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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면 머지않아 봄도 온다
김 OO, 예비역
지난 주말에 내가 사는 이곳 청주에 엄청난 수해가
발생했다.
22년만의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도시기능은 마비가 됐고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들의 아픔을 뒤로 한 채 이렇게 수기를 쓰는 호사를 누려도 되는지 부끄럽지만
그들의 아픔이 빨리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몇 자
적어본다.
어느덧 군복을 벗고 사회로 나온 지도 벌써 12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수도 있겠지만 그간 참 많은 시련과 역경이
있었고,
잘못된 선택과 결정에서 비롯된 엄청난 댓가도 치렀으며, 자연과 인생에 대한
겸허한 마음도 배우게 된 귀중한 시간이었다.
Ⅰ. 짧았던 군생활의 추억
1. 이등병의 결심
1992. 6.
18. 충남 논산의 육군 제2훈련소 입소대대에 첫발을 디디며 나의
군대생활은 시작되었다. 숨 막히는 한여름의 열기는 청춘의 열정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훈련소 수료 후 배치된 자대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야간 초소근무 때는 산 아래 걸려 있는 달을 보며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짓기도 했고, 몇 번의 대학합격에도 가정형편 때문에 고졸로 남아 있는 당시의
현실을 한탄하기도 했었다. 자대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많은 고민을
하다가 군대생활과 대학졸업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자는 결심에서 부사관에
지원하게 되었다.
2. 부사관 생활
그리하여 시작된
부사관 생활은 육체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많이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8주간의 군사교육 수료 후 육군하사로 임용되어 부대로 복귀하게
되었고, 앞으로의 군대생활에 대한 로드맵을 작성하면서 최고의 군인, 최고의
남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에는 자대원복이 원칙이었으며, 임용 후 자대에 오게 되면 6개월의
영내내무반 생활이 의무였기에 부대를 벗어나 야간대학을 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하여 독학으로 무사히 대학을 마치게 되었으며, 그 후 OO대학교 법무대학원
야간과정에 진학하여 4학기의 수업과 1학기의 논문연구과정을 거쳐 석사학위
논문을 통과함으로써 법학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3. 악연의 시작 IMF
1996년
지금의 아내와 뜨거운 사랑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나의 꿈은
열심히 노력하여 능력 있는 육군본부 주임원사가 되는 것이었고,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연금을 수령하면서 아내와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축도 열심히 하고 군복무와 공부에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내 인생의 혹독한 시련은 1997년 IMF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아내는
학원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대출을 받은 것이 커다란
화근이 된 것이다. IMF가 시작되면서 대출 금리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제1금융권
대출금리가 25~30%에 육박하게 되었고, 파산하는 중소기업들이 속출했으며,
대기업들마저 경영악화를 피하기 위해 무모한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면서
실직하는 가장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가정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서민들은
자녀 교육비부터 절감하고자 다니던 학원부터 중단하게 되었고, 학원생의
급감으로 아내의 수입도 바닥이었으며, 당시 육군 중사의 월급으로는 치솟는
대출이자를 감당하기도 버거웠다. 사회물정을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금방 IMF가
끝나고 곧 좋아지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 카드론과 캐피탈 대출, 현금서비스
돌려막기 등으로 근근이 버텨오다 결국에는 파산상태에까지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대대 인사담당관이었던 나는 각급 상급부대에서 내려오는 지침과 사고예방
공문, 각종 사고사례 등을 수시로 접하게 되었으며 장고의 고민 끝에 ‘내가
파산을 하더라도 부대에 피해를 주지 말고 명예롭게 전역하여 파산하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5. 1. 31. 청운의 꿈과 열정으로 청춘을 바쳤던
푸른 제복을 벗게 되었으며, 그때는 상사로 진급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었다.
지금에서야 얘기지만 학원을 빨리 포기하는 현명한 선택을 했더라면 손실을
최소화 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지금껏 푸른 제복과 함께 하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Ⅱ. 내 인생의 겨울
1. 보험설계사
많은 빚을 떠안고 전역한 터라 정상적인 월급쟁이로는 이자 감당도 힘들었다.
