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
사람들이 만국박람회에서 탄성을 지르며 즐기는 동안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의 대공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이 파리에 알려진 것은 1867년 7월 1일이었고, 『르 피가로』가 7월 8일자로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관해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요제프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Joseph Ferdinand Maximilian(1832-67)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입니다. 나폴레옹 3세의 강요로 1864년 4월에 합스부르크(1276-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왕가)의 왕자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독립군에게 맞설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채 멕시코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1867년 2월, 막시밀리안이 집권한 지 3년도 채 안 되어 나폴레옹 3세는 10년 이상 멕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멕시코에서 모두 철수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과의 약속을 깨고 그를 구출하지 않았으므로 막시밀리안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베니토 후아레즈가 주도한 과격한 멕시코 게릴라들이 막시밀리안과 휘하의 장군들 미구엘 미라몽, 토마스 메지아를 체포했습니다. 후아레즈는 1867년 6월 19일에 맥시코 시티 북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쿠에레타로 근처에서 그들 모두를 처형했습니다.
인디언 고아 출신의 후아레즈는 동란 후 1861년부터 대통령의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대통령에 선출된 인물입니다. 1867년 3월 모든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에서 철수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아내를 파리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며, 5월 15일 쿠에레타로가 점령당하자 항복했슴니다. 후아레즈는 집권 당시 법을 제정했는데, 외국 군대를 멕시코로 끌어들이는 어떤 행위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총살형 집행장에서 여섯 명의 군인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충분한 방어능력을 갖추지 못한 그를 멕시코로 추방한 결과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희곡 작가 루도빅 알레비는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후아레즈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 유혈이 낭자한 미친 멕시코 전쟁은 이처럼 슬픈 결말로 종료되었다.”

마네의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 The Execution of the Emperor Maximilian of Mexico>, 1867-68, 유화, 252-305cm.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표현된 대에 비해 마네의 작품에는 그런 점이 전혀 없어 사실주의에 더 가까운 그림이 되었습니다. 고야는 집행자들이 총을 겨누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마네는 총에서 불이 뿜는 좀 더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당당하고 총알을 장전하는 군인의 얼굴은 무덤덤합니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 The Third of May, 1808>, 1814, 유화, 260-345cm
공화주의자인 마네는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폭로하겠다는 결심으로 황제의 처형장면을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란 제목으로 캔버스에 가득 채웠는데, 이런 구성방법은 고야의 영향이었습니다. 마네는 고야가 1814년에 그린 <1808년 5월 3일>과 마찬가지로 총구를 겨누며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을 오른쪽에 그리고 사형당하는 사람들은 왼쪽에 구성했습니다.
마네 그림의 특이한 점은 무엇보다도 총살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음을 시위했는데, 마네는 황제의 처사에 매우 분노했습니다. 그는 그림에 처형된 날자 6월 19일을 적어 넣었습니다. 마네는 이 그림을 이듬해 살롱에는 출품하지 않았는데 정치적 물의를 염려한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1879년 뉴욕의 호텔에서 있었던 전시회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훗날 피카소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한국에서의 대학살>(1951)을 그렸습니다. 피카소는 1937년에 <게르니카>로 조국의 동란을 기소하면서 전쟁의 비극을 알렸는데, 한국에서 동란이 일어나자 고야와 마네의 전례를 따라 유사한 방법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했습니다.

마네의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 중에서 <군인 Soldier>, 유화, 99-59cm.
이 작품을 완성했을 때 친구들이 나폴레옹 3세의 위신을 손상시키므로 발표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배우 에밀 앙브르가 1878년 뉴욕으로 갈 때 이 작품을 가지고 가서 이듬해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했습니다.
마네는 1867년 9월 늦게 막시밀리안의 처형장면을 다시 그렸는데, 그림을 구성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습작한 네 점은 현재 런던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막시밀리안이 자신의 두 장군들 사이에 선 채 처형을 당하고 있는데, 실재 처형장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마네의 의도대로 구성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네는 고야와 마찬가지로 처형당하는 사람들과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평행으로 구성했습니다. 이 작품에 관해 르누아르는 훗날 화상 볼라르에게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완전히 고야다. 하지만 마네는 마네가 아닌 적이 없었다.” 마네는 1년 반 동안이나 유화와 석판화로 이 비극적인 사건을 폭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