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豊島) 여행
여행일 : ‘18. 3. 19(월) 소재지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트레킹코스 : 풍도선착장→은행나무→복수초·바람꽃 군락지→후망산(候望山, 176m)→대극군락지→북배해안→해안도로→등대→풍도선착장(소요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대부도에서 남서쪽으로 24km 떨어져 있는 풍도는 섬 둘레 5.4㎞에, 전체 면적이 1.84k㎡에 불과한 작은 섬으로, 2017년 기준 124명의 주민이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드물다는 증거일 것이다. 북배 지역의 해식애를 빼놓고는 섬의 경관 또한 딱히 내세울 것이 없다. 그런데도 요즘은 ‘민박’으로 벌어들이는 부수입이 제법 짭짤하단다. 이곳이 복수초와 노루귀, 바람꽃, 대극, 현호색 등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는 것이 세간에 입소문을 탔기 때문이다. 특히 풍도바람꽃과 풍도대극 등 이곳 풍도에서만 자생하는 야생화도 두 종이나 된단다. 이로 인해 야생화에 매혹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 그런데 배편은 하루에 한 번만 운항하니 그들이 머물 집들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당일치기로 다녀가기도 한다. 안산의 탄도항이나 당진의 도비도항, 서산 삼길포항 등지에서 단체로 유람선이나 낚싯배를 빌려 아침 일찍 섬에 들어 한나절 돌아본 뒤 오후에 되돌아 나오곤 한다. 참고로 ‘풍도’라는 지명은 섬 주변에 수산자원이 풍부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 이전에는 ‘단풍나무 풍(楓)자’를 써서 풍도(楓島)라고 하였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에 편입되면서부터 현재의 풍도(豊島)로 바뀌었다고 한다.
▼ 찾아오는 방법 풍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서산시 대산읍에 있는 ‘삼길포항’까지 와야 한다. 섬까지 태워다 줄 유람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때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정기여객선은 인천여객선터미널이나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에서 타야만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매일 1회씩만 운행하기 때문에 당일치기 섬 여행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인해 우리 같은 단체 여행객들은 삼길포항에서 유람선이나 낚싯배를 빌려 타고 섬으로 들어가는 게 보통이다. 참고로 삼길포항은 서산 대호방조제의 서쪽에 위치하는 항구로 서해안의 미항으로 불린다. 인근 해역에서 ‘우럭’이 많이 잡힌다고 해서 매년 ‘우럭축제’가 열리곤 한다. ▼ 우리를 태우고 갈 뉴스타호, 20톤 급의 작은 유람선인데도 정원은 86명이나 된단다. 산악회 둘이 연합해서 이용해도 괜찮겠다. 그러나 이 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수이다. 정기 항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 삼길포항에는 이런 유람선들이 몇 척 더 있는데, 평소에는 인근에 있는 난지도와 소난지도, 비경도, 대조도, 소조도, 도비도 등을 돌아보는 코스로 운행된다고 한다. ▼ 배를 탄지 50분쯤 지나자 풍도에 도착한다. 배에서 내리면 산비탈에 기대어 들어선 섬마을이 나타난다. 고작 1.84㎢에 불과한 꼬맹이 섬인 점을 감안하면 제법 큰 규모이다. 그런데 이곳의 주소가 좀 묘하다. 당진군의 석문에서 12㎞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보다 배나 먼 곳에 있는 안산시의 주소(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를 쓰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곳 풍도는 조선시대 당진팔경(唐津八景) 중 여덟 번째인 ‘풍도요망(豊島遙望)’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요망(遙望)이란 ‘먼 곳을 바라본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풍도요망(豊島遙望)’은 ‘멀리 풍도가 보인다’라는 뜻이 된다. 아니면 ‘풍도에서 먼 곳을 바라본다’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 풍도는 조선시대에는 ‘단풍섬(楓島)’이라 불릴 정도로 단풍나무가 많은 섬이었다. 그러니 가을이면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이로보아 멀리서 바라본 풍도가 극히 아름답다고 해서 팔경에 뽑혔지 않나 싶다. ▼ 선착장에는 풍차(風車)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예쁘장한 게 사진 촬영 때 배경으로 삼기에는 좋겠으나 이곳과는 어떤 인연이 있는지 모르겠다. 