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길밖에서☆]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 ============
[길 밖에서]
성춘복 시집 / 도서출판 마을(2013.03.15) / 값 10,000원
================= =================
빈자리
성춘복
의자 하나가 건너왔다
다듬은 푼수로 보아
하퇴뼈는 부실한 듯
등침도 얼마 휘었으나
내 위엄에 엉그름은 없을 것 같고
애써 내칠 바도 아니었다
더욱 빈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넘기기가 뭣해서
간곡함인 양 받았으니
안경을 겹으로 써도 잘 안 보이는
내 수고로움에 절로 지쳐서
그러려니 앉아보기로 했고
웬만큼 길 잘 들이면
밑둥이사 고칠 수 있는 법
침을 삼키며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다.
내 길의 현실
여러 번 마음을 고쳐먹어도
내 안의 길은 환영일 뿐
나를 닮은 사람이 앞을 질러
으레 가재눈으로 접게 한다
타인의 실존이 비록 그렇다 한들
셍존이사 별것 아니라고
거듭 소리쳐 날 어지럽히지만
너 또한 주름살은 펼 수가 없겠지
현실로 곧게 뻗어야 할 길도
이젠 말발굽에 다름 아니고ㅓ
거푸 네 풍경나만 지우려드는
너의 현실은 그런 주름살이다
또 길로 다가서면
골방에다 깊숙이
묵은 시간을 쌓으려다
찬 공기 들이키고는 언뜻
등 떠밀려 매무새 접듯
다른 길도 괜찮다 싶어
떠날 채비를 다잡는다
신발 단단히 조이는
자유와 분방의 내 팔자
버릇대로 행장을 챙겨
세상의 그 끝머리
아니, 이승도 벗어나고 싶어
날개나 달게 하고
더더욱 오늘은
이방감에 훌친 것처럼
구름 너머로 뜨고 싶다.
비가 올거나
왠지 속이 따갑다
발이 시린지도 모른다
분명 그렇긴 한데
뼛속까지 오그라든다
몇 번 오가며
예사로움 접어 불 같기는 해도
이 하루쯤은 바람 들어
나를 데우기로 했으니
새벽차 좋지요
그 어둠이사 몰아내고
내 가슴 한 복판에다
매화꽃 같은 것이나 꽂았으면.
너는 나에게
아침 이슬 밟고 올
너를 맞기 위해
나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점차 복사빛 천지의 하늘도
내 이웃까지 물들여
까치놀이나 진배없게 했지만
손톱 끝이 볼그스레해지듯
네 가슴께에 가닿음
나의 얼굴은 붉힘이 되었고
너는 언제까지나
저만치 물러앉아
내게 시늉만 보낼 뿐.
별에게 이르는 말
아무래도 나는 어둠의
한가운데로 불거져 나와
빛을 쏘아대는 저 별들에게
두 눈 다 내주며
내가 숨어 지내던 골방의
쾨쾨한 책 내음이며 낡은 가구들의
곰팡내를 뒤집어쓰고
내 가족사진들의 어렴풋함
그래도 뚫어져라 쏘아보다가
어지럼증에 겨운 걸음을 쫓아
날 노려보듯 그대를 향해
‘나는 너의 세월은 가늠한다’며
언젠가 끝장을 내어 보자고 다짐한다.
저 별돌을 좀 보아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긴 세월 눌러 앉힌
저 돌을 좀 보아라
꿈적 않고 그냥인
부처의 무릎뼈를
그 딱딱함까지 살피고
서양 버터 잘 굳힌
어기참이야 고맙기는 하지만
이 놀라움을 어이할꼬
부드러움은 결코 아닌
너슨한 마음의 뜨거움으로
저 돌을 좀 찬찬히 보아라.
춤사위로 하는 말
그래, 널 사랑한다
낯이 간지러워
널 닮은 나를 더 좋아하지만
취기에 서려
아무 짓거리를 해도
널 야단스런 색깔의 덧칠을 하고
꼭 살고 싶어서
아니, 죽고도 싶어서
그 짓거릴 네가 해본들
난 목마름의
너 때문에
나도 죽어보자고 하는구나.
모두가 봄이 되어
흙내음 맡을 수 있다면
흔쾌히 나도 봄이 도리라
언 대지가 몇 방울의 이슬비로
잠을 털어내고 있다
촉촉하고 다부지게
흔들어대는 이 새벽을
따사로운 빛으로 깨어나게 하여
축복의 삶으로 돌아설 무렵
꽃부리의 그 행긋함
나비나 벌들이 춤 추듯
우리도 이 계절의 주인이게
젊게 사는 법을 깨우쳐야 한다.
비 온 다음에는
비 그친 뒤의
진달래를 보았는가
씻은 듯 붉고 투명한
자줏빛 입술의 고운 향내 맡았는가.
