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17 - 이즈하라항으로 가는 길에 조선통신사 행열을 그린 유리판을 구경하다!
어제 2024년 1월 26일 대마도(對馬 쓰시마) 히타카쓰(比田勝)에서 렌터카로 에보시타케 전망대와
만제키 운하에 가네다성터를 보고 이즈하라(嚴原 엄원) 에 도착해 지온(祈園) 호텔에 체크인후
가네이시성(金石城)을 구경하고는 슈젠지(修善寺 수선사) 절을 찾아 최익현 선생 순국비를 봅니다.
걸어서 이즈하라의 술집 거리에 도착하는데 여긴 스무곳 가량의 식당과 이자카야들이 밀집해 있는
동네라 이곳 저곳을 구경하면서 집을 골라 "롯가쿠도" 라는 집에 들어가니 100가지가
넘게 적힌 메뉴판은 일본어와 한국어로 되어있고 한국식 요리도 많으며, 두 번째 찾은
집은 한글메뉴판도 없고 인테리어나 음식도 순전히 일본식으로 우나기돈(ウナギ丼)을 먹었습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지온(祈園)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1층은 카페이고 3층은 레스토랑
으로 주로 한국인 단체를 받으며 5층은 민슈쿠인데.... 아직 옛날 경기를 회복하지
못한 듯 2층과 4층은 비어있고 1층 카페도 밤에 잠시 문을 열었다가 곧 닫는 것 같습니다.
다음날인 2024년 1월 27일 아침에 3층 레스토랑으로 내려오니 엄청 큰 홀에 다다미가
깔렸고 상들이 3열로 수십개가 놓여있는데.... 아침은 전통 일본 가정식 입니다.
미소시루에 연두부와 삶은 달걀에 짠지 그리고 일품은 콩을 발효시킨 “낫토”인데 전에는 먹을 엄두를 내지도
못했지만 오늘은 용기를 내어 절반 정도는 먹는데.... 육고기는 원래 없으며 생선이나 김도 보기 힘듭니다.
그러고는 아직 출발시간이 남은지라 혼자 호텔을 나오며 망설이는게 시간이 충분치는 않으니 부두로
갈까 아니면 반대방향인 시내를 북쪽으로 걸어 하치만구신사와 나카무라 지구의 고려문을 볼까
망설이는데 하치만구신사는 고즈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라고 하며 하치만신을 모신 신사라고 합니다.
그 옆에 나카무라(中村) 지구는 무로마치시대에 아비루씨에 이어 대마도를 지배하게
된 소씨가문에서 10대 사다쿠니는 도읍을 숙섬의 미네에서 여기
남섬 이즈하라로 옮겨와 1468년에 큰 저택을 지었다고 하며 고려문도 서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지라 부두를 보기로 하고 운하(강)를 따라 5분여를
걸어서 항구로 가는데.... 옛날 세종 1년에 상왕 태종이 보낸 이종무의 2만 군대는 이
항구로 침공해 수백척 배를 불사르고 천여호에 가까운 민가에 불을 지른 일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흔적이야 당연히 찾아볼수가 없지만.... 뜻 밖에도 이즈하라 대교 못미쳐 운하의
철책에는 유리판에 통신사 행열도 그림이 수십장이 새겨져 있어 구경할만 한데..... 8월의 첫번째
토, 일요일에는 이즈하라 아리랑 축제가 열려 조선 통신사 행렬 재현 등의 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 란 조선 후기에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을 말하니 '통신'은 '국왕의 뜻을 전함'
이라는 의미로, 1607년 이후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사절단만 가리키나 조선 전기에 일본에 파견
된 사절도 포함시키기도 하며, 실록에는 태종 대 부터 '통신사' 가 일본에 파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한 '일본국왕사' 의 일본과 맞추기 위해 후대에 '조선 통신사(朝鮮
通信使)' 라고 부르고 있을 뿐 정확한 당대의 공식 명칭은 그냥 通信使(통신사)
로... 조선시대에 '조선 통신사' 라는 호칭을 조선측이 스스로 쓴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규칙을 정하지 않고 몇번 오갔고 오닌의 난 이후에는
일본이 전란에 빠지며 중앙 정부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제
성왕의 후손이라는 오우치 등 지방(야마구치) 다이묘가 따로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교류하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절단이 일본 각지로 70번 가량 방문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10년도 안된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및 임진왜란 과는 상관없다는 언급을 하며 먼저 국교 재개를 수차례 요구한
끝에 조선 조정이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하면서...... 포로 교환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3회에 걸쳐 사명당을 비롯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라는 사절을 파견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나는 관동에 있었기 때문에 임진년 일에 대해서 미리 알지 못했고
히데요시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진실로 조선과 나와는 원한이 없고, 화친하기를
바란다”고 수교를 요청 하니 조선은 왜관을 재설치 하고 1607년을 시작으로 쇄환사를
보내 포로를 일부 데려왔으며 1636년 부터 500명에 가까운 통신사 일행이 12회 파견 됩니다.