섬 이름인 ‘풍도’와 ‘풍차’가 같은 ‘풍’자 돌림이라서 일까? 아니면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진하듯 여행객들이 몰려들면 좋겠다는 내심을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풍차의 옆에다 만들어놓은 승객대기소의 기둥에는 ‘야생화 보물섬, 풍도’라고 적힌 입간판이 매달려 있다. 꿩의 바람꽃과 복수초, 천남성 등 야생화의 사진도 함께 그려져 있다. 물론 풍도대극과 풍도바람꽃 등 이곳에서 발견되는 변종(變種)의 사진이 빠졌을 리가 없다. ▼ 마을로 들어가는 길, 왼편에 ‘대남초등학교 풍도분교장(大南初等學校 豊島分校場)’이 보인다. 1933년에 진명학원으로 문을 열었고, 1943년에는 8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니 제법 역사가 있는 학교라 하겠다. 1958년에 풍도국민학교로 승격되기도 했으나, 1986년에는 다시 분교(分校)로 격하되었다고 한다. 또한 올해는 신입생이 없어 입학식도 열지를 못했단다. 이 학교도 세월의 무게를 배겨내지 못한 셈이다. ▼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마을 복지회관’이 나온다. 이층으로 지어졌으니 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곳도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구성원이 노인들이라는 섬의 특성을 살린 ‘실버복지’ 말이다. 냉난방시설 등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비용부담 없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요즘의 실버복지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건물의 외벽(外壁)에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세계 3대 미항’ 가운데 하나라는 베네치아를 닮은 그림인데, 복지제도가 잘 갖추어진 이탈리아에 못지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은근한 자랑일지도 모르겠다. ▼ 허물어져가는 빈집들도 몇 보인다. 이곳도 역시 다른 섬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모양이다. 주민들이 점점 노령화(老齡化)되어가다가 끝내는 공도(空島)로 변해 버는 추세 말이다. 하긴 이곳은 그게 더 심화될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혹자는 ‘풍도(豊島)’를 주변에 수산자원이 풍부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풍도의 주변에는 갯벌이 없다.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해마다 겨울철만 되면 수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인근 섬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만큼 정주(定住) 여건이 좋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 마을을 벗어나면 길은 밭두렁을 따라 이어진다. 하지만 고갯마루에서 임도와 만나는 걸 보면 다른 길도 있었나 보다. 아무튼 이정표가 없으니 고갯마루에 서있는 마치 부채처럼 생긴 거대한 나무를 목표로 삼아 진행하면 된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0분 만에 풍도를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은행나무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나이가 무려 400살이나 되는 이 은행나무는 높이 25m에 가슴높이 둘레가 7.5m로 성인 다섯 사람이 팔을 벌려야 닿을 만큼 거대하다. 또한 밑동부터 여러 가지로 갈라져 자랐고, 가지마다 하늘로 뻗치면서 마치 거대한 꽃처럼 보인다. 풍도 주민들은 이 노거수(老巨樹)를 조선시대 인조(仁祖) 임금이 심었다고 믿는다. 이괄(李适)이 평안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을 에워싼 일이 있었다. 여기까지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때 난을 피해 서울을 떠난 임금이 남양에 이르러 배를 타고 풍도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 섬에 머문 기념으로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고 대부도로 떠났다는 것이다. 때문에 주민들은 이 나무를 어수거목(御手巨木)이라고 부른다. 인조가 심은 나무라는 뜻이다. 661년 나당 연합군의 장수로 왔던 소정방(蘇定方)이 귀국하던 중 풍도의 풍광에 반하여 들렀다가 심어 놓았다는 얘기도 전해지니 참조한다. 하지만 둘 모두 역사적 사실이 아니니 알아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2003년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관리는 안산시에서 하고 있다. ▼ 은행나무 옆에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 이용되는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으며, 나무의 아래에는 ‘은행나무샘’이라 불리는 샘(井)이 있다. 