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선(화가)·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자유와 파격의 화가 김점선과 의지와 용기의 학자 장영희의 만남은 그 자체로 강렬한 메시지를 갖습니다. 나이와 분야를 초월한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어찌 보면 이미 정해진 운명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대담 당일, 김점선 님은 그간 앓던 오십견이 문득 나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기쁜 소식을 어린애처럼 환한 얼굴로 장영희 님께 전해 주었습니다. 사진 _ 한영희
어느 날, 피아니스트 신수정 님이 김점선 선생님과 저, 두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겉으로는 한 끼 저녁을 대접한다 하셨지만 속으로는 김 선생님과 저를 만나게 해주려는 생각이 있으셨겠지요. 그것이 몇 년 전 일이고, 지금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벗이 되어 있습니다.
장영희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번역가, 수필가, 칼럼니스트.‘한국문학번역상’(1981), ‘올해의 문장상’(2002) 수상. 최근 저작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김점선 님께 드리면서. 예쁜 그림은 장영희 교수가 직접 그렸다.
선생님의 삶의 방식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 말씀부터 듣고 싶네요. <나는 무슨 씨앗일까>1라고, 샘터에서 얼마 전에 나온 책 있지요? 내가 필자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굶어도 딴 짓 안 하고 그림 그렸다는 것, 까닭은 그 하나밖에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은 쌀이 떨어지면 예술을 떠나는데, 나는 버텼다는 거. 왜 철로에 누워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않고 오래 버티는 뱃심 내기 있잖아. 치킨 게임이라고 하나? 바로 그거야.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건 무슨 천재적인 색채 감각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인생에 대한 오기야. 예술가를 말할 때 흔히 섬세한 감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떠올리지. 그런데 거기에 더 필요한 게 있어. 기차가 다가올 때 맞서는 담력, 목에 칼이 들어와 봐라, 내가 바꾸나 하는. 이게 제일 중요하다는 거지.
김점선 그가 생각하는 화가는 그림 그리는 육체노동자다. 그래서 1983년 첫 전시회 이후 매년 개인전을 거른 적이 없다. 그보다 앞선 1972년에는 제 8회 파리 비엔날레 한국 참가자로 선정되면서 그의 예술적 역량을 확인한 바 있다. 그 때가 홍익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이던 스물일곱 되던 해. 세상 다 참아도 허울과 멍에를 못 참는, 원시적 힘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넘치는 그는 오늘도 큰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휘휘 내닫는다. 1946년 개성 생. <나, 김점선> 1998, <10cm 예술> 2002, <나는 성인용이야> 2003
미국의 심리학자 A.H 마슬로(Maslow) 박사는 인간의 욕구는 낮은 차원에서 점차 높은 차원으로 상승한다고 했습니다. 즉,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예술적 욕구도 뒤따른다는 것인데요……. 그래, 그건 마티스도 그랬어. ‘예술은 안락의자에 앉은 자들의 것’이라고 했지. 그럼 나는 잘못됐네! 그러나 어쨌거나, 요즈음 미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해마다 몇 천 명씩 쏟아져 나오지. 그들이 다 작가가 될까? 그렇지 않아. 조금 튀면 다 다른 데로 빠져버려. 번듯한 직업을 선택하든지, 조건 좋은 곳으로 시집 가버려. 충족이 되어버리니 갈증이 없다고 할까? 바깥 세상에서는 잘났다고 내세우는 것이 이 판에서는 쭉정이로 솎아냄을 당하는 빌미가 된다는 게 아이러니지.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드러난 재주보다 숨어 있는 뚝심이라는 뜻이군요……. 그렇지. 상대적으로 둔하고 끈질긴 사람들만 남게 돼. 너무 예민하면 죽어. 무시도 이겨내야 하고, 운명 같아. 조물주가 작가 하나를 만들 때 일부러 굳센 의지를, 뚝심을 심어 놓지. 스무 살에 빛나지 않고 육십, 칠십에 빛나게 아주 조금씩 키워갈 수 있는 씨앗만을 집어넣지, 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는 그런 조숙하고 완성된 재능을 넣지는 않아. 그렇게 되면 타락하기 쉬워. 시들어 버린다니까.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처녀작으로 혜성처럼 나타난 작가는 후기작이 신통치 않고, 괴테 같은 작가가 만년으로 가면서 걸작을 낸 것을 보면……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품어낸다는 하우스만의 깨달음이, 지독한 짝사랑의 산물로 불후의 시를 써낸 예이츠의 고통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 주지요. 자만이기도 하고, 고통을 안 거치니까. 봄에 땅을 깊이 안 파놓은 정신에는 늘 잡초만 무성하지.
