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술래놀이
조혜경
훌쩍 일상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대도시의 삶이란 물질적인 넉넉함의 겉모습에 반하여 속살은 무척 척박하다. 유리와 아스팔트, 철근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직장인의 일상 또한 목디스크 환자의 형상처럼 7도 기울어져 있다. 도시는 편리함과 화려함으로 위장했지만 묵은 세대들의 흙바람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주지 못했다.
한바탕 여름 소나기가 그친 오후. 요란한 꽹과리 소리를 내며 햇살이 그의 살빛을 뻗쳐왔다. 미친 햇살이 눈 부신 만큼, 다가올 내일에 대한 불안감으로 도시인들이 안절부절못하는 시간이다. 상쇠가 이끄는 농악대를 따라 경쾌하게 내지르는 피리 가락에 홀려 흥청거리고픈 유혹에 사로잡혔다. 덜 익은 풋사과 같은 텁텁한 먹거리에 입맛을 다시며, 이국적인 풍경에도 빠지고 싶었다. 누구나 가끔, 고즈넉한 둘레길에서 투명 인간이 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사춘기 시절 일기장 같은 오랜 배낭에,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서 길을 나섰다.
기차에 몸을 실었다. 노을이 하늘 가득 뿌려지는 바닷가로 향했다. 세 칸 꼬리를 단 기차는 성급한 나의 마음을 놀리듯 조바심 난 고속열차의 꽁무니를 따라 굴러갔다. 기차는 시골 장터 다녀온 망태기 냄새를 싣고, 작은 포구가 있는 어촌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소매 접은 유니폼을 입은 역장이, 지난밤 호우에 쓰러진 다알리아에 지지대를 세우다 기차를 맞았다. 한적한 간이역이 된 이곳에서는 서너 시간에 한 번 오는 미니버스가 묵은 사람 몇을 태웠다. 느림보는 작은 마을들을 한 시간 남짓 유람한 후, 나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곳 언덕 아래에 짐짝처럼 던져 놓을 것이다.
그냥 걷기로 했다. 그곳 언덕을 향한 두어 시간의 뜨거운 행진이시작되었다. 바람이 따가운 햇볕을 끌어오고, 하얀 윤슬이 냉방병에 시달린 육신을 핥았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논두렁을 쓰다듬는 시샘에, 흰 해오라기 날갯짓이 해송 숲을 홀렸다. 이마에 땀이 흘러 눈이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절뚝이는 통증으로 아려올 때가 되면 멀리 언덕에 쪼그려 앉은 오두막이 신기루처럼 아물거렸다. 집 마당의 팔뚝만 한 옥잠화는 쏟아지는 햇볕에 백기를 들고 담장 너머 너른 들녘을 바라보고 서 있다. 찔레꽃 하얀 향기가 콧등을 간질이고, 늦장꾸러기 수국이 달처럼 동그란 꽃송이를 둥실 올렸다.
북쪽 하늘로부터 ‘쌔액’ 거리며 비행기가 날아왔다. 뻣뻣한 목을 젖혀 소리의 흔적을 찾는다. 새털구름 때문인지, 강렬한 햇빛 때문인지 보이지 않는다. 비행기를 탄 여행객들도 복잡한 도시의 거친 호흡에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호젓한 언덕을 혼자 소유하는 욕심을 부렸을 테지. ‘물영아리 습지 오름에서 숨바꼭질하는 고라니들이 보고파서 비행기를 탔을까? 에메랄드빛 바다에 저린 발목을 적시고 싶어서일까? 혹시, 친구가 기다리는 바람 부는 언덕을 향하고 있을까?’ 어쩌면 병상의 환우가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을 소원하였는지도 모르지.’
20여 년 만에 고향의 노모를 찾아가고 있을까. 2년 전 나는, 도시인의 자만에 한껏 가슴 내밀며 비행기를 탔었다. 돌아오지 못한 여행을 떠난 미소 포근한 노모의 사진 하나 덩그러니 가슴에 품었다. 세월의 무상함이 박힌 사진 속 여인은 얼굴 가득 애달픔의 유언을 그려 놓았었다. 눈가 짓무른 그의 노모는 아직도 자식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 이후, 시도 때도 없이 하늘에 뜬 비행기 뒤꽁무니 쫓는 일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특히 바닷가 언덕에 서면 비행기 흰 꼬리가 반짝이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저마다 사연을 안고 비행기가 날고, 그들의 이야기를 더듬는 것은 또 하나의 떨림이다. 그래서 비행기 지나는 소리는 작은 설렘이다. 쿵쾅거리는 북소리이다. 그래서 그곳 바닷가 언덕의 오두막집이 내 마음에 꼭 들었다.
