해의 마음으로써
이익중생고회향(利益衆生故廻向)이로다: 만 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위한 까닭으로 회향하는도다. 참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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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잠기고만심(未嘗暫起高慢心)하며: 일찍이 잠깐도 내가 잘났다, 내가 훌륭하다고 하는 고만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농담삼거나 장난삼아서라도 그런 잘났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역부불생하열의(亦復不生下劣意)하고 : 또한 다시 하열한 마음도 내지 않는다. ‘아 내가 이 못난 중생이’하는 것이 하열한 마음이다.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불성종자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부처님과 나와 똑같은 가치와 똑같은 자격과 똑같이 존중을 받아야 할 존재라고 하는 사실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자신을 비하해서 심지어 자기 생명을 함부로 한다든지 하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열심은 고만심만 못하다. 하열심을 내느니 차라리 자기가 잘났다고 우쭐대는 고만심을 내는 것이 낫다. 물론 둘 다 잘못된 마음이지만 하열심이 더 못쓰는 마음인 것이다.
여래소유신등업(如來所有身等業)을: 여래께서 가진 바 신업 이것은 신구의(身口意), 신업 구업 의업까지를 다 말한다.
피실청문근수습(彼悉請問勤修習)이로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청하고 물어서 부지런히 수습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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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종종제선근(所修種種諸善根)이 : 닦은 바 가지가지 모든 선근이
실위이익제함식(悉爲利益諸含識)이라: 다 모두가 제함식들을 이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십회향품에서 회향의 정신이다.
내가 어떤 공덕을 짓든지 어떤 선행을 하든지 아무리 작은 일을 하더라도 중생들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한다고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나나 어떤 특정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저 앞에 자기급타인이라고 하는 것의 타인은 어떤 특정인을 두고 하는 소리다. 그런 것이 아니고 만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라는 뜻이다.
안주심심광대해(安住深心廣大解)하야: 깊고 깊은 마음 광대한 이해에 안주해서
회향인존공덕위(廻向人尊功德位)로다: 인존공덕위 가장 높은 사람, 사람으로서 가장 높은 사람의 공덕의 지위에 회향함이로다. 이것이 결국은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다. 자신도 타인도 일시에 다 불도를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는 자세 그러한 마음이다. 그 마음으로 회향을 하는 것이다.
회향의 선근을 그렇게 이야기 했고 다음으로는 세간법에 대해서 나온다.
나, 世間法
世間所有無量別하니 種種善巧奇特事와
麤細廣大及甚深을 靡不修行皆了達이로다
世間所有種種身에 以身平等入其中하야
於此修行得了悟하니 慧門成就無退轉이로다
世間國土無量種이라 微細廣大仰覆別이어든
菩薩能以智慧門으로 一毛孔中無不見이로다
세간의 한량없이 차별한 일과
가지가지 공교롭고 기특한 일에
크고 작고 광대하고 깊은 것들을
모두 다 수행하여 통달하도다.
세간의 가지가지 있는 몸들에
이 몸으로 평등하게 다 들어가고
이렇게 수행하여 깨닫게 되면
지혜문(智慧門) 성취하여 퇴전하지 않도다.
세간의 국토들이 한량이 없어
작고 크고 잦혀지고 엎어진 것을
보살들이 지혜의 밝은 문으로
한 모공(毛孔)속에서 모두 다 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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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법(世間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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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소유무량별(世間所有無量別)하니 : 세간, 세상에 있는 것이 얼마나 여러 가지인가.온갖 것이 한량없이 다르다. 사람도 얼굴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다른 것으로 보면 전부가 다 다르다.
종종선교기특사(種種善巧奇特事)와: 세간에 여러 가지 다른 것이 있고 또 가지가지 아주 익숙한 기술이라든지 어떤 일들 예를 들어서 탱화를 그리는 사람은 탱화에 소질이 있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글씨에 소질이 있고 컴퓨터 잘하는 사람은 컴퓨터에 소질이 있다. 그 능력 따라서 타고난 기술을 선교(善巧)라고 한다. 선교기특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이 전부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다.