퇴직금마저 압류된 터였고 이미 신용불량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기에 법원의
파산도 생각해 보았지만, 내 인생에 파산인이라는 오점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떻게 해서든 빨리 빚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열심히만 한다면
그에 따른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보험설계사였다. 빨리 일어서리라 다짐하며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대부분의 보험설계사들이 짧은 교육을
받고 나면 지인들부터 찾아간다. 아니 교육과정 내내 그렇게 세뇌(?)를 당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교육을 마치고 주변 사람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열심히 하라고
격려는 해 주었지만 막상 보험설계서를 들이 밀면 갖은 핑계를 대며 어느 누구도
쉽게 청약에 응해 주지 않았으며, 가장 가까운 친척들조차도 보험 얘기 할 거면
아예 오지도 말라고 미리 엄포를 놓았다. 돈은 벌어야 했으나 오라는 데도 없었고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아내도 나를
돕겠다고 학창시절 가장 절친했던 의사인 친구를 찾아갔다가 심하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는 지금까지도 연락조차 안하고 있으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빚을 갚기는커녕 오히려 가정 경제는 더욱더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들만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결국
보증금을 줄여 이사하고 또 이사하기를 반복하며 결국에는 산 밑에 위치한
보증금 3백만원에 월세25만원까지 몰리게 되었다.
그마저도 월세가 밀리기 일쑤였고, 얼마 되지 않는 아이들 학교 급식비마저
밀리면서 아내와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져 갔으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심한
자괴감으로 매일 매일을 술에 의존하다보니 보험일은 더더욱 관심 밖의 사안이
되어 버렸고 자신감도 많이 상실되어 갔다. 저녁때 잠자리에 들 때면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반듯한 양복에 한껏 멋을 내고 다녔으나 실상은 노숙자나 다름없는
생활이었고, 학교 선생님들이 영재교육을 추천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던
아이들을 위해 학원 한 곳도 보낼 수 없는 형편이었으며, 가끔 아이들이 통닭을
먹고 싶다고 할 때면 기름에 튀긴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고 하면서 넘겨야 했으니
그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야간에 대리운전을 병행했다. 몸은 고되고
힘은 들었지만 하루 3~4만원씩의 수입은 그나마
약간의 위로는 되었다.
하지만 그런 호사도 잠시 뿐이었다. 2008년 3월에 부모님 산소를 이장하던 중
엔진톱에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왼쪽 무릎 위를
강타한 엔진톱은 다리 근육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인대는 끊어 졌으며 다리의
뼈는 모두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급히 후송되어 수지접합 전문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했고 다리가 완쾌될 때까지 1년 반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질히 안
풀리는 내 신세를 한탄하며 병원침상에 누워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그때부터
아내는 나를 대신해 온갖 허드렛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며, 1년여가 지났을
무렵 아내도 많이 지치고 힘들었는지 이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이혼을 얘기하기도
했었다. 나또한 무능한 나 자신을 자책하며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해 보기도
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2. 조선소 생활
다리가 어느 정도
호전되어 걸을 수 있게 되면서,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고정적인 월급이 그나마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 들여 경남
통영에 있는 조선소에 취직을 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직장생활인지라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했다.
사무직인지라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 달에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은 고작 150만원뿐
이었지만 보험설계사 일에 비하면 이마저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입사하고 한 달여가 지났을 무렵 회사에서는 기숙사 신축공사를 시작했다. 비싼
임대료를 내면서 다른 회사의 기숙사를 빌려서 사용하고 있었으니 비용을
절감하자는 측면에서였을 것이다. 나는 매일 매일을 기숙사 공사현장에 있어야
했다. 명목은 현장 상황 관리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사현장이 다 그렇듯이
낮에는 온갖 허드렛일과 심부름을 해야 했고 밤에는 현장 자재를 지킨다는
이유로 콘테이너 박스에서 혼자 잠을 자야 했다. 기숙사 현장이 산속에 있었기에
무서움이 많았던 나는 매일같이 한밤중의 무서움과 싸워야 했으며, 아침과
저녁은 대부분 컵라면에 군내 나는 김치로 때워야 했다. 그 당시 회사 고문이면서
공사 현장 책임자인 모간부는 나를 자기 종 부리듯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려댔으며,
더군다나 다혈질이기까지 했기에 그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자기로부터 3보 이상 떨어지면 안 된다는 주의였기에 매일 매일이 지옥 아닌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아마도 요즘 가끔 언론에 회자되는 대기업 회장들의 갑질도
그보다는 덜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며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호사(?)도 잠시였다. 6개월여가 지나갈 무렵 회사의
재정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신규수주물량 감소와 무리하게 진행한 기숙사
신축공사가 원인이었다. 기성에 따라 지급되어야 할 공사대금은 전혀 지급되지
못했고, 공사는 중단됐으며, 산속 콘테이너에 악질의 회사 고문과 둘이 앉아 그의
짜증과 공사관계자들의 공사대금 독촉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 했다.
