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서대로 오다노부나가,토요토미히데요시,도쿠가와이에야스 입니다,,
임진왜란 전후 원숭이들 권력자입니다,
#.3인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비교
1. 개성
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직전신장, 1534~1582. 6. 21. 만 48세)
일본의 전국(戰國)․아즈치시대[安土時代]의 무장(武將). 1549년 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뒤를 이어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의 태수가 되고, 이웃의 여러 제후를 평정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고, 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막부(幕府)의 회복을 청해 왔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교토[京都]를 진정하고 막부를 재건해 실권을 장악하였다.
73년에는 아시카가를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단절시켰다. 그 동안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으나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습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전국전란의 시대에 통일의 서광을 비추어 준 전제무장(專制武將)으로 주목할 만한 여러 정책을 과감하게 실시하였다. 구체제․구관습의 타파, 새 인물의 등용, 금은 광산의 경영, 화폐의 주조, 도로․교량의 정비, 관소(關所:검문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으로 새 시대의 도래에 대응하였다. 이것을 기반으로 한 천하통일의 위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계승되었다.
- 천재적 군사 재능 소유.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기 직전 가신의 배반으로 비참한 최후.
- 히데요시 보다 2살 많음.
- 히데요시에게 토요토미(豊臣)<신하 중의 신하라는 뜻>라는 성을 내림.
- 모리 난마루(森蘭丸 삼난환, 1565~1582)이란 소년과 남색 즐김. 자식 21명.
모리에게 6만석의 영지 하사. 파격적 대우. 당시 천황은 10만석 영지 소유.
* 소총(鳥銃) : 미카와의 시타라가 하라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 연합군이 3,000자루 총으로 타게다의 기마부대를 물리침.
-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습격을 받고 자살 함.
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풍신수길, 1536~1598. 8. 18. 만 62세)
일본의 무장․정치가.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 출생.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조대신[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고 혼노사[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가 취한 최초의 행동은 그때까지 되풀이되던 왜구의 노략질을 국가적 규모로 확대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나고야[名古屋]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로 하여금 1만 8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하게 하였다. 조선은 처음에 패배하였으나 전열을 정비한 관군과 의병 및 수군의 활약으로 왜구를 모두 퇴각시켰다. 이 전란으로 조선은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노략질 당했고, 조선의 도공(陶工)을 납치한 일본은 도자기 문화를 이룩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 비천한 가문(하급 무사). 원숭이 형상의 얼굴. 잔혹한 성격. 키 160㎝ 전후로 추정.
- 젊어서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다조대신[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하사 받은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 유부녀 선호 습관 : 귀부인을 닥치는 대로 괴롭힘. 이는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과 신체적 열등감에서 오는 비뚤어진 우월감의 표시이자, 치졸한 지배 심리의 확인.
- 본처 1(네네), 애첩 16, 측실 300명.
- 장남 : 쯔루마쓰(루)(鶴松). 애첩 요도토노(淀殿 정전) 1589년 출산, 3살(1592년) 요절 추정.
- 차남 : 히데요리(秀賴 수뢰) 애첩 요도기미(淀君)가 1593년 출산. 1615년 사망(22세). 에도의 사서 《명량홍범 明良洪範》은 히데요시의 자식이 아니라고 기록.
-히데요시는 임종 전 가신들에게 차남의 앞날을 당부. 서약서 강요.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가 결혼.
-히데요시 사후 17년째인 20세(1615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공격, 1614~15년 2차례에 걸쳐 오사카[大阪]전투를 승리. 히데요리[秀賴 수뢰] 모자가 자살. 1615
-히데요시 본처는 1만 6,000석의 영지를 도-이로부터 받아 산사에서 말년을 보냄.
-히데요리의 처(도-이의 손녀)는 두 번째 결혼 후 7개월만에 사망.「서방 잡아먹는 계집」, 천 명의 사내 상대했다고 센히메(千姬)라는 별명의 요부로 기록.
** 간빠쿠(關白) : 일본국 총리로 명분상의 왕을 대신하는 정치 실권자.
** 다이고(太閤) : 간빠쿠(關白)를 아들에게 물려준 사람--히데요시.
** 히데쯔구(秀次)-히데요시 양자. 칸빠쿠를 물려 받음.
하시바 히데나가(羽紫秀長 우자수장)?
** 슈라꾸다이(聚樂第 취락제) : 토요토미의 저택.
**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 덕천가강의 권력장악 후 직명.
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덕천가강. 1542. 12. 26~1616. 4. 17. 만 74세)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초대 장군. 아명 다케치요[竹千代].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 송평광충]의 장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동맹을 맺고 그의 힘을 빌려 스루가[駿河 준하]․도토미[遠江 원강]․미카와를 영유함으로써 동해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1603년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에서 그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覇者)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하였다. 14~15년 2차례에 걸쳐 오사카[大阪]전투를 일으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 수뢰]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의 잔당을 완전히 멸망시켜 대망의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여러 가지 정책을 수행하여 일본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하였다.
- 히데요시 사후 천하 통일, 에도(江戶) 막부 시대를 염. 250년 지속.
- 155㎝ 전후. 정력 전륜<이토 히로부미 163㎝, 스탈린 160㎝>.
- 주로 전쟁 미망인 상대 : 우수가 긷든 외로운 전쟁 미망인의 모습은 고독한 소년시절을 보내고, 전국 시대를 살아 남은 그에게 연민과 색다른 욕정을 불러 일어 킨 것 같다.
