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한세대가 지난 40여년전. 우리는 울릉도 하고도 외따로이 떨어진
정매화골이란 곳으로 이사를 가 살게 된다.
그때는 차도 없었고 해안도로는 생기지도 않았을때다.
지금은 거의 육지로 나와서 살게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었고
울릉도에 유일한 일주도로는 북면사람들이 남면으로, 남면 사람들이 북면으로 왕래가 잦았다.
도동과 천부간 거리가 약 40리라고 하는데 그 중간이 우리의 옛집이었다.
어디가 되었던 출발지에서 정매화골까지 오게 되면 사람들이 시장기가 돌게 되고
목도 쉬어가면서 물도 마시고 간단한 간식도 들게 되는데...
그 시절은 돈이 그리 흔하지 않아서 라면이나 빵, 건빵 등을 사먹는 이들도 있지만 허기는 드는데
가진 돈이 없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라, 어머님은 항상 밥을 조금씩 더 해두고 보고픈 사람이 있으면
산채와 김치등과 함께 찬밥을 내다 주셨다.
시장하든 참에 먹는 밥맛이란 나물뿐인 반찬이 문제가 아니다.
아주 맛있게 먹고는 "고맙심데이" 인사를 몇 번이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집은 식은 밥이 끊이질 않았는데,
나중에 남은 찬밥을 어머님 잡수시곤 하거나 때로는 식구들 모두 식은 밥을 끊여 먹기도 했다.
나는 그게 못 마땅했다. "아부지가 등에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온 아까운 양식을 축낸다"고
울릉도 주식은 감자와 옥수수인데 우리 식구들은 적응이 안 되어서
쌀과 보리를 도동이나 저동에서 사서 아버님께서 이십여리를 등에다 지고 오셔야 했다.
어디 그 뿐인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이라 형편이 조금씩 나아진 후에는
한말짜리 통에다 석유를 사다 날랐지만 처음엔 석유도 무거운 댓병(2리터들이 소주병)에다
한 병씩 사다 밤에는 램프를 사용했는데 그 석유가 또 지나는 행인들과 나누어 쓸 수밖에 없었다.
북면사람들은 농사지은 곡식이나 산채며 약초 등을 캐다가 도동에다 내다 팔고
생필품을 구입해오거나, 남면사람이나 북면사람들이 일을 보러 갔다가 하루해가 다가면,
산골의 해는 일찍 지고 낮이라도 하늘이 안보일 만큼 우거진 숲길에 날이 어두워지면
더듬더듬 어두운 길을 걷다 우리 집의 불빛을 보면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소주병에다 석유를 반병도 채 안되게 담고 병 입구에다 솜을 막아서 불을 켜면 횃불이 된다.
석유값을 받지 않으려 해도 기어이 주고 가는 사람도 있고,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하고 가는 사람도 있지만, 다음에 석유를 가져다주는 이는 없다.
어떤 이들은 군청에 가서 이런 일들을 얘기 하고 도움을 받으라고 하지만 부모님들은
고개를 가로 저어셨다. 내가 못 마땅해 하면 "배고픈 사람 밥 주고 길 찾지 못하는 이에게
등불을 빌려주는 일이 좋은 일이다. 다 자식들한테 좋단다.
우리사 우야든동 느그만 잘 되면 되제...." 겨울에는 더욱 힘이 든다.
울릉도의 눈은 한번 내리면 이듬해 봄까지 녹지 않을 만큼 많이 온다.
한꺼번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산길을 오가는 이가 없을 때도 있지만
거의 가 하루를 안 넘기고 설피를 신고 길을 내기 시작하는데 길이 한번나면
눈길이 힘들긴 하지만 사람들의 왕래는 잦다.
그런 길에 불도 없이 늦은 밤길이나 술에 취한 사람이 길을 잃고 헤매거나,
낭떠러지에 떨어져 "사람 살려요"라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면
아버님은 로프를 가지고 나가셔서 사력을 다해 조난자를 구해 오셨다.
부모님의 청년시절 이십여년은 일본 도쿄에서 보내셨다. 2차대전 끝날 무렵은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고, 잠시 도쿄를 떠나 가와사키란곳에서 잠시 피난을 가셔서
천행으로 원폭의 피해를 무사히 넘기시고 해방 이듬해 귀국 하시게 되어
경주 안강에서 집을 새로 짓고 잠시 평온을 찾으셨지만,
곧 6.25사변으로 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으시다, 울릉도를 가게 된다.
그렇게 큰일을 몇 번이나 겪으신 어른들께서 "짧은 인생을 어찌 살아야 하는가?
이웃들과 더불어 살면서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셨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일을 생색을 내서도 안 되고
기꺼이 하는 '생각이 큰 사람'을 강조 하셨다.
남에게 좋은 일 하면, 자식이 잘 된다 하였으니 하늘에서 "쿵"하고 금덩어리가 떨어지려나?
하고 살아 보는데 내게 그런 일은 오지 않고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생각을 크게 가져 상대를 용서 하며 살고, 내가 베풀어 마음이 넉넉해지고 기쁨이 솟는다.
' 富는 쌓일수록 더욱 욕심이 나고 마음이 넉넉한 자가 바로 부자가 아니겠는가?
이런 교훈들을 자식에게 물려주신 곧, 부모님께서 원하시던 '자식이 잘되는 것' 아닐까?
오랜 시간이 흘러 우리가 살던 옛 집터에 울릉군청에서 쉼터를 마련하고
정매화골 안내 표지판을 만들어 부모님의 선행을 기린다. 하는 소식을 듣는다.
쉼터를 조성 하시는 관계자 여러분 수고 많으십니다.
특히 김기백 계장님, 새로 부임하신 계장님, 문화관광과장님께 심심한 감사드립니다.
사정이 허락 하는 대로 완공을 앞둔 쉼터도 볼겸 다녀올 예정입니다.
그때 군청에 들리겠습니다.
울릉도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애써 주시길 바랍니다.
- 위 글은 당시 정매화골에서 매점을 운영하시던 이호영씨의 아드님이
울릉군청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 임을 밝힙니다. / 이용학 |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