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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동 골목에서
송 하 전 명 수
상덕사 답사를 마치고 인쇄골목을 거쳐 계산오거리를 건너간다. 옛날 고려예식장이었던 자리에는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초고층 아파트가 서 있다. 대략 30여 층은 됨직한데 신성건설에서 지은 주상복합아파트로 신성미소시티라 한다. 나이가 든 사람들도 그 곳에 고려예식장이 있었던 사실은 알아도 그 이전에는 어떤 곳이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인다. 서상돈선생 댁의 정원이 있었던 자리라고 홍장길 해설사님이 설명해 준다. 고층 아파트 뒤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고가가 나타나는데 이상화시인과 서상돈선생의 고택이다. 그 고택과 이웃하여 산뜻하게 꾸며 놓은 문화공간이 있으니 계산예가(桂山藝家)이다. 대구시 중구의 골목투어와 함께하고 이 지방 출신 문인들의 예술과 혼을 기리기 위하여 근대문화체험관으로 꾸며져 있는데 중구청에서 마련한 것이라 한다. 얼핏 보아 100평 쯤 되어 보이는 터에 영상실과 한옥전시실, 체험실 그리고 휴식공간이 갖추어져 있다. 계산예가는 골목투어의 시발점인 청라언덕에서 3·1로 90계단을 내려오면 이곳의 이상화, 서상돈고택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으며 계산성당, 약령시장 골목, 영남대로, 진골목을 거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위치선정이 아주 잘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문학사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이상화, 현진건, 백기만선생과 근대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한 박태준, 현재명, 권태호 선생과 근대미술계의 원로 서동진, 이인성, 이쾌대 등의 문화예술인이 살아온 길을 영상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근대에 세워진 대구 최초의 학교와 사진,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고 대구가 낳은 5인의 음악가가 남긴 노래를 골라 즉석에서 들어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먼저 음악가를 선정하고 노래제목을 선정하면 듣고 싶은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박태준의 노래 동무생각 1절을 들어 보았더니 감회가 새롭다.
계산예가 바로 옆에 위치한 이상화(1901.4.5-1943.4.25) 시인의 고택으로 들어선다. 전형적인 4칸 한옥이 남향으로 서있고 마루에는 시인의 흉상을 올려놓았으며 큰방에는 내외분의 사진이 각각 걸려 있다. 마당에는 석류나무와 맥문동이 심어져있는데 시인이 평소에 보리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보리는 그 수명이 짧아 보리와 그 생김새가 가장 흡사하고 사철 푸르게 자라는 맥문동을 심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개의 화강석 비석이 세워져있는데 이상화의 내력,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역천(逆天)시비이다. 1948년 대구 달성공원에 이상화의 대표작인 ‘나의 침실로’시비가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상화 시인은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이시우와 김신자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형인 상정, 아래로 상백, 상오 두 동생을 두었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한문공부를 하다가 중앙학교 3학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서기도 하였으며 3·1운동에 가담하였다. 일본에 체류 중 1923.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듬해 봄에 분노의 마음을 안고 귀국, 서울 가회동에 머물면서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였다. 그 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에게, 통곡, 역천, 나는 해를 먹는다, 서러운 해조’ 등 보석 같은 저항적인 서정시를 남겨놓았다. 1928년 독립운동 자금마련을 위한 대구의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구금되기도 하였으며 1936년에 형 상정장군을 만나기 위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북경, 상해를 거쳐 3개월 만에 귀국 후 다시 경찰에 구금되어 심한 고초를 당하였다.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하였는데 그 가사내용이 문제가 되어 가택수색을 당하였고 작품원고를 압수당하였다. 이러한 수차례의 고문으로 병세가 깊어져 1943.4.25 이곳 계산동2가 84번지 자택에서 43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산9번지의 가족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상화 시인은 근대시와 문학사에 태산 같은 발자취를 남겨놓았으며 폭풍처럼 살다간 애국자요 지조가 꿋꿋하여 저항정신으로 나라를 잃은 망국인의 책무가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여기서 고등학생 때 외웠던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읊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마음이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갑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선생 고택마당에 세워진 시비를 바라보며 울분에 젖은 그의 시상 속으로 빠졌다가 서상돈고택으로 들어선다. 서상돈(徐相敦, 1851-1913)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 공무원이었다. 그는 서울태생이며 가톨릭교도로 신유, 기해박해 등 고난을 겪었으며 문중에서 쫓겨나 어려서부터 생계유지를 위하여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일을 하였다. 1871년부터 대구에서 독학을 하면서 지물과 포목행상을 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경상도 시찰관에 임명 검세관(檢稅官)공무원이 되어 정부의 조세곡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 후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1907.2월 광문사의 김광제(金光濟)사장, 박해령 등 16명이 대구에서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여 금연운동을 벌려 나라의 빚을 갚자고 하였다. 당시 일본은 경제적으로 압박하기 위하여 1,300만원의 차관을 반강제적으로 제공하였으나 대한제국은 이를 갚을 능력이 없었다. 