결국 회사는 도산했고 7개월여의 조선소 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그 시절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발병한 불면증은 그 후 2년여 간 나를 지독히도 괴롭혔다.
Ⅲ. 生則死 死則生
짧은 조선소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많은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사십이 훌쩍 넘은 나를 채용하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월급이 120~150만원 남짓이었는데 그마저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현실은 정말로
냉혹했다. 심각하게 나의 미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아들은 이미 중학생이 되어 있었고, 나는 아직도 보증금 300에 월세 25만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렇게 살다가는 아이들을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조차도
제대로 보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이었고, 죽기 전에 남아 있는 빚이나 다 갚을
수가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자식에게 빚을 남기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좀처럼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군대시절에는 나름대로 인정받는
초급간부였었는데 현실은 내일 먹을 쌀을
걱정해야 되는 안개 자욱한 바다를 홀로 항해하는
뱃사공의 심정이었다.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일에 마지막 인생을 걸어보리라
다짐했다. 바로 법률사무소 사무장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고, 이보다
더한 내 인생의 낭떠러지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배수의 진을 쳤다.
당시 법률사무소에서 등기팀장을 하는 친구에게 사정사정하여 어렵사리 입사를
했다. 이 때가 2010년 8월이었다. 대표변호사님과의 면접 때 변호사님께서는
월급제를 제안하셨지만 난 성과급으로 해 달라고 했다. 당장을 생각하면 월급제가
나에겐 큰 도움이 되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성과급이 더 메리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초기엔 수입이 없을 것이 뻔했기에 어느 정도 안정이 될 때까지
생계를 유지할 대체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벽에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다가
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경매농산물을 하역하고 운반하고 배달하는 일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새벽 3시부터 8시까지 비록 시간당 6천원의 시급제였지만 최소한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일은 무척 고되고 힘들었다. 김장철이면 엄청나게 많은
농산물들이 밀려들었으며, 다른 것과 별반 차이는 없었지만 특히 무우를 하역한
날이면 며칠씩 허리가 뻐근했다. 새벽일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와서는
부랴부랴 씻고 사무실에 출근하기를 1년여 정도
병행했던 것 같다.
사무실에 출근해서 직원들과 인사하고는 거래처 영업을 위해 곧바로 다시 거리로
나왔다. 성과급을 선택한 나에게 제일 큰 관건은 거래처 확보였다. 生則死 死則生의
각오로 임했다. 농수산물시장의 힘든 새벽일을 빨리 그만두려면 죽을 각오로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서 얘기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지라
마음은 즐거웠지만 몸은 상당히 힘들었다. 새벽 2시면 일어나야 했기에 잠은 항상
부족했고, 저녁에 퇴근해서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곯아떨어지기 일쑤였으며,
성한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 몸은 항상 파스가 뒤덮고 있었다. 어찌됐던 거래처
확보가 관건이었는데 아는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맨땅에 헤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가 8월이었기에 장마가 끝난 한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사무장으로서의 수입은 전혀 없었기에 차량 연료비라도 아끼자는
심정으로 아침에 출근할 때 여벌의 와이셔츠 두 벌을 더 들고 나와 부동산
중개업소가 많은 곳에 차를 세워 놓고는 한 곳 한 곳을 무작정 걸어서 방문하기
시작했다. 한낮의 기온이 40도를 오르내렸기에 땀은 비 오듯 했고 몇 군데만
다녀오면 와이셔츠는 이미 몸에 달라붙어 새것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점심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기에 부동산 소장님들이 식사를 하는 시간에는
인근에 있는 은행점포에 들어가 고객을 위해 비치해 놓은 커피를 한 잔 마시거나
정수기의 물로 허기를 달래며 땀을 식히곤 했다. 그렇게 온종일 부동산중개업소를
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옷에서는 땀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마치 청춘의 피가 끓는
유격장에서 온몸을 불사르고 난 후의 그 냄새와도 흡사했으리라.
