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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4:1-12 느보산
지난 달 20일 탄자니아에서 서울 대학교 건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이용준 군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습니다.
이씨는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지역에 세울 학교 설계도를 만들어 주기 위해 검은 대륙을 찾았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2006년부터 단기 선교로 4번이나 탄자니아를 찾아 가난한 마사이 족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우물 파기, 태양광 발전판 설치, 초등학교 식당 건물 설계 등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을 일구었습니다.
사고 후 시신을 인도 받으러 그의 부모님이 탄자니아 현지로 날아갔지만 시신을 인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를 형제와 아들로 생각하는 마사이 족이 자기들 곁에 묻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마사이 족의 뜻에 따라 아들이 설계한 학교 부지 중앙에 그의 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천안 미래로 교회에서 추모예배를 드리며 아들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용준이는 몸이 약하여 늘 피곤해 했습니다. 그러나 치열하게 살다가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
같은 시간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에서는 교계의 많은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장례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중흥기를 이끌며 평신도를 깨웠던 옥한음 목사님이 폐암으로 72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제자훈련으로 평신도를 깨웠고, 교회 갱신 협의회를 결성해 교회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본인이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했고, 은퇴 후 목회자를 위한 제자 훈련에 정진하기까지 그의 사역은 치열했습니다.
이용준군과 옥한음 목사님의 삶과 죽음을 한 도화지 위에 놓고 그려 봅십시다.
24세의 젊음나이와 72세의 늙은 나이는 정확히 3배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죽음이 아쉽기는 똑같습니다.
차이가 없더란 말입니다. 젊어 죽음을 맞이했기에 아쉽고 늙어 죽었기에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삶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열했고 죽음은 두 사람 모두에게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100년 , 아니 500년을 살아도 아쉬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살 갓 넘은 철부지 아들이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을 찾고 싶다고 집을 떠나려하자 아버지가 묻습니다.
“니 인생이란게 도대체 뭐냐?” 아들은 “저는 돈 많이 벌어서 멋진 여자 만나 세계를 여행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꽉 잡으며 “어서 앞장서라. 같이 떠나자. 그런 세상 나도 한번 보고 죽자.”
삶은 누구에게나 혹독한 시련의 연속입니다. 삶은 치열한 것입니다. 솜사탕처럼 탈콤하고 침대처럼 푹신하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때가 있고 좌표를 잃어버릴 때도 있으며 바위에 깔려 삶이 뭉게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고난 중에도 행복이 있고 고통 속에도 의미가 있고 보람도 있고 소망도 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 내가 당하는 모든 일들에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 사는 날 동안에 우리는 믿음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만 합니다. 인생이 길든 짧든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의 죽음에 대한 내옹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조금만 이해할 수 있다면 오늘 모세의 죽음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울까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그가 산 이유는 약속하신 가나안 땅 때문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 길 40 년을 참고 왔습니다. 가나안 땅은 모세의 삶의 이유였습니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리까지 와 있습니다. 반나절이면 도달할 위치입니다. 아프리카 최북단 동쪽에 위치한 이집트에서 육지 길로 유럽이나 아시아를 가려면 반드시 이스라엘 땅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해변 길과 왕의 대로가 그것입니다.
해변 길은 지중해에 인접한 길로 고대로 부터의 교역로로 가장 발달한 길입니다.
지중해를 끼고 있어 이 지역은 비가 많이 오고 또 평야 지역입니다.
만약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길로 갔더라면 6일이면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길은 왕의 대로입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암몬과 모압과 애돔지역이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건조하지만 왕들에게 통행세만 내면 숙소와 물을 제공 받으며 지나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왕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가는 것을 반대했기에 그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요 ? 그들은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굳이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광야 길입니다. 온도가 한 여름에는 55도까지 올라갑니다. 건식 싸우나 수준입니다.
나무도 없고 풀도 없습니다. 물도 없습니다. 붉거나 회색의 볼모지 땅만 펼쳐져 있습니다. 고생길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엘림 오하시스에 도달했을 때 샘 12과 종려나무가 70 주라고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자세히 기록했을까요 ? 그것이 그들이 광야에서 본 가장 울창하고 시원한 광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0 년 광야 생활 동안 더 이상 그들은 강이나 수목을 볼 수 없이 척박한 삶만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길을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40년 동안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단강 앞에 왔습니다.
눈앞에는 지금 늦은비가 내려 물이 넘실거립니다. 강 건너 편으로 푸른 초목이 우거진 여리고 지역이 보입니다.
성지 순례 일정 중에 이집트 카이로에서 이스라엘까지 버스로 이틀을 꼬박 걸려 시나이 반도를 통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갔던 그 여정입니다. 황량합니다. 작열하는 태양과 건조한 공기 흙 먼지 뿐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광야 길이 멈춰지고 초목이 우거진 지역이 나오는데 그곳이 여리고입니다.
입에서 ‘우와’하고 감탄이 나옵니다. 겨우 이틀 광야를 거쳐 왔을 뿐입니다.
그것도 에어컨 나오는 버스에서 생수 병에 담긴 물 먹으면서 졸며 편히 지나온 길입니다.