도시의 거리는 회색빛이었다. 표정도 무채색이다. 엄숙하고 차분하다. 밀림에서 잡혀 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도시에서 척박한 삶을 이어가는 눈동자들도 붉게 충혈되어 있다.그들은 아열대로 변해가는 한여름의 과열된 아스팔트 냄새에도 아무런 자극이 없다. 먹구름이 먼지 냄새를 풀풀 풍겨오는 날이면,큼큼거리던 콧소리가 빨라졌다. 소나기 한바탕 후두둑, 지친 어깨로 기운이 처졌던 사람들은 거친 발걸음으로 도망친다. 깜깜한 부두창고에 불을 켜면, 순식간에 사방으로 도망가는 바퀴벌레 떼처럼. 거리는 텅 비어버린다. 미처 핑계가 없어 도망가지 못한 나도 ‘이때다.’며 얼른 뒷골목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럴 때 훌쩍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숨길 곳을 소원했다. 이 세상이 유채색이라고 증명해줄 곳이 한 곳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의 삶도 7월의 청포도처럼 알알이 영글어질 것 같았다.
열린 하늘길처럼 어부들을 위한 바닷길도 분주하다. 작은 부두에는 고깃배 엔진 소리가 다가왔다 멀어져가는 사랑스러운 풍경이 있다. 온종일 크고 작은 파도가 윤슬 춤을 춘다. 그들의 은빛 술래놀이를 바라보는 것을 참 신비한 일이다. 어부의 낯빛은 오랜 닻처럼 뜨거운 태양에 그을렸다. 두꺼운 밧줄에 손마디가 굵어지고 굳은살도 박였다. 삶이란 것이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어서, 살다 보니 어깨가 늘어지고 허리도 굽었다.
흐린 시선을 멀리 밀어낸다. 모래 해안에는 갈매기 무리가 서쪽 해를 향해 해바라기 하다가 밀물에 밀려온 조개를 쪼아 먹었다. 종종거리며 물결을 쫓는 새들의 발짓이 앙증맞다. 비상하는 날개에 반사되는 뿌연 햇살도 몽환적이다. 바닷가 그 풍경처럼 인생이란 서로 쫓고 쫓기는 희로애락의 술래놀이인가보다. 갈매기 부리처럼 사람들도 서로의 삶을 쪼느라 종종거렸다. 삶이란, 나름대로 발자국을 남기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파도에 씻겨 흔적조차 사라지는 바닷가 풍경이다.
거친 한낮을 달려온 해가 주홍 구름을 만들고, 물결마저 붉게 찰랑였다. 둥근 달이 동쪽 하늘에 고개를 내밀기 전, 서서히 다가오는 진보랏빛 밤하늘을 맞이하는 것도 가슴 떨리는 일이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행기가 보드라운 소리를 내며 불빛을 반짝이며 날아갔다. 아스라이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의 시선이 깜박이는 불빛을 쫓는다. 보드라운 모래가 맨발을 간질이는 해안사구, 해당화 향기 가득한 언덕에 편한 마음으로 걸터앉았다. 칠흑의 어둠 사이로 게딱지 같은 집 몇 채가 올망졸망 어깨를 견주는 모습이 경이롭다. 빨간불 켜진 창가엔 도란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너른 바다를 한껏 품은 보름달이 조용한 밤 술래놀이를 시작한다. 두 손으로 눈두덩을 지그시 누른다. 모니터 화면에 찌든 두 눈이 통증으로 따끔거린다. 작은 부두가 있는 어촌 풍경은 흙빛 팔뚝에 불거진 핏줄처럼 꿈틀거리는 삶이 있다. 그물을 끌어 올리는 우직한 낭만은 핏대가 솟는 거친 삶을 전제하지만, 가끔 입가의 미소를 던져주는 갈매기 떼가 있다. 희망을 건네주는 밝은 태양이 있고, 별빛 와글거리는 즐거움이 있어 참 고마운 일이다. 설렘으로 가득한 오늘, 바닷가의 그들 또한 내 인생에 엮였다.
첫댓글 어휘력이 섬세한 묘사와 사색을 가능하게 함을 깨우치는 글입니다. 도회지에 가렸던 부분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아하, 은빛이 어딘지 알겠다. 멋진 술래놀이, 낭만과 여유로 다가옵니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