선생님의 삶을 지탱시켰던 힘은 무엇이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생명체는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려는 전 우주적인 에너지에 의해 보호 받고 있다는, 생명은 그 에너지의 발로라는 베르베르의 말 기억나? 난 이렇게 생각해. 젊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살았는데도 나중에 보면 자신이 제대로 살았던 걸, 이걸 관능(官能)의 힘이란 말로 표현하고 싶어. 그런 의미에서 남편을 만난 것도 관능이야. 예술가들은 예외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전문가야. 오해의 극치를 달려도 허용되는 게 예술가야. 나는 관심이 오로지 나 자신에게로만 쏠리는 사람인데, 만난 지 3초 만에 노숙자와 결혼을 결심했다는 게 남들에게는 충격이지만, 나 자신에게는 너무 현명했던 거요. 회사원, 관리, 순경 다 안 되고, 화가는 더 안 돼. 나보다 잘난 사람 만났다면 그 영향을 받아서 무식한 내가 변했다 할 거 아냐? 지금 봐. 아무도 내가 남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 없잖아. 있냐 그럼? 신경질나게. 바로 그거야. 자기 미래에 대한 우려와 결벽증. 명예를 완성하고 싶은. 미리 그런 우려를 차단하려니, 그저 감성적 기둥만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지. 관능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알거든. 남편은 나의 야성성을 가로막지 않았어…….
관능이라는 개념이 흥미롭네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오염된 단어가 바로 관능이에요. 흔히들 육감적인 여배우를 생각하는데, 그건 한참 뒤의 설명이고, 가장 앞선 뜻은 ‘모든 생물의 생명을 영위하는 여러 기관의 기능’을 총합하여 말하는 겁니다. 최고급 제품일수록 기계로 완성도를 측정하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의 감각으로 평가하는데, 이걸 일컬어 ‘관능 테스트’라고 하잖아요. 담배로, 술로, 마약으로 혼돈시키지 않고 생겨먹은 대로 가만히 두면 우리의 관능이 무의식 중에 최상, 최적의 선택을 한다는 거지.
그런데 저는 50년이 넘게 살면서 왜 관능이 발휘되지 않았을까요? (웃음) 아니 당신 이렇게 예쁜 옷 골라 입은 게 다 관능이요. 있겠지, 남자도 우리가 안 물어봐서 그렇지. (웃음)
그에게 휴식이란 끊임없이 쓰고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다.
작가로서 어떤 대상,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느끼시나요? 젊었을 때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라파엘 전파(Pre-Rafaelite)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진 기억이 있어요. 왕립학교 다니는 영국 귀족 젊은이들이 의기투합해서 그 ‘이즘’을 만들었는데 - 그렇게 쉬운 줄 알았다면 나도 젊었을 때 ‘이즘’ 몇 개 만들었을 텐데 - 어쨌든, 그 자들이 하는 짓이 지나가는 거지 여자를 데려다가 같이 극장 가고 연애하는 거야. 귀족 여자들은 너무 뻔하니까 도무지 끌리지 않는 거야. 이 다음에 어떤 말 하고 어떤 옷 입을지 다 아니까 재미가 없지. 그 인간들의 초상화 모델들이 그래서 또 대부분 거지야. 그런데 그것을 읽으면서 묘한 동류의식을 느꼈던 거야. 고등학교 때 심취했던 성 프란치스코2의 생애나 비트3 족의 행동양식 역시 마찬가지야. (성 프란치스코에서 ‘종교’를 빼면 비트가 되지 않나? 청빈, 봉사, 절도의 개념만 남으니.) 모든 사람이 기본으로 돌아간다는 건 소유를 다 버리고 거지가 된다는 건데, 가능할까? 인도의 요기들이나 그럴까? 재미있는 얘기. 우리 동네에 노숙자가 한 사람 있어. 전인권보다 더 전인권 같고, 김중만보다 더 김중만 같은 첨단의 레게 머리 노숙자가. 옷은 레이어드 룩(Layered look)이고, 웃음은 또 어떻겠어? 그 자유로움과 태평함이란. 세금 걱정 없고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가로막지 않는다는 거지.
그런 원초적 자유로움에 대한 희구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나는 개성 사람이에요.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일제시대 때 경찰서장이 한국사람이었던 곳은 개성밖에 없다고 했어요. 말을 안 듣고 비협조적이니까. 그렇게 반항의식이 뿌리 깊은 사람들이지요. 부산 피난 가서도 회를 안 먹고 토란국, 새우젓에 조기, 북어만 먹는 사람들이야. 우리 집은 외가, 친가 이 잡듯이 뒤져도 개성 사람 아닌 사람이 없어. 오죽했으면 내 첫 개인전 팸플릿에, 물론 마땅한 경력이 없기도 했지만, 5백 년 전부터 개성에 살아 온 지독한 개성사람이라는 사실을 내세웠을 정도이니까.
정리하자면, 잘 가꾸어진 사람과 문화와 관습을 인정하기 싫으신 거죠? 특정한 대상에 대한 애착도 그렇고…… 그렇죠. 인사이더로 들어가는 것을 무언가가 말리는 것 같아. 말했던 것처럼 남편도 그렇게 흐트러지지 않았다면 결혼 못했을 것이고. 그런데 우스갯소리이지만, 나는 이 자가 나처럼 강하고 뿌리 깊게 야성을 가진 줄 알았는데, 단지 그 안에 못 들어가서 그랬을 뿐이야. 내가 돈을 벌고 갖춰지니까 금방 달라지더라고. 나중에는 내가 외출할 때 먼지를 털어 주지 않나, 집에 없을 때 내 지저분한 옷을 가져다 버리질 않나, 나 참.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야비한 걸 좋아하는지 몰라. 내가 팝아트를 전공하기도 했지만, 싸구려도 좋고. 입버릇처럼 성냥통 껍질에 그리는 화가 되고 싶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고.
조물주가 작가 하나를 만들 때 일부러 굳센 의지를, 뚝심을 