그런데도 ‘우와’하고 감탄이 나온다면 40년을 광야에서 싸우나 하며 지나온 사람들이 어땠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넘실거리는 요단강 물과 수천 그루의 종려나무로 울창한 광경에 그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드디어 젖과 꿀이 흐리는 약속의 땅이 저 만치서 손짓하고 있습니다.
고생 끝이 낙이 온다고 이제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의 즐거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때 모세는 해발 835미터의 느보산, 높은 봉우리란 뜻을 가진 비스가 꼭대기에 오릅니다.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을 보면 모세는 동서남북의 가나안 땅 전역을 보았습니다.
굉장히 좋은 시력을 갖고 있는 제 눈에는 여리고만 희미하게 보일 뿐 예루살렘도 안보입니다.
모세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 그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니가 보고 있는 이 땅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바로 그 땅이다.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습니까 ? 얼마나 감동이겠습니까 ?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때 너는 저 땅을 들어가지 못한다 말씀하시더니 곧바로 모세를 죽이십니다.
반나절이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는 여기서 멈추라 하시더니 그것으로 끝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모세가 안타까워 하는 모습이 나와 있지 않지만 신명기 3장에 가보면 그 모습이 나옵니다.
25절부터 27절까지를 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기록한 책입니다.
모세는 이미 자신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느보산에서 죽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안타까와 시간의 순서를 무시하고 신명기서 앞부분에 자신의 마지막을 먼저 술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 17장과 민20장에 보면 므리바 사건이 나옵니다.
광야 초기에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돌맹이를 들어 모세를 죽이려 했습니다.
모세도 믿음 없이 불평과 원만만 하는 백성들에게 지친 나머지 그만 자신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반석에서 물을 내어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미 예견되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하나님께 여러번 간청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안타까운 죽음을 놓고 우리는 그의 지은 죄 때문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는 용서 받지만 벌은 받아야 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부정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3장 26절을 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만했고 믿음도 없었고 원망과 불평으로 40년 동안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진노하신 이유를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모세야 니가 저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 많이 했냐? 니가 얼마나 속이 상하고 힘들었는지 내가 다 안다.
무려 40년이다. 니가 저기 건너 가봤자 저들 때문에 마음고생, 몸 고생 또 해야 한다. 이제 그만 여기서 끝내자.‘
모세의 죽음은 벌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세의 짐을 덜어주신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느보산이라는 말에서 느보는 나바브라는 히브리어 어근에서 나온 단어로 뜻은 속이 비게하다 도려내다라는 능동태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백성들을 이끌면서 속이 썩고 썩었습니다. 다 포기하고 싶었겠지만 사명 때문에 요단강 앞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 맡겨주신 사명 버릴 수 없고 내 가족 버릴 수 없습니다. 자식 어떻게 해서라도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속이 썩습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짐이 쌓여 갑니다. 그 때 우리는 느보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스스로는 도저히 썩어가는 속을 비울 수 없고 도려 낼 수 없는 인생 암 덩어리를 들고 느보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해결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느보산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제일 꼭대기 비스가는 예수님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예수님은 어떤 짐도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고통도 비워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어떤 저주도 도려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어떤 아픔도 예수님은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능력 가운데 우리의 모든 짐과 저주가 비워지고 도려내는 기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 할렐루야
여러분은 신부님과 목사님과 스님 중에 어느 쪽 신앙이 더 좋을거라 생각 되십니까 ?
대부분 신부와 스님 신앙이 더 좋다고 대답을 합니다. 왜냐면 그 쪽이 더 종교적인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의식은 장엄하고 엄숙합니다. 그리고 결혼 하지 않는 금욕적인 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저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신앙이 더 좋은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언제 속 뒤집어 지게 하는 아내와 죽고 살 일 난 것처럼 싸워 봤어야지요.
열이 펄펄 끓는 아이 때문에 밤 잡을 설치거나 말 징그럽게 안 든는 자식과 살아 봤어야지요.
금욕은 혼자 버티기이지만 가정 생활은 내가 잘하려 해도 상대방이 도와주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입니다.
속이 썩고 문 들어 져야 만 지켜지는 게 가정이고 행복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터질지 모릅니다.
가정 일구며 산다는 것은 강도 높은 금욕이고 경건 훈련입니다. 그것도 평생 해야 합니다.
아들만 셋 키우는 목사님이 말하기를 연년생 아들 셋 키우면 미친 사람 된답니다.
집에 남아나는 것이 없답니다. 가구, 벽지, 그릇, 쓰레기통, 방 바닥 모두 전쟁이 휩쓸고 간 것 같답니다.
수시로 물어뜯고 치고받고 싸우고 소리 지르고 울음이 끊이지를 않는답니다.
그래서 순한 천사였던 사모님이 지금은 거의 미친 상태가 되어 정신 병원 가기 일보 직전이랍니다.
가정을 이루고 남편과 아내로, 아버지와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다가 주저앉고 싶고 미처 버릴 것 같은 상태로 이 자리에 나온 분 계십니까 ?