추세광대급심심(麤細廣大及甚深)을 : 아주 거친 것 미세한 것 넓은 것 큰 것 그리고 매우 깊은 것들 그런 것들을
미불수행개요달(靡不修行皆了達)이로다: 수행해서 요달하지 아니함이 없더라.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우리의 전통은 길게 잡으면 3천년의 전통이다.
현재 우리가 쓰는 불기(佛紀)도 중간에 계산이 잘못되어서 이천육백년이라고 하지만 구불기, 전통 불교는 삼천 년의 역사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끊임없이 ‘3천년 3천년’이라는 말을 했다.
그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의 모습, 우리의 정신, 우리의 일상, 우리의 의식,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가지고 하는 일들이 3천년의 역사를 가진 것들이다.
스님들이 머리를 깎는 것도 3천년이 됐고 먹물 옷 입고 가사 입는 것도 3천년 전통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예불하는 것도 3천년 전통이고 경전을 놓고 읊조리는 것 염불하는 것 참선하는 것 전부가 3천년의 전통이다. 사실 이것은 보통 보물이 아니고 보통 문화재가 아니다. 그것을 알아야 된다.
내가 몇 살 되었고, 비록 나는 몇 살 밖에 안됐지만 내가 하고 있는 행은 3천년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고 또 뒷사람들에게 이어서 전해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하고 있다고 해서 꼭 거기에 안주해서만은 안된다.
현실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어떤 과학적인 어떤 발전, 발전사가 있다.
전통이 이(理)라면 현실은 사(事)다. 이와 사가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
우리의 이적(理的)인 전통은 3천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안주해서 자동차 운전도 못하고 컴퓨터도 못하고 핸드폰도 안갖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 내 도반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이(理)와 사(事)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도 공기는 오늘의 공기를 마신다. 3천년 전의 공기를 마시는 것은 아니다. 음식도 금년의 음식을 먹는다. 최소한도 봄이면 봄의 음식을 먹고 여름에는 여름의 음식을 먹는다.
치문(緇門)에도 보면 글씨를 쓰되 구름이 날아가듯이 글씨를 쓸 줄 알아야 된다고 하였다. 전에도 내가 이야기 했지만 TV에 나와서 강의를 하면서 판서를 하는데 막 그냥 지멋대로 그냥 막 갈기는 글씨를 쓴다. 딴에는 잘 쓴다고 그렇게 자랑삼아 갈기는 것인지는 몰라도 도대체가 남 앞에서, 그것도 TV를 찍는 앞에서 그렇게 쓰려면 아예 쓰지 말던지 해야 한다. 손으로 쓰는 글씨도 좀 정확하게 남이 알아볼 수 있도록 써야 되지만 또 이 시대는 컴퓨터도 다 해야 된다. 그것이 필수조건이다.
축원문 한 장이라든지 예를 들어서 신도들에게 기도 안내문을 보낸다든지 하는 것도 자기가 편집하고 자기가 글쓰고 자기가 글자 크기 같은 것도 딱 맞춰서 출력할 줄 알아야 한다. 여러 장을 출력하든지 아니면 너무 글자 수가 많으면 복사기 사다놓고 복사기에 따로 5백장, 1000장을 복사해서 착 보내고 그 정도는 주지가 할 줄 알아야지 그것도 못하고 전부 사무원한테 미루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일찍이 인터넷에 다음까페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
어지간한 사찰에는 홈페이지가 다 있다. 홈페이지 관리를 할 줄 알아야 된다. 홈페이지가 안되면 까페라도 해야 된다.