겨울나무의 고백
한길을 좇아 나무들 늘어서고
나무와 나무 사이
바삐 그림자 늘어뜨린 연록에 짙푸름
차례로 스스로 알몸임을 선언한다
해 기울어 몸 추스를 즈음
겨드랑이 밑이 비었음을 증명하려는지
열심히 살았노라고
어기찬 침 삼켰으나
아주 가벼얍게 바람을 떨쳐내며
길 한가운데로 나서서
가랑잎 줍 듯 발을 다독인다
추위엔 겸손도 아랑곳없다는 듯.
새벽자리에 그냥 누워
긴 잠에서 돌아왔을 때
더듬어 스위치를 누른다
2시 40분
아직 새벽은 멀었으나
뚜렷이 혼자임을 깨닫는다
이미 모든 걸 버린 지 오래다
눈 감아도 좋겠다는 그 생각
오늘도 할 수가 있었으나
그래도 깨어남이 참 다행이다 싶어
애써 잠은 청하진 않는다
펴놓은 깔개며 이부자리와 베개
내 물건들 다 거두어
날갯짓이라도 해보였으면 하다가
그대로 누운 채
편안의 눈 감기에 들어가면
곰곰 생각을 해보아도
마음 같지 않은 팔다리들
온 몸뚱이가 착 달라붙어
아주 움직일 요량은 아니니
이젠 모든 걸 다 놓을 수밖에.
눈길에 갇혀
슬픔으로 다가가 들을 대고 누워보리
번듯하게 드러누워
아무도 밟지 않을 그 길을
바람 일으키고 자빠뜨리리라
설움 위에 내 눈 묻고 두드려
반듯하게 진흙 베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이승 밖으로 내몰리리니
외로움 위로 가슴 묻으면
사무치는 별들의 반짝임
있는 대로 울음을 쏟아도
잡초인 양 깊이 죽어 내달리리라
얼음 위로 다가들어 자빠지리
벌겋게 숯불 달군 밤일지라도
허물 태운 그림자의 재는
털어 까만 무덤 속에 숨기리라.
세심정洗心亭에 부쳐
활짝 문을 열어
안 보이는 것도 찾게 하고
눈 감아도 엄연한 세월로
거기 우릴 머물게 했나니
좋은 비 한 번이면
시원하게 눈도 맑게 하고
솔바람 두어 차례
들숨과 날숨으로 고르게 하는
아, 내 고향 땅의 편안 같은
고요를 엮어 겨웁기 한량없는
형상의 마음까지 자유롭게
그댄 우리의 외딴 섬이 되었거니.
구름을 따라
방금 멎은 눈길 위에 새길을 독촉하면
부지런케 덧씌운들 발자국은 헛딛어서
겹겹의
달음박질은
엉뚱해도 괜찮을지.
누군가의 뜀뛰기가 가쁜 숨길 내뱉으면
쉽사리 참지 못할 그 길목도 목이 탄다
아무리 되짚어본들
마음 편할 길은 없지.
.♣.
=================
■ 책머리에
꽤나 오랜 세월이었나 보다.
살아오면서 많은 친구를 잃었다. 평생 옆에 있어 줄줄 알았는데 거반 이승을 저버렸으니 주위가 온통 빈 것만 같다.
또 자주 쓰던 말로 ‘우리’라든가 ‘시대’라는 말 따위도 버렸으니, 자신의 삶이나 그런저런 자전적自傳的인 데로 시선이 옮아가는 것도 순리인 모양이다.
말하자면 형식과 같은 것은 뒤켠에 숨고 본질적이고 창조적인 것의 영원함이 표적이 된다. 가만히 앉았노라면 창밖으로 보낸 시선도 ‘설렘’이 되고, 진작 버렸던 것도 떠남의 ‘아쉬움’으로 남아 헤아릴 도리가 없어진다.
2009년 2월의 제17시집『내 안 뜨거워』이후 오늘까지 발표한 것들을 묶어 열여덟 번째의 작품집으로 선보인다.
내가 달린 이 길도, 그 밖의 환경이나 조건도 한결같이 버린 상태지만 내 어여쁨으로 보아주시기를 부탁한다.
2013년 3월
성 춘 복
=============== == = == ===============
◆ 표사의 글 ◆
백발 성춘복과/ 낡은 올굴 동행한다/ 기둥 위에 버섯구름을 보러갔다/ 비 오는 날/ 우산들이 공주에에 떠다녔다/ 백발이 젖을가봐/ 누가 우산을 받쳐 준다/ 글라디오라스 긴 줄기 그림자가……
(故 김영태)
▶성춘복成春福 시인∥
∙ 경북 상주 출생, 부산에서 성장
∙ 성균관대학교 졿업
∙『현대문학』으로 등단
∙ 을유문화사, 삼성출판사 편집국장 역임
∙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SBS문화재단 이사 역임
∙ 현재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 ‘문학의 집. 서울’ 상임이사
∙『문학시대』편집인
∙ 제1회 월탄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국제펜문학상, 한국문화예술상 등 수상
∙ 시집『오지행』『마음의 불』『그림자 놀이』등 17권
∙ 수필집『길을 가노라면』등 6권
∙ 비평집『화두와 때깔』등 3권
================= .♣. =================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