은행나무가 수맥(水脈)을 끌어 당겨 만든 특이한 샘인데, 풍도가 옹진군에 속해있던 시절에는 옹진군에 속한 140여 개 섬 가운데에서 물맛이 가장 좋기로 소문났었다고 한다. 하지만 물을 마실 형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덮개를 씌우고 플라스틱 바가지까지 놓아두었지만 물이 고여 있는데다 청소까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 정자에 오르면 마을 풍경과 바다가 한눈 가득히 들어온다. 하지만 딱 거기가지다. 그 너머의 바다는 짙은 해무(海霧) 속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당진 쪽의 육지는 물론이고 난지도와 육도까지도 사라져버렸다. ▼ 야생화 군락지로 향한다. 정자의 오른편으로 난 산자락을 따르면 된다. 널따란 길을 따라 200m쯤 더 가면 또 다른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 그것도 역시 수령이 500년이 넘었다지만 보러가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일부러 찾아가야 할 만한 내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군락지로 올라가려는데 ‘위험구간 출입제한 및 임산물 불법채취 금지’ 안내판이 눈에 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곳에다 세워놓았는지 모르겠다. 자칫 야생화군락지의 출입을 금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곳에 자리 잡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 50m쯤 올랐을까 ‘야생화가 아파해요. 보호해 주세요.’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옛날보다 꽃이 많이 줄었다는 얘기가 들리더니 야생화보호를 위해 주민들이 발 벗고 나섰나 보다. 맞다. '야생화의 천국'이라는 풍도, 하지만 이 명성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풍도의 야생화가 예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의 방문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을 보기만하고 가는 것까지 나무랄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진 찍는 사람들이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들에게 수난을 주기 때문이다. 꽃대를 촬영하기 위해 보온재인 낙엽을 들춰내서 야생화의 주변을 맨땅으로 만드는가 하면, 심지어는 꽃대를 잘라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발길이다. 길을 따라 유도밧줄을 설치하고 들어가지 말라고 안내판까지 붙여 놓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꽃을 찍는답시고 마구 짓밟고 다니다보니 낙엽 속에서 올라오던 꽃대가 발길에 깔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깔판을 가져와 그 위에 몸을 누이고 엎드려서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니 더 말하면 뭐하겠는가. ▼ ‘풍도를 아껴주세요’라고 적힌 입간판도 보인다. 옆에는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꽃들의 사진도 넣었다. ‘풍도 카페 예뻐요’라는 첨언까지 해두었다. 그렇다. 풍도는 상상을 뛰어 넘는 꽃의 섬이다. 이때만큼은 풍도가 아니라 화도(花島)다. 복수초, 변산바람꽃, 노루귀, 풍도대극 등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군락을 이룬다. 천상의 화원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그런 환경을 부디 해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주민들이 하고 있는 게다. 소문난 '야생화의 천국'은 이곳 풍도 말고도 많은 편이다. 점봉산 곰배령이나 지리산 노고단도 그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곳은 훼손 문제가 크게 대두되지는 않는다. 정해진 탐방로 외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야생화도 탐방로 안에서만 촬영할 뿐이다. 야생화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눈으로만 즐기면 좋겠다. 굳이 사진에 담고 싶다면 조금 떨어져서 찍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끝없는 욕심 때문에 짓밟히는 야생화가 없었으면 좋겠다. ▼ 조금 더 올라가자 하얀 줄이 쳐져 있는 게 보인다. 탐방로를 벗어나지 말라는 금(禁)줄이다. 금줄 너머는 천지가 ‘복수초(福壽草)’다. 