내가 만든 까페는 회원이 2만3백명인가 그렇다. 2만 명이 넘은 지가 오래 됐다.거기에 이 강의를 전부다 올리니까 조계종에서 상도 주었다. 한 번은 상패도 주었다. 스님으로서 그렇게 까페를 열어서 까페를 통해서 불자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이들이 별로 없다. 잡다한 것을 이것저것 많이 백화점처럼 끌어만 놓았지 어느 본사도 제대로 알뜰하게 실속있는 공부가 되는 까페나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곳이 잘 없다. 그런 내용을 잘 아니까 상도 주고 했는데, 스님들은 그렇게 특색 있는 자기만의 까페를 자기가 관리하고 운영할 줄 알아야 된다. 또 요즘 핸드폰에 문자를 보낸다든지 카톡으로 문자를 보내고 하는 문제라든지 하는 사적인 면도 조화를 이뤄 가면서 3천년 전통의 중노릇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로 같이 익혀서 조화를 이루면서 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중도적인 삶이고 이와 사가 조화로운 삶이다.
무슨 도통해서 특별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저 말만 도통 견성 성불 이러지 현실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어떤 삶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괜히 말만 그러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이와 사를 겸해서 이도 할 줄 알고 사도 할 줄 알고 그렇게 해서 조화를 이뤄서 바람직한 교화를 해야 된다는 말씀이 되겠다.
세간소유종종신(世間所有種種身)에 : 세간에 있는 가지가지 신(身), 이것은 신분이다. 세상사람들의 신분에
이신평등입기중(以身平等入其中)하야 : 내 이 몸으로써 평등하게 그들 가운데 들어간다. 예를 들어서 대통령을 만나도 그대로 스님의 신분으로 대통령을 만나고, 청소부를 만나도 스님의 신분으로서 청소부를 만난다.
거지를 만나도 스님의 신분으로 그냥 만나고 세간소유종종신에 대해서 이 몸을 가지고 평등하게 그 가운데로 들어간다.
부처님이 그 당시 바라문 찰제리 평민 천민 그 밑에는 불가촉천민이라고 되어 있는 신분제도를 다 무시하고 출가수행자로 내놓은 지위가 사문(沙門)이다.
사문은 아무데나 다 통한다. 사문의 무리에 들어오면 종으로 출가했든지 아니면 왕족으로 출가했든지 바라문으로 출가했든지 상관없이 오는 순서대로 앉는다. 사문은 특별한 계급이다. 거기에는 무슨 과거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문이라고 하는 계급을 만든 것이다. 하나뿐이니까 그건 계급이라 할 것도 없다.
스님들은 승복을 입으면 어디에든 다 통한다. 거지에게도 통하고 거지가 보면 자기 친구로 알고 순경이 보면 자기하고 비슷한 사람으로 알고 군인이 보면 또 역시 군인 졸병을 만나도 자기하고 비슷한 사람인 줄 알고 군인 중에 별을 단 사람을 만나도 역시 스님은 똑같이 대하는 것이다. 신기하다.
내가 언젠가 이야기 했는지 모르지만 월내라는 곳에 향곡스님이 건설한 관음사, 묘관음사라고 하는 절이 있다. 그 근처에 철길이 바닷가로 지나가는데 그 때는 기차도 몇 번 안다녔다. 거기서 여름을 한 두 철을 날 때 어느 한철에는 오후 방선(放禪)을 하고 나면 거기에 나가서 석양이 지는 것을 보며 바람을 쏘이곤 했다. 지금도 내 눈에 젊은 거지가 깡통에 밥을 얻어 가지고 가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절뚝 절뚝 철길을 지나는 광경이 선하다. 철길 옆 산 언저리에 거지들이 움막을 지어놓고 살았다.
그 중에는 더러 절에 밥도 얻어먹으러 오고 또 무슨 재가 있으면 떡도 얻어먹으러 오곤했다. 우리도 그런 것을 준비해 놓았다가 그 사람들에게 주기도 했다.
