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대신문에 낸 글입니다:
가면의 시대, 민낯의 시대
근래 <복면가왕> <복면검사> <가면> 등 가면을 모티브로 한 TV 프로그램들이 꽤 많아지고, 가면이 언론의 화두로 떠올
랐다. 심리학자 융은 인간은 천개의 가면(페르소나)를 지니고 상황에 따라 적절한 것을 쓰며 살아간다고 하였다. 우리
모두는 원만한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장소와 환경, 만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다. 그
런데 지금 우리는 가면이 버거운 시대에 살고 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급속도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실적 중심 사회가 되어갔다. 2000년대 초반,
부동산, 벤처, 주식시장이 달아오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직 앞만 바라보고 독하게 살면 대박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에는 ‘자기 관리’라는 미명하에 자신을 잘 무장하고 포장하는 가면을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힘든 내색 못하고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고자 애를 쓰면서,
가면의 중압감에 심한 스트레스를 겪게 되었다. 감정노동, 가면우울증, 스마일마스크 증후군과 같은 용어들의 빈번한
매체 등장이 이를 말해준다.
또한 남의 기준에 맞추고 남의 평가를 내면화하여 살다 보니, 어떤 게 가면이고, 어떤 게 나의 맨얼굴인지, 정체감에
혼란이 생기고 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외모 관리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착한 척, 유능한 척, 쿨 한 척, 때로는
잘 노는 척, 전략을 구가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삶의 많은 귀한 시간들을 연기하고 치장하고, 포장하는데 쓰게 되고,
정작 자신의 정체성은 발전시켜나가지 못하고 분열되고 혼란스러워진다. 지난여름 방영한 TV 드라마 <킬미 힐미>의
다중인격 장애 남주인공이나, 작년 가을 개봉한 미국영화 <나를 찾아줘>의 사이코패스 여주인공은, 상황에 따라 끊
임없이 가면을 바꿔가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병적인 피로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
신의 쉴 곳 없네’ 라는 30년 전 가요의 첫 소절은 지금 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 같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통사람들의 대박에 대한 꿈이 희박해진 후 많은 사람들이 가면 속의 지치고 피곤한 민낯을
돌아보게 되었다. 요즘 가면과 함께 ‘민낯’이라는 말이 매체에 많이 등장한다. ‘민낯’은 원래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요즘은 ‘시대의 민낯’과 같이 얼굴 이외의 대상에도 연장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이는 사람들의
관심이 이제 포장되기 이전의 본모습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TV에서는, 짜고 맞춘 보여주기 식 무대가 아니라
꾸미지 않은 일상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프로그램, 그리고 소박한 집밥 프로그램이 인기이다. 패션에 있어서도
소위 민낯 화장과 꾸미지 않은 듯 무심히 차려입는 것이 유행이다. 취업에 있어서도 이제 기업은 청년들에게 외면의
스펙보다 내면의 스토리, 세상과 인간에 대한 너의 시야, 스펙트럼을 보여 달라고 한다.
요즘 흔히 쓰는 수식어 중에 ‘영혼 없는’이 있다. 가면을 쓴 우리는, 때때로 영혼 없는 말을 나누고, 영혼 없는 반응을
보이고, 그러다 보니 영혼 없는 관계가 많아졌다. 여기서 영혼은 진심, 진정성을 말한다. 가면, 민낯, 그리고 ‘영혼 없는’
이란 단어들의 유행은 이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그간 간과했던 것, 즉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진정한 것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사회는 이제 야망과 이기의 시대가 결여한 ‘진정성’ ‘진심’ ‘실체’라는 새로운 동력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인문학 열풍도 이와 같은 시대의 전환적 흐름의 일부이다.
지금 도래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는 우리에게 가면이 아닌 민낯을 보여 달라고 한다. 너는 어떤 사람이냐고, 어떤 경험을
쌓아올려서 형성된 사람이냐고 묻는다. 남과 다른 너만의 고유한 얼굴을 보여 달라고 한다. 이 새로운 시대의 주류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가면 속의 자신의 민낯을 대면하고 파악하는 일, 그리고 성찰하는 일이다.
조그만 일에도 울컥 분노하고 짜증내며, 매사 무기력해 하는 우리의 내면을 살피고, 위로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희망과
믿음을 심는 일이다. 가면을 쓰거나 벗거나,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주눅 들지 않고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해지도록
자신을 애정 속에서 키워 나가는 일, 그것이 삼포세대, 오포세대, 아니 N포세대 청춘들이 민낯으로 이 세상과 대면하기
위해서 해야 할 우선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