서상돈 등은 2천만 국민이 3개월간 금연으로 매달 20전씩 모으면 1,300만원은 모을 수 있다며 국체보상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언론기관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부자동네인 대구 진골목에 위치한 달성서씨 집안의 부인7명이 주동이 되어 남자들은 담배를 끊어 국채를 보상하겠다고 하는데 부녀자들도 다 같은 백성이요 국민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며 일어선 것이다. 비녀, 가락지, 반지를 팔아서 이에 호응하였으니 성산이씨 부인회, 진명부인회, 대한부인회에서 보상금모집소를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니 전국에서 28개 부인회가 동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운동이 일본까지 알려져 800여명의 유학생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 운동이 펼쳐진지 2개월 만에 4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3개월 후인 5월 말까지 230만 원이 거두어졌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매국집단 일진회를 앞세워 이 운동을 방해하였으며 통감부에서는 국채보상회 간사였던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죄를 뒤집어 씌워 구속하는 등 탄압을 자행하였다. 결국 양기탁은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국채보상운동은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강렬한 신념과 자발적으로 응집된 애국정신이 표출된 국권회복운동으로 평가될 뿐 만 아니라 1997년도 IMF구제 금융지원 요청 당시 전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을 펼친 본보기가 된 것이라 여겨진다. 서상돈선생은 어릴 적부터 고생하면서 열심히 일한 덕으로 재산을 많이도 모은 사람같이 느껴진다. 4칸의 아담한 본채 한옥과 두 채의 행랑이 서있고 넓은 마당과 정원을 갖추었으며 버젓하게 단 대문이 이를 증명해 주고도 남을 것 같다. 그의 아들 서병수는 이곳 정원에서 일본인들을 초대하여 가든파티를 벌리기도 하였다는데 이를 본 주변사람들은 친일파라 비아냥거렸다고 하나 결코 친일파라 할 수 없을 것이라 설명하였다. 아마도 그들과 친분을 가지며 우리나라와 백성들의 이익을 도모하였을 것이라 한다. 그 넓은 정원은 단양 우씨 집안의 어느 재력가가 매입하여 우리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고려예식장을 오래 동안 운영하다가 지금은 주상복합 고층아파트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담겨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중기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두사충은 이여송장군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수륙양군을 지원하고 돌아갔으나 뒤이어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매부 진린과 함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 얼마 후 정유재란은 평정되었고 두사충(杜思忠)은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살았던 곳이 이곳 계산동이다. 두사충은 함께 귀화하려던 전쟁의 책임자인 진린을 만류하여 압록강까지 배웅해 주며 명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그의 가족과 함께 귀화하려 하였으나 부인은 거절하여 두 아들과 함께 삼부자가 귀화였다고 한다. 두사충은 시성 두보의 후손인데 풍수지리학자이기도 한 모양이다. 처음에는 중구 포정동 소재 경상감영자리에 터를 잡으면서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 자리는 하루에 천양씩 들어오는 터다.”라고 하였다. 그 후 1601년 경상감영이 안동에서 대구로 옮겨 오면서 두사충의 집과 이곳의 토지를 대토하게 되었는데 감영의 집터 보다 훨씬 넓은 현 위치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곳은 땅이 비옥하였는데 두사충은 공자의 말을 생각하고 뽕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교 윤택하게 하려면 누에를 길러 비단을 생산하여야 한다는 말을 실행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 골목을 뽕나무골목으로 명명하였으며 계산성당 담장 밑에 8그루의 뽕나무를 심어 놓았다고 한다. 그 후에 대명동으로 이사하였고 매월 초하룻날 명나라가 있는 북쪽을 향하여 제를 올렸다고 하며 주위 사람들은 그를 대명처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곳을 대명동이라는 동명을 붙이게 되었는데 대구에서 대명동이 가장 넓은 동이 되어있다. 그는 부자(父子)와 함께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모명재(慕明齋) 뒤 형제봉기슭에 잠들어 있다. 모명재는 두사충의 고향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 담긴 재실로 그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다른 지방에서 대구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한나절은 이곳에서 문학과 시, 음악과 그림을 이야기 할 수 있겠고 대구의 근대사를 되돌아보며 선각자들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다. 한낮의 기온은 점점 높아져가고 시장기도 드는데 성의를 다하여 해설해주신 단장님께 막걸리 한잔 사 드리지 못하고 총총걸음으로 발길을 옮겨야 하였다. 조카 혼사일로 형제자매 가족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다음 시간에 홍단장님께 오늘 이야기를 하면서 대포 한 잔 올리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 조국의 근대사와 골목문화에 관하여 더욱더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겠다는 다짐도 하였다. 한 나절 동안 매우 유익한 기회를 가졌음에 마음은 풍성하여 더없는 부자가 된 느낌이다.
첫댓글 전명수님의 글을 읽게 될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송하 호 만으론 모르고 지나칠번 하다가 제목이
골목 해설과 무관하지 않다 싶어 열게 되였아온데
엄청난 량의 장문의 투어기를 읽는 행운에 감사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함께 동행 했을 뿐인데 기본 지식을 갖추신 분이셔서 인가요?
정말 세심하게 곳곳에 담겨진 많은 역사 스토리를 간과 하지 않으시고
이렇듯 좋은글로 남겨 주실수 있음이 역시 수필 작가님 이 십니다,
세편째 읽는 중이온데 올려주신글을 계속 공부 하는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이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