1) 참고로 내 비송사건업무 대다수의 사건은
등기사건이고, 등기사건의 주 거래처는 90% 이상이 부동산 중개업소와 은행임을 밝힌다.
새벽마다 알람은 어김없이 울려댔으며, 지친 몸을 이끌고 농수산물시장의
새벽일을 갔다가 부동산 중개업소를 도는 강행군의 생활을 반복했다. 내 딴에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됨에도 전혀 실적이 나오지 않게 되자 슬슬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난 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으로 머리를
세뇌시키며 악착같이 버텨 나갔다. 힐러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자기 자신을
돌아갈 수 없는 오지의 위치에 세워 놓고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나도 이미 그런
상황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회해봐야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러기를
두 달여. 한 곳의 부동산 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매번 올 때마다 미안하기도
했고, 그동안 지켜본 결과 앞으로 믿고 일을 줘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나의 첫 거래처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기쁨과 그동안의 설움이 함께 복받쳐
올라왔다.
처음으로 거래처가 생기면서부터는 강한 자신감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리고 첫 사건을 처리하게 되면서 사건 한 건당 내가
받게 되는 성과급의
평균치를 가늠해 볼 수가 있게 되었으며, 앞으로 1년 안에 아내에게 월300만 원
이상 갖다 주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되려면 대단지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중개실적이 좋은 거래처를 최소 20군데 이상은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곳일수록 많은 사무장들의 영업대상이 되었기에 대단지아파트 상가를 특정화
시켜 놓지 않고 1일 50장의 명함은 꼭 돌린다는 각오로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했다.
경쟁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어느 구름에 비가 올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해의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나의 주 거래처는
10곳 정도로 늘어났다. 혹자는 몇 달을 고생해서 겨우 거래처를 10곳밖에
확보하지 못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대단한 성과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는 분야에서 내 스스로
이루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요령도 생기고 이 분야의 생리도 많이 알고
있기에 그 때처럼 어렵지는 않지만, 그 당시의 10곳은 나 스스로 대견하다고
지금도 여기고 있다. 그 10곳의 거래처가 재테크에 비유하자면 종잣돈 역할을
톡톡히 했으니까 말이다.
이후 부동산
소장님들과 인간적으로 친해지면서 고민이나 어려움도 스스럼없이
얘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며, 어떤 소장님은 포장마차에서 지독히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진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렇게 인간적으로 각별하게
되자 자연스레 같은 업종의 주변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많은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결과 1년여가
지나서는 나 스스로 팀을 결성하여 독립할 수 있게 되었고, 그해 겨울에는 팀원이
4명으로 늘어나게 되었으며, 12월에는 아내에게 1천만 원 이상을 가져다 줄 수
있게 되었다. 그 날 그간의 고생이 서러웠는지 내 손을 살포시 잡고 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던 아내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이 난다.
어찌 보면 지금은 소소한 일상이지만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온 가족이 돈 걱정
안하고 소고기를 맘껏 먹었던 일은 군대 전역 후 느꼈던 행복 중에 가장 큰
행복이기도 했다.
새해가 되면서는 거래처를 다양화하기 위해 은행을 대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은행거래처는 부동산과 달리 꾸준하게 일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될 대상이었다. 은행 영업에 대한 구구절절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다만 은행이
부동산거래처를 확보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렵고 힘들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어찌됐던 중요한 것은 지금은 여러 곳의 은행 점포와 협약을
하여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7년여가
지난 지금은 거래처가 기업, 관공서, 금융권, 부동산중개업소, 건축업자,
중소상인들까지 다양화됐지만 그 시작은 위에서 본바와 같이 물위에 둥둥 떠
있는 좁쌀과 같았음을 밝힌다.