- 네 살배기 딸의 죽음 : 1609년 천황의 지근 여관 5명의 무단 외출과 밀통 사건 후.
2. 성 풍습
가. 남색 풍습
- 일본의 남색에 대한 기록 : 8세기 중엽의 《만엽집(萬葉集)》이란 시가집에.
- 1420년 조선 세종의 명령에 따라 무로마치 제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
파견된 강희맹은《노송당 일본행록》이란 견문록에 조야에 퍼져있는 남색 풍습 소개.
① 20세 이하 소년 ② 눈썹 면도 ③ 주홍빛 화장 ④ 쇼군 시중 ⑤ 이성, 동성 다 즐김.
나. 성의 속설
- 일도이비삼첩사기오처(一盜二婢三妾四妓五妻) : 성욕(섹스) 상대의 순서.
① 남의 여자 훔쳐서 ② 자기 직원, 부하 ③ 첩 ④ 기녀 ⑤ 본처=마누라
-당시 일본의 풍습
① 부하 아내 손대기 ② 아내의 상납 ③ 전쟁 미망인 상대
④ 어린 딸 관기로 만들기 ⑤ 남색
Battlestar_Galactica_-_Aqua_Vitae_(Choir) (1).swf
충무공 이순신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이다.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당시 한성부 건천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하에서 성장했다.
그의 전몰 후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품계에 오른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와의 사이에 회(薈)·열()·면(葂) 등 3형제와 딸을 두었고, 서자로 훈(薰)·신(藎) 그리고 2명의 딸을 두었다.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회는 현감, 열은 정랑(正郞)이었으며 면은 난중에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훈과 신은 무과에 올랐다. 두 형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또한 조카들을 친자식과 같이 극진하게 대했다고 한다.
◐ 무과급제와 초사(初仕)시절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했다.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7월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었다.
1582년 1월 군기경차관 서익(徐益)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첫번째로 파직되었으나 그해 5월 다시 임명되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83년 7월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10월 함경북도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11월에 훈련원참군이 되었으나 15일에 아버지가 죽자 휴관했다.
1586년 1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임명되었다가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이 있자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병마만호(造山堡兵馬萬戶)로 천거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 임진왜란 때의 행적
1592년 3, 4월경에는 새로 건조한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는 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제1차 출전으로 5월 4일 새벽 전선(戰船:판옥선) 24척과 협선(挾船) 15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 5월 7일 옥포(玉浦)에 이르러 3회의 접전에서 왜선 4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서되었다,
제2차 출전인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 적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었으나 그대로 독전(督戰), 6월 5일의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및 6월 7일의 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모두 72척의 적선을 무찔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었다.
제3차 출전인 7월 8일의 한산해전에서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일본함대를 견내량(見乃梁:지금의 거제군 시등면)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鶴翼陣)의 함대 기동으로 급선회하여 일제히 포위 공격함으로써 적선 73척 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으니, 일본수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바다에서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제4차 출전으로, 9월 1일 부산포(釜山浦)를 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함으로서 치명상을 입혔다. 1593년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8월 15일에는 수사의 직에 더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한편 호남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산도(突山島)에 입주하게 하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과 장기전에 대비한 둔전(屯田)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1594년 3월 4일 2번째 당항포해전에서 적선 8척을 분파하고 9월 29일의 장문포해전(長門浦海戰)에서는 적선 2척을 격파했으며, 10월 1일의 영등포해전에서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과 약속하여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했다.
1595년 2월 27일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사이의 불화를 염려하여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켰으나, 이듬해 원균의 중상과 모함으로 비품을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끝에 죽이자는 주장이 분분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구명 진정서)에 크게 힘입어 도원수 권율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하명을 받고 특사되었다.
9월 16일 이른 아침 명량해협으로 진입한 적선 200여 척과 사력을 다하여 싸워 일본수군의 해협 통과를 저지했다. 명량대첩으로 선조는 이순신에게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서훈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0월 14일 셋째 아들 면이 아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부고가 온 뒤로부터는 심신의 쇠약이 더해지며 자주 병을 앓게 되었다.
1598년 2월 18일 고금도(古今島)를 본거지로 선정하여 진영을 건설, 피난민들의 생업을 진작시켰다. 7월 16일에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 조선수군과 합세했다.
8월 19일(일본력 8. 18),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왜군은 일제히 철군을 시작했다.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내며 퇴각로의 보장을 애걸했으나, 이순신은 '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는 결연한 태도로 이를 물리쳤다.
◐ 이순신의 전사.
조·명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노량으로 진격, 다음날 새벽 2시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소오 요시토모[宗義智], 다치바나 도오도라[立花統虎]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적선과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였다.
이 마지막 결전이 고비에 이른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새벽, 이순신은 독전중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순신의 상여는 마지막 진지였던 고금도를 떠나 12월 11일경에 아산에 도착,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에 아산 금성산(錦城山) 밑에 안장되었다.
◐ 이순신의 전사 후.
전사 16년 후인 1614년(광해군 6) 지금의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천장(遷葬)했다. 전사 후 우의정이 증직되었다.
1604년 10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1704년 유생들의 발의로 1706년(숙종 32)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세워졌다.
1793년(정조 17) 7월 1일 정조의 뜻으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 1795년에는 역시 정조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가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에 의해 편찬, 간행되었다.
인품과 문학
이순신의 문필은 〈난중일기〉와 더불어 몇 편의 시가와 서간문이 남아 있어 그의 문재(文才)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朴惠一 글 -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혈염산하 크게 한번 휩쓰니 피로써 산과 강을 물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