조선에서는 원수인 일본과 화해하는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계속 사이 나쁘게 지내면 언젠가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고, 또 후금(여진족의 청나라) 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니 후방에 있는 일본과 좋게 지낼겸 임진왜란의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세력을 멸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입장에서는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 승리로 새로 집권하긴 했지만 1615년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
는 도요토미씨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한 상태라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던데다가, 그는 조선을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조선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게 이득이었습니다.
그후 에도 막부 시기인 1811년 까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tj 회답겸쇄환사가 3번,
통신사가 9번 파견되었는데, 처음엔 쇼군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거나
태평성대가 오래 유지되는 것을 축하한다는 등.... 갖가지 명목으로 파견되었습니다.
회답겸쇄환사 까지 포함하여 6회째인 1655년 부터는 새로운 쇼군의 취임을 축하한다는 명목
으로 보내졌는데, 쇼군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으므로 비정기적으로
파견될 수 밖에 없었으며, 조선통신사는 한양을 출발해 육로로 동래까지 간 다음
배를 타고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에서 강을 거슬러 교토 까지 가서는 에도까지 이동했습니다.
류큐 왕국에서 보낸 류큐 사절(琉球使節)의 에도 방문을 에도노보리(江戸上り) 라 했는데, 류큐 왕국은 당시
청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사정이 궁금했던 일본인들이 관심을 가졌으니,
류큐 사절단은 하경사로 불렸는데 대등한 관계로 쇼군에게 국서를 보낼수 있던 조선과 달리 사쓰마번
군대에 항복해 일본에 예속되어 있던 류큐 국왕은 막부의 실력자인 로주에게만 국서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조선 중후기 일본어 교재인 첩해신어는 동래 왜관에서 조선 통신사 관련 준비 작업을 하는
것을 주제로 대사가 짜여 있으니..... 저자 강우성 부터가 통신사로 일본에 몇번 갔다
왔던 사람이고 실제 통신사의 세세한 부분을 그대로 작성하여 관련 연구에 참고되기도 합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낸 것 처럼 역으로 일본에서도 조선으로 사신단이 왔지만 이들은 조선 수도
한양까지 가지 않고 부산 동래부까지만 왔다 갔으니, 임진왜란의 기억으로 조선은 도쿠가와 정권도
완전히 믿지 못했는데 일본 사신단이 한양으로 가고 다시 돌아오면서 주변 지리를 익혀둘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조선 정부는 사신을 맞이하는 동래를 도호부로 높여 중요시했으니 원래는 수도
한양에서 치러야 하는 외교사신 맞이를 부득이하게 부산에서 했기 때문에 부산항
에다가 '연향대청(宴享大廳)' 이라는 큰 관청을 만들었고, 일본 측 사신은 여기서
조선 국왕을 모신 전패에 절을 해서.... 실제로 한양에서 왕을 만나는 행사를 대신했습니다.
사신단 일정이 에도(도쿄)가 끝이 아니고 닛코(日光)까지 이어지는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인 닛코 동조궁이 있었기 때문으로 4~6대 통신사가 이곳을 방문했으며,
통신사가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데 짧게는 5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걸렸으니
거리만 쳐도 왕복 4,000km 에 달하는데 다사 일정에 한여름이나 한겨울이면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한양을 떠난 통신사는 부산까지 가는 도중에 충주, 안동, 경주 등을 거치며 전별연(餞別宴) 을
받았고 격졸(格卒), 기수(旗手), 노자(奴子) 등 사행에 필요한 인원을 합류
시켰으며 부산에 도착해도 바로 출발하는게 아니라 반드시 길일(吉日)을 정해 출발하였습니다.