한두 송이가 아니라 온 땅을 노랗게 색칠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행여나 밟을세라 사뿐사뿐 걸어본다. 황금색 꽃잎을 여는 복수초는 일본에서는 새해 복을 전한다는 의미로 선물로 애용된다. '얼음새꽃'이라는 우리말 이름이 예쁜 꽃이다 ▼ 원수를 갚겠다는 의미로 무섭게 들리는 ‘복수초’는 사실은 복(福)과 장수(壽)를 함께 써서 ‘복 많이 받고 오래 살아라.’라는 의미를 지닌 꽃이다. 이 꽃은 스스로의 열로 눈을 녹이고 꽃을 피운다. 전국 각지에 분포하지만 그리 흔한 꽃도 아니다. 빠른 곳은 2월부터, 느린 곳은 5월까지 핀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꽃잎 한가운데에는 밝고 선명한 노란색 수술이 가득 모여 있고, 수술 속에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돌기가 난 연둣빛 암술이 자리 잡고 있다. 풍도의 복수초는 대부분 가지복수초로 보면 된다. 가지복수초는 복수초에 비해 줄기가 많이 갈라지고, 꽃이 더 크고, 잎이 꽃과 함께 나며, 꽃받침 잎이 5-6개로 적고 꽃잎보다 짧은 게 특징이다. ▼ ‘탐방객안내소’가 있는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이젠 바람꽃이 지천이다. 군락이라는 표현이 모자랄 지경이다. 풍도에서만 자란다는 ‘풍도바람꽃’일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노루의 귀처럼 솜털이 보송보송한 ‘노루귀’와 제비꽃, 개별꽃, 천남성, 현호색 등 꽤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이 두툼한 낙엽 사이에서 고개들을 내밀고 있다. ▼ ‘풍도바람꽃(Eranthis pungdoensis B.U. Oh)’은 변산바람꽃의 변종으로 하얀 꽃받침이 깔때기 모양으로 더 크고, 꽃잎이 노란색이 도는 녹색이라서 하얀 꽃받침과 푸른빛이 도는 수술이 특징이다. 향토식물학자 김재길씨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2009년 변산바람꽃의 신종으로 학계에 알려진 이후 2011년 1월 풍도바람꽃으로 정식 명명되었다. 참고로 바람꽃의 학명은 ‘아네모네’이다.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아도니스가 멧돼지에게 받혀 죽은 뒤 흘린 피에서 자라났다는 그 아네모네이다. 서양에서는 진홍빛 아네모네가 대세라지만, 풍도바람꽃은 순백색이다. ▼ ‘대극’도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니 누군가가 주변의 낙엽을 치워버린 탓에 억지로 맨몸을 드러낸 꼴이 되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현수막은 바로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부탁이었던 모양이다. 그냥 촬영만 했더라면 좋으련만 조금 더 나은 작품을 얻는답시고 이렇게 파헤쳐 놓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보니 그냥 은둔의 섬으로 남아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듯 무릇 비밀이란 오래갈 수 없는 법이다. 비밀의 정원은 소문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는 인기 TV 예능 프로그램 등에도 소개되면서 국내 최고의 야생화 자생지로 전 국민에게 알려졌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풍경들을 만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말이다. ▼ 이젠 후망산으로 오를 차례이다. 산책로는 탐방안내소 뒤편으로 열린다. 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 또한 걷기에 딱 좋을 만큼만 가파르다. 비로 인해 미끄럽다는 게 작은 흠(欠)일 수도 있겠다. ▼ 5분 조금 못되게 올랐을까 도톰하게 솟아오른 지점에 이른다. ‘후망산(候望山)’ 정상이다. 하지만 독립된 봉우리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약간 솟아오른 능선 상의 한 지점으로 보는 게 옳겠다. 그러니 정상표지석이 세워졌을 리가 없다. 그 흔한 이정도 보이지 않는다. 함께 걷던 일행의 고도계(高度計)가 아니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게 분명하다. 참고로 ‘후망산’은 호망산(胡望山)으로도 불린다. 일본과 청나라가 아산만에서 교전할 때에 청인들이 망을 보던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후대로 오면서 변음이 되어 후망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망산 꼭대기에 일본이 승리의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다른 한편으론 옛날에 풍도 주민들이 산에 올라 바다에 해적이 출몰하는지 망을 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풍도의 아낙네들이 전라도로 세곡을 실으러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 산에 올라 망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 하산은 ‘북배’ 쪽이다. 