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수명
최봉호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그게 궁금하여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통계청의 최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2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기대수명이 팔십삼(83) 세라고 한다. 이 수치는 현재의 사망률이 앞으로도 계속 된다는 가정 하에 계산된 평균적인 확률 값이다. 이 말은 83세 이전에 죽는 사람들도 있고 이 나이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기대수명인 83세 전후해서 죽는다는 사람들이 가장 많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지금 사람들의 수명은 옛날보다 참 많이 길어졌다. 지난 ‘70년에는 평균 기대수명이 육십이(62) 세에 불과했다. 나의 할아버지는 ‘69년에 돌아가셔, 환갑을 채 치르지 못하셨다. 60세 전후였던 가대수명이 지금은 83세나 되니, 요즘 사람들은 그 때 사람들보다 무려 20여년이나 더 오래 사는 셈이다.
이런 평균 기대수명이 맞는다고 하면 내 경우 대략 15년 정도 남는다. 내가 염세주의자라면 ‘인생의 칠분지육(6/7)은 지났고 1/7만 남았네.’ 하고 아쉽다고 여길 것이다. 앞으로의 15년. 긴 시간인가 짧은 시간인가? 그나마 건강한 상태에서 15년이면 좋으련만, 인간사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어 판단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말한 건 평균에 근거한 나의 생각이다.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라 얼마든지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 남은 15년을 어떻게 보내는 게 바람직할까? 정년퇴직 후 지난 10년간은 돈 벌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한편, 공부와 봉사활동에도 열중하였다. 앞으로의 10년 은 지난 10년간 했던 것들과 내용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체력이 허락하면, 공부와 봉사활동을 계속 하고 싶다. 공부는 주로 어학공부와 글쓰기 공부를, 봉사활동은 마술과 문해 교육 및 인권증진 활동 등이 될 것 같다.
그렇게 10년을 보내고 나머지 5년은 나를 정리하는 시간으로 하고 싶다. 산짐승들은 동면하러 굴속에 들어갈 때 문턱에서 자기의 발자국을 지운다고 한다. 자기가 쌓았던 것들을 털어버리고 본래대로 돌아간다는 의미이겠다. 나도 나의 동면에 들어가기 전에 정리를 해야겠다.
에세이 창시자인 몽테뉴는 “죽음에 대해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죽음에 대항하여 나간다면 불안과 공포에 직면하는바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서른세(33)살로 생을 마친 예수와 알렉산더 대왕을 언급하면서 서른여덟(38) 살인, 자기는 “평균수명을 넘어 살았으니 죽음에 대해 걱정과 불안을 가질 필요가 없다.”라고 강조했다. 당시는 평균 기대수명이 서른 살에 불과했을 때라 몽테뉴는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리고 “죽음은 예측하지 않은 순식간의 죽음이 가장 이상적이며 최고의 행운”이며, “결국 “죽음은 우주의 질서 가운데 자연스럽게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몽테뉴, ‘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다’에서).
현대의 작가인 김훈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칼럼을 쓰기 위해 화장장을 찾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한없이 고운 가루 어찌 죽음과 싸우겠는가?” 라며 탄식을 내뱉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 생활하듯이,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끝으로 프랑스 현대 철학자인 들뢰즈의 얘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는 죽음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소멸이 아니라 생성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만족하는 것들을 부정하고,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보다 치열하게 살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나는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차이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고자 한다. 매일 매일의 일상을 지루하다 생각하지 말고 차이를 생성해 내도록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물론, 반복되는 일상에서 차이를 찾아내어 긍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시간의 지남에 따라 단순하게 조금만 변화하는 것은 차이라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시간의 지남에 따라 단순히 몸만 커지는 것은 차이라 보기 어렵다. 이제까지 살아온 것 이상으로 여든세 살이 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료하게 지내기보다는 매일매일 나의 삶을 차별화하도록 여러 가지를 시도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버켓 목록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작정해본다. 그 중 상위 목록에 있는 몇 개 추려 너무 늦기 전에 실천해야 하겠다. 그리고 몽테뉴, 김훈이나 들뢰즈처럼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우주적 관점을 가져야 하겠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고, 그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며 동시에 인간의 마지막 종착역이다. 앞으로 이승에 남아 있는 동안 그동안 다하지 못한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 그렇게 살다가 떠나는 날 평안하게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 오늘은 내가 앞으로 살 수 있는 기대 수명을 가지고 한 번 생각해보았다.
첫댓글 귀한 수필 <기대숨녕>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