하나님이 은혜 주시어 미쳐버릴 것 같은 저주와 고통 오늘 다 비워지시고 도려내지는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의 모든 아픔 보다 주님의 위로가 더 가까이 있습니다. 인생의 절망보다 하나님의 손길이 더 가까이 있습니다.
세상의 질시보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냉혹한 세상보다 한량없는 주님의 은혜가 더 뜨겁습니다.
조금만 믿음의 힘을 내십시오. 주님께서 “ 이제 그만하자. ”고 말씀하실 때까지 믿음의 삶을 치열하게 사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모세가 죽자 백성들이 모세를 위해 30일을 애곡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백성이 지도자에게 보내는 최고의 애도입니다. 그는 최고의 순간에 무대에서 은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독재만 하지 않고 물러났다면 얼마나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을까요 ?
사람은 박수 칠 때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절정의 순간에 내려오는 것이 현명하답니다.
그러나 박수 받을 때는 떠나기가 싫은 것이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대부분 때를 놓치고 욕먹으면서 떠나게 된답니다.
하나님은 모세 인생에 있어서 절정의 때에 박수 받으며 물러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이랬으면 합니다.
어떤 자리든, 어떤 환경이든 성실하게 한 평생 크리스천으로 살다가 박수 받고 떠나는 인생이었으면 합니다.
내가 꼭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물러나기에 아쉽더라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자리를 물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을 하십니다. 모세가 박수 받으며 물러나자 가려져 있던 여호수아가 등장하게 됩니다.
나 아니면 안된다가 사람 잡습니다. 내가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고집이 공동체의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한다는 그것은 교만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 우리 가정, 우리 사업 다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이끌어 주셔야 잘되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그의 죽을 때 나이가 120세이고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소개합니다.
요즘 어른신들 사이에서 유행되는 신조어가 하나 있습니다. 99881234 벌써 어르신들은 웃고 계십니다.
젊은 분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는데 우리 어르신들은 다 알고 계십니다.
99 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하루나 이틀 아니면 3일 앓다가 사망하는 것의 바램을 99881234라는 신조어로 만든 것입니다.
나이 들어 눈 흐리고 기력 떨어지고 정신이 쇠하여져서 노년의 삶이 어둠과 슬픔으로 불행한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120이 되도록 눈도 흐리지 않고 쇠하거나 기력이 떨어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노인 건강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노년의 건강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는 9988이 아니라 120 88입니다. 우리 어르신들이 다 이런 축복을 받았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자식들 앞에서 99881234라고 크게 말하지는 마세요.
자식들 입장은 아니 경우도 있으니까요 .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다 이런 복 받기를 축원합니다.
모세의 인생은 한 순간도 빈둥댄 날이 없었습니다. 그의 삶의 궤적은 치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평가하기를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말씀합니다.
민 12:7 내 종 모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된 사람이다.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아름다운 삶입니다.
오늘 우리의 남은 삶이 이랬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사람으로 기억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
우리는 치열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서 마지막에 느보산에 올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와 나의 자녀들을 향한 복, 나의 후손들이 누리게 될 그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고 비울 것 비우고 도려낼 것 도려내고 멋지게 박수 받으며 떠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장차 우리들 모두가 목숨이 다한 후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 도착할 진정한 가나안에 대해 설명합니다.
계시록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진주는 고통의산물입니다. 진주의 의미는 눈물입니다. 천국은 무려 12 대문을 지나야 합니다.
치열하게 믿음 생활 한 사람의 눈물을 씻어 주려고 12 대문이 있습니다.
성의 길은 순도 100%의 황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순도가 중요합니다. 불같은 연단을 통해 참된 신앙이 만들어 집니다.
믿음의 삶을 치열하게 살다가 느보산에 올라 썩어가는 마음과 육신을 비우고 도려내고,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버거운 인생 여정 끝나는 날 12 진주 문은 열리고 황금 길을 밟으며 개선하는 곳이 천국 가나안입니다.
스펄전 목사와 로이드 존스 목사는 21세기 교회를 향해 천국과 지옥 없는 기독교회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 이 땅에서 부귀영화에만 관심있지 천국에 관심없는 사람들을 교회에 붙들어 놓으려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위해 치열하게 살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채 치욕스럽게 사는 사람들을 교회원으로 붙들어 두려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쾌락이 흐르는 현실의 요단강만 바라볼 뿐 영광된 천국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천국을 가슴속에 품어야만 천국이 보입니다.
모세의 가슴에 천국이 있었기에 모세는 모든 것 비우고 도려내고 아쉬움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국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기 위해 주님이 되었다고 할 때까지 치열하게 믿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감으면 안 됩니다. 절대로 미치지 마십시오. 믿음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천국을 품으십시오.
박수 받으며 12진주 문 열고, 황금길 밟으며 주님 만나러 가는 꿈을 꾸십시오
죽음이 손짓하는 그 날 까지, 느보산에 오르는 그 날까지, 천국 가는 그 날 까지 믿음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도다. - 할렐루야
오늘 그 영광을 가슴에 품고 삶의 자리로 돌아가 주님이 되었다고 할 때까지 치열하게 믿음의 삶을 사는 성도들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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