이동통신사의 송신탑이 세워져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잠시 후 군부대로 연결되는 차도에 내려서게 되고, 산책로는 차도와의 접점에서 오른편 산비탈로 내려선다. ▼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내려서는 게 버겁다는 얘기는 아니다. 비로 인해 젖은 땅이 하도 미끄러워 다소 부담스러울 따름이다. ▼ 이 근처는 ‘대극’의 군락지이다. 대극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아직 분류기준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꽃의 밑동을 싸고 있는 총포(總苞) 안쪽의 털 유무에 따라 ‘붉은대극’과 ‘풍도대극’ 등으로 나눈다고 한다. 4월이 되면 어른 무릎까지 자란다는 이 대극은 그때가 되면 찬란한 초록으로 된다. ‘풍도대극(Euphorbia ebracteolata var. coreana Hurus)’은 붉은대극 보다 잎이 좁고 총포 내에 털이 밀생하는 특징을 가지는 것을 확인해 변종으로 처리하며 학명을 붙였다. 또한 동위효소 분석결과 독특한 대립인자를 갖고 있어 붉은대극 집단과의 유전성 동질성이 매우 낮다고 한다. ▼ 풍도대극은 이른 봄 붉은 보라색으로 올라와 연녹색의 청순한 잎으로 자란다. 창칼 같은 잎새가 꽃잎을 삥 둘러 있어 ‘큰 대(大)’에 ‘창 극(戟)’을 쓴다. 붉은대극과 같은 속(屬)에 속하며 생김새도 비슷하다. ▼ 비탈진 내리막길이 끝나는가 싶으면 길이 둘로 나뉜다. 풍도의 명물이라는 ‘북대’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야한다. 입구에 출입을 금지한다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지만 이를 무시하고 들어서야 한다. 아까도 거론했었지만 왜 세웠는지를 알 수가 없는 시설물이다. 아무튼 북대를 둘러보고 난 후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북대에서 길이 끊겨있기 때문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또 다시 길이 나뉜다. ‘북대’는 왼편으로 가야하지만 오른편 길도 놓쳐서는 결코 안 된다. 그 끄트머리에 있는 바위벼랑이 숨겨진 명소이기 때문이다. ‘북대’를 온전히 볼 수 있는 유일한 전망대라고 보면 되겠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도의 붉은 바위는 소문대로 절경이다. 나뭇잎이 져버린 계절이라 조금 덜하지만 풀잎이 녹색으로라도 물들 경우엔 붉은바위와 함게 장관을 이룰 것 같다. ▼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왼편 길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풍도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북배’에 닿는다. ‘북대’는 붉은 바위를 뜻하는 ‘붉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추정되는데, 풍도 서쪽 해안을 이루고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경(祕境)이다. 북배의 붉은 바위는 그 색감이 오묘하며 파란 바다와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백패킹(backpacking)의 천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백패커(backpacker)들을 만날 수 없다. 2017년 4월부터 이를 전면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풍도는 수도권에서 가까운데다 아름다운 바다와 다양한 야생화를 볼 수 있다는 특이성 때문에 사진작가와 백패커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대신 섬은 쓰레기와 오물로 인해 몸살을 앓아왔다. 아무데서나 용변을 보는가 하면, 무분별하게 취사를 했고, 각종 쓰레기는 스스럼없이 내버렸다. 이를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백패킹을 금지한다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이다. ▼ 바위 너머로는 무인등대가 세워진 ‘북배딴목’이 보인다. 밀물 때는 풍도 안의 또 다른 섬이 되고, 썰물 때는 바닷길이 열려 풍도와 연결되는 ‘모세의 기적’을 연출하는 곳이다. ‘딴’은 외딴, ‘목’은 목처럼 가늘게 이어져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낡은 건물이 보이는 방향이다. 잠시 후 흉하게 파헤쳐진 채석장(採石場)이 풍도의 아픔을 전해준다. 170m높이의 석산(石山)으로 오랜 동안 이곳 풍도의 경관을 해쳐왔단다. 지난 2004년 채석장허가는 끝이 났지만 석산 입구에는 당시 사용하던 장비들이 녹슨 채로 방치되어 있다. ▼ 이제부터는 해안선을 따라 난 비포장도로를 따른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겟드레해변’은 모래사장이 일절 보이지 않는 해안이다.