스님들이 친절하게 해주고 자주 오가서 익숙하게 되니까 해제할 무렵에는 이 사람들이 친해져서 “스님 한 번 뭐 물어봅시다.”라고 말을 걸어왔다. 뭘 물으려고 하냐고 물어보라고 하니까 “스님 뭐 할게 없어서 중노릇을 합니까?” 하고 물었다. ‘차라리 거지를 하지 왜 중노릇 하느냐’는 것이다. ‘차라리 거지하지 왜 중노릇 하느냐’‘뭐 할 게 없어서 중노릇 하느냐’ 그 소리 듣고는 내가 여러 번 법문에서 이야기를 하였다. 하도 감동 받은 이야기이고 워낙 감동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여러 번 이야기 한 것이다.
여기 종종신 모든 신분에 다 들어간다고 하였다.
여러 가지 신분에 다 들어간다. 거지들이 만나도 자기하고 같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기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통령을 만나든 국회의원을 만나든 장관을 만나든 우리 스님의 신분은 거기에 하나도 변화가 있을 까닭이 없다. 보살로서는 더 당당하다.
어차수행득료오(於此修行得了悟)하니 : 이것으로써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니
혜문성취무퇴전(慧門成就無退轉)이로다 : 지혜의 문이 성취되어서 퇴전함이 없음이로다. 3천년의 전통을 가진 우리 승려의 모습은 바로 그러한 존재다.
그런 존재 어떤 경우에도 다 통하는 사통오달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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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국토무량종(世間國土無量種)이라 : 세간의 국토 또한 무량종이라. 사람들만 신분만 무량한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기특한 일도 한량없이 많고 국토도 한량없이 많다.
미세광대앙복별(微細廣大仰覆別)이어든 :미세하고 광대하고 앙부별이어든, 우러러 있는 국토 엎어져 있는 국토 그것이 각각 다르다.
보살능이지혜문(菩薩能以智慧門)으로: 보살이 능히 지혜의 문으로써
일모공중무불견(一毛孔中無不見)이로다 : 일모공 가운데서 보지 아니함이 없더라. 한 모공 가운데서 그 모든 것을 다 본다. 그런 많고 많은 국토들, 지금 저 하늘에 떠 있는 그 많고 많은 별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태양이 얼마나 큰가. 그런데 저 큰 태양보다도 몇 백 배 몇 천 배 더 큰 별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 것들도 우리가 좀 상식적으로 알만치 알고 화엄경과 연관시켜서 이해하면 화엄경의 맛이 더 난다. 특히 성철스님 같은 이는 물리학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많이 했다. 그당시만 하더라도 성철스님 때는 ‘코스모스’라고 하는 책도 나오기 전이고 천문학이 그렇게 발달이 안되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물리학은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많이 했다. 심지어 최면술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최면술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최면술 중에서도 연령을 소급하는 것이 성철스님의 관심을 끌었다.
연령소급은 예를 들어서 50먹은 사람에게 최면술을 걸어놓고 ‘너는 40이다. 40먹은 너는 어디서 뭐하고 살았으냐?’ 하면 최면이 걸려서 그때의 이야기를 다하는 것이다.
그다음 30, 20, 10살 그 다음에 한 살 그 다음에 전생, 태어나기 이전 과거에 살았던 그 생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을 연령소급 하는 최면술이라고 한다.
그런 것들이 아주 크게 유행을 하고 많이 알려졌다. 최면술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와 있었다. 성철스님은 거기에 대해서 취미를 갖고 연령소급을 하는 최면술사를 데려다가 백련암에서 시켜보기도 하고 당신도 최면을 당해 보기까지 하셨다. 그런 것 까지도 다 아니까 불교를 설명하는데 아주 폭이 다양하고 또 불교를 좀더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계기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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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_()()()_
떡도 얻어먹으러 온(오?)곤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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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처럼 시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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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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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인터넷 강의를 듣다보니 위에 프린트물 말씀하시던데 다운 받아 제가 프린트 할수 있으면 좋을텐데...
자료를 검색해도 없으니~~~ 나무대방광불화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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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