그동안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무척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꾸준히 달려온 결과 지금은 남아 있던 빚도 모두 갚게 되었고, 이제는
월세방을 탈피하여 37평 아파트도 취득하게
되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이렇게 재기하기까지의 여정이 결코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그날그날의 일정과
거래처관리, 팀원들과의 융합, 사건의 원인증서 작성 등 다방면에서 슈퍼우먼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아내의 힘이 무엇보다 제일 컸고,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한참 방황하고 힘든 시절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사무실을 지켜준 실장님, 그리고 소중한 팀원들, 한 분 한 분 꼽아보면 내게는
무척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거래처 사장님들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일터라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올
가을쯤 법인설립을 고려하고 있다.
사업을 다각화 하려는 의도보다는 지금의 일과 업무 연관성이 매우 높고 지금 하는
일과 병행할 수 있으며, 거래처에도 많은 도움을 주며 상생할 수 있는 나만의
일이 있기 때문이다.
Ⅳ. 맺는말
나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육군 상사가 될 때까지 나를 강하게 훈련시켜주고
강한 정신력을 가질 수 있게 해 준 대한민국의
군대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위기는 닥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들이었음을 기억한다면 극복하지 못할 위기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새벽 3시면 일어나서 5시 30분이면
사무실에 출근해 있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산위로 드러나는 여명이 참 좋기 때문이다.
꿈결 속 하얀 실루엣을 걸치고 살포시
다가오는 아름다운 여인네처럼, 나풀나풀
다가오는 여명의 눈동자가 새벽 향기 가득한 산사의 풍경소리와도 매우 흡사하기에
무척 좋아한다.
그 시간에 새벽에 올라온
헤드라인 뉴스를 훑어보고 부동산이나 경제동향을
살펴본다. 또한 조세 및 계약과 관련된 개정법률과 민사집행법 등 절차법의 사례
등을 꾸준히 연구한다. 내 거래처와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여분의 시간이 있다면 책을 읽고 가끔 새벽기도를 간다. 책을 통해 나를 힐링하고, 새벽안개 자욱한 산사에서의 108배를 통해 下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故 정주영 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사람은 보통 적당히 게으르고 싶고, 적당히 재미있고 싶고, 적당히 편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런 ‘적당히’의 그물 사이로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빠져나가게 하는
것처럼 우매한 짓은 없다」고 했으며, 만능 방송인 김창완씨는 ‘이미
익숙해져버리 면 모든 것은 끝이기에 모든 일에 죽을힘을 다한다’고 했다. 가난도
익숙해져 버리면 끝이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벗어나지 않으면 점점 더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무서운 현실을 빨리 직시해야 한다.
겨울이 오면 머지않아 반드시 봄도 오는 법이다.
이제는 희망을 갖고 생각을 바로 세워서 한 발 한 발 그 목표를 향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수기를 쓰면서 새롭게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서 쓰는 내내 행복했다.
끝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은,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던 가시밭길
절망의 시기에도 끝까지 나를 믿고 힘을 실어준 내 아내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고, 지금은 어느덧 장성한 두 아들에게도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마친다.
2107년 7월 25일 청주에서 김OO 드림
아래의 12가지 신념은 내가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꼈던 올바른 성공을 위해 꼭 지켜야 할 것들을 경험을 통해 정리해 놓은 것이다.
나의 수기가 여러분에게 읽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래의 12가지 신념을 명심한다면 성공은 머지않아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다.
【바른 성공을 위한 신념 12】
1.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하라.
2. 타인의 신뢰를 얻어라.
3. 과거를 기억하되 집착하지 마라.
4. 순간의 이익에 연연하지 마라.
5. 자기를 잘 가꾸고 자신 있게 행동하라.
6. 가족을 사랑하고 타인을 배려하라.
7. 세상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8. 다방면에 뛰어나려고 하지 마라.
9. 미래를 대비하여 저축하라.
10. 취하지 말라.
11. 약속은 작던 크던 꼭 지켜라.
12. 영혼이 파괴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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