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거무스레한 돌들이 널려있을 따름이다. 이곳 풍도의 특징 중 하나란다. 이 일대의 섬들은 섬의 서쪽 만입부에 모래사장을 끼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풍도 주변 해역은 파랑의 힘이 강해서 모래와 같은 작은 퇴적물이 모두 제거되어 간석지(干潟地)나 사빈(沙濱)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안을 그냥 버려둔 것은 아니다. 바닷가에 펜션을 지어 자갈밭에서라도 해수욕을 즐길 수 있게 해놓았다. ▼ 해무가 짙은 바다 풍경이 고즈넉하다. 풍도해전 당시 청나라 수군들이 떠내려 왔다는 ‘청옆골 해변’이 바로 옆이니, 저 바다에도 수많은 시체들이 떠다녔을 것이다. 참고로 이곳 풍도 앞바다는 풍도해전(豊島海戰)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94년 일본군 함대가 청군 함대를 공격하면서 일으킨 이 전투를 시발점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전투는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피해가 전무한 일본과는 달리 청나라는 수많은 전함이 격침 또는 대파됐다.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않은 자의 차이가 그런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보면 되겠다. 싱겁게 끝난 풍도해전은 청일전쟁의 예고편이었다. 이어서 전개된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연전연승하며 전쟁 발발 8개월 17일 만에 청의 항복을 받아냈다. 대신 청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해야만 했고 그로 인해 무수히 많은 것을 잃었다. 조선에 대한 종주권(시모노세키 조약 제 1조가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점을 확인한다는 내용이었다)도 이때 잃었다. 그렇다면 독립국이라 재확인된 조선은 보다 당당해졌을까? 그렇지 않다. 청나라 대신에 일본의 속국(屬國)이 되었을 뿐이다. 자나 깨나 당파싸움이나 일삼던 위정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니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두 번 다시는 우리나라에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손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잘 골라 뽑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잠시 후 또 다른 해안을 만난다. ‘진달래석’이라는 수석(壽石)의 채집 장소로 유명한 진장수리해변이 아닐까 싶다. 해안에 널린 자그마한 돌들이 약한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붉으면서도 각진 모가 없는 몽돌들이 깔려있는 것이다. 서해의 거친 파도에 시달리느라 각진 모는 사라지고 저런 모양으로 변했나보다. 돌에 새겨진 문양이 수려하다는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해안을 따라 켜켜이 쌓여있는 몽돌들이 세월과 자연의 신비함을 더해준다. ▼ 오른편 산자락에 긴 계단이 놓여있다. 그 위에는 등대지기가 없는 ‘풍도등대(豊島燈臺)’가 있다. 서해안의 요충지인 평택과 당진항을 드나드는 배들의 안전운항을 위해 1985년에 세운 등대이다. 야간이면 6초 간격으로 백색불빛이 깜빡거리며 이 불빛은 15Km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단다. 입구에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의 자연경관이 빼어나다는 자랑을 적은 안내판도 세워두었다. 150개도 넘는 계단을 오르면 등대의 주위에다 벤치를 놓았다. 주변 경관을 실컷 구경해보라는 모양이다. ▼ 등대에 오르면 바다건너에 있는 부도(鳧島)가 눈에 들어온다. 섬의 생김새가 마치 물오리가 두둥실 떠서 오수(午睡)를 즐기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도깨비가 많다고 하여 ‘도깨비 섬’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많은 도깨비를 쫓기 위해 도깨비가 제일 싫어하는 피(血)와 소금(鹽)을 섞는다는 의미로 ‘피염도(血鹽島)’라고도 불린단다. 저 섬은 역사가 100년도 더 되는 등대(燈臺)로 입소문을 탔다. 인천항관문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역적 이유로 1904년에 벌써 등대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위치의 중요성에 걸맞게 항로표지의 주요기능인 광파·전파·음파표지를 모두 갖춘 등대이다. 이 등대의 등탑은 높이 15.2m, 지름 3m 규모로 불빛은 15초에 한번 반짝인다. 2001년에는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프리즘 렌즈를 이용한 회전식 대형등명기를 설치하여 약 50km의 먼 곳에 있는 선박에서도 식별이 가능하도록 광력을 증강하기도 했다. ▼ 해안가 몽돌해변이 잘 보이는 곳에 2층으로 된 어촌체험마을 건물이 있다. 1층은 마을회관이다. 