또한 무사히 갔다오길 바라며 부산 영가대(永嘉臺)에서 용왕에게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는데,
일본까지 타고 갈 배는 경상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이 기선 3척과 복선 3척, 총 6척을
제작했으며 삼사(三使)를 구성하는 종사, 부사, 종사관이 각각 기선 1척씩을 나눠 타고
복선 3척에는 짐을 실었으며..... 최종적으로는 날씨와 바다가 도와줘야 출항이 가능했습니다.
부산을 떠날 때는 대마도주가 보내온 배를 따라 갔는데 풍향에 따라 대마도의 좌수포(佐須浦, 사스우라) 또는
악포(鰐浦, 와니우라)에 입항하였으며 그후 바람이 잘 불어주기를 기다렸다가 대마도 해안을 시계 방향
으로 따라 돌면서 내려가 최종적으로 대마도주가 있는 부중포(府中浦, 이즈하라)에 입항해 영접을 받았습니다.
이때 조선과 막부 사이에서 대마도주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통신사가 대마도에 온 시점부터 에도로의
여정, 쇼군 알현, 그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때까지 통신사 일행과 함께 하면서 안내를
맡았으며..... 그후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으면서 이키섬, 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 내해로 진입합니다.
여기서부터 지역의 번주들의 호위를 받으며 해로를 따라 오사카의 정포(淀浦, 요도우라) 까지 가서 배를 남겨
두고 육로로 교토로 간후 에도까지의 여정을 이어나갔는데, 교토부터는 막부가 새로 만든 조선인가도
(朝鮮人街道)라는 특별한 길로 행차했으며 에도에 도착하면 아사쿠사에 있는 히가시혼간지에 머물렀습니다.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가는 항해 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엔진이나 증기 기관이 아니라 돛과
노를 썼으니 당연하지만 파도가 높거나 역풍이 부는 날에는 나아갈수 없었기 때문으로
사행록을 보면 몇날 며칠동안 같은 마을에 머무니 답답하다는 구절이 많이 보이며, 이 정도면
갈 만하지 않느냐는 통신사 측과 위험하니 내일 떠나자는 대마도 측의 언쟁도 적잖게 일어납니다.
바다를 건널 때 자칫 태풍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배가 뒤집혀 전원 몰살당할수도 있고 도중에 왜구들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로 파견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실제로 항해 도중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그럼에도 새로운 경험이 하고 싶어서 일부러 자원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통신사가 에도에 도착하면 막부는 길일을 정하여 방문 일정을 통보하는데 그때까지 숙소에 머물며
대기하였고 일정이 정해지면 통신사는 국서와 예물 리스트를 가지고 에도 성에 입성하여
각지에서 온 다이묘와 신하들이 도열한 혼마루의 연회장에 가 쇼군을 알현하고 국서를 전달합니다.
그후 쇼군은 통신사와 면담하면서 국서를 확인하고 조선에서 가져온 예물을 살펴본 다음 통신사
를 위한 연회를 열어주었으며 일정이 끝난 통신사는 쇼군의 답서를 받을 때까지
에도에서 기다리며 다이묘나 로주들과 어울리다가 답서와 조선으로 가지고 갈
예물이 나오면그간 어울렸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대마도주와 함께 귀로에 오릅니다.
그후 한양에 도착해 임금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것으로 모든 여정이 끝났는데,
보통은 이런 일정이지만 1636년의 4대 통신사는 막부의 요청으로 닛코 동조궁에
처음 방문하였고 1643년, 1655년에 파견된 5, 6대 통신사들은 참배까지 하고 돌아왔습니다.
통신사의 득실에 대해 애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원래 외교는 원교근공(遠交近攻) 이니
국경을접하고 있는 나라는 예로 부터 철천지 원수지간이라 100년 평화가 드문데
두 나라의 국력이 대등할때는 평화가 유지되다가 한 나라는 국력이 성장하고
다른 나라는 쇠퇴해 불균형이 되면 속국인양 조공을 요구하고 거부하면 침략이 일어납니다.
북방 기마민족과 중국, 중국과 베트남, 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과 미얀마, 인도와 파키스탄, 페르시아와
그리스, 페르시아와 로마, 로마와 게르만족, 스페인과 영국,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러시아,
터키와 그리스등이 그러한데.... 조선과 일본은 에도 막부가 수립된 1603년부터 운양호 침범이 발생한
1875년 까지 무려 270여년간 평화롭게 지냈으니 동서고금 5천년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