나머지 1∼2층은 냉난방기, TV, 냉장고 등 편의시설을 갖춘 방 5개로 꾸몄다. 어촌체험 숙박시설인데 큰 방은 15∼17명까지 묵을 수 있단다. 도로 건너 바닷가에는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창서도와 창도 등 주변의 섬들은 물론이고 바다 건너에 있는 영흥도화력발전소까지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 해안선을 끼고 난 도로의 콘크리트 구조물에 뭔가가 적혀 있는 게 보인다. 풍도마을의 사연들, 즉 마을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것이란다. 풍도의 60세대를 대상으로 주민과 함께 사라져가는 섬의 이야기, 생활사를 채집하여 시각화 작업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지역민들은 물론이고 풍도를 방문하는 모두가 지역에서 사라져가는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고 발전 시켜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경기문화재단의 ‘문화활생공명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는데 참여 작가의 이름을 적어 넣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 굴 딴 돈으로 인천으로 유학 보냈다는 문장의 옆에는 굴을 따는 아주머니의 삽화도 그려 넣었다. 아무튼 이 글들을 읽으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옮겨본다. 전쟁 때 부모 잃고 9살에 민며느리로 시집와서 고생만 죽도록 하고 새끼 낳고 사니까 그래도 좋다는 송춘순 할머니 얘기가 있는가 하면 주민들을 실어 나르던 여객선 왕경호 이야기, ‘삭발스님 머리 모양 온산을 깎았고, 백호 넘는 가옥이 동네 가득 추녀 맞댔지, 한때는 천명 가까운 주민 살았고, 황해 푸르러 정기 감도는 곳 둥실 떠 있다 내 고향 풍도’라는 싯귀(詩句)도 적혀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 곳, 맥아더 장군의 태극기가 있던 곳’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이곳 풍도가 맥아더장군과 얽힌 이야기 하나쯤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3시간 만에 다시 돌아온 풍도항(豊島港), 배의 출항시간은 아직도 멀었다. 마음까지 여유로워졌는지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풍도 포구(浦口)는 둥그렇게 생긴 만의 안에 들어있는 모양새이다. 둥그렇게 방파제를 쌓고 그 가운데를 조그맣게 뚫어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배를 묶어두는 선착장까지 갖추고 있음은 물론이다. 비록 인공(人工)으로 만들어졌지만 웬만한 태풍에는 끄덕도 없겠다. 방파제의 양쪽 끝에는 빨강색과 하얀색의 꼬마등대를 새워두었다. 경계표시이겠지만 항구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만드는 조형물로서도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 시간의 여유는 주변 풍광까지도 여유롭게 만들어주나 보다. 바다 풍경까지도 여유롭게 다가오는 걸 보면 말이다. 육도와 난지도 등 바다에 널려있는 크고 작은 섬들은 물론이고, 연기를 내뿜고 있는 굵은 굴뚝들까지도 시야에 들어온다. 왼편은 당진화력발전소일 것이고 오른편은 대산 석유화학공단이 아닐까 싶다. ▼ 민가의 대부분은 ‘민박’ 간판을 내걸었다. 어업에서 관광업으로 주업이 바뀐 셈이다. 부업(副業)으로는 산에서 채취한 나물을 팔면서 말이다. 주민들이 내다파는 산나물은 ‘달래’와 ‘사생이나물’이다. 그중 이름부터가 생소한 ‘사생이나물’이 눈길을 끈다. 민박집의 점심상에 이 나물이 올라왔기에 맛을 보니 미나리향이 강하다. 주인장께 물으니 다른 지방에서는 ‘전호나물’이라 부를 거란다. 그렇다면 향이 유독 강한 ‘돌미나리’ 정도로 보면 되겠다. 눈이 쌓인 늦겨울부터 싹을 틔우기 때문에 추위에 시달리면서 향을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나물은 우리네 식탁에 가장 빨리 올라오는 산나물 중의 하나이다. 생으로 무쳐먹거나 끓는 물에 데쳐먹어도 좋고, 삼겹살 먹을 때 상추와 함께 싸먹으면 그 맛이 끝내준단다. 물론 부침개를 만들어 먹는 방법도 있다. ▼ 섬마을에서 놓칠 수 없는 풍경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빨랫줄에 매달린 생선들이다. 이 생선들은 살을 에이는 겨울바람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건어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육지로 건너간 아들딸들의 밥상머리에 올라갈 것이다. |
출처: 가을하늘네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
첫댓글 사진 후기 감사드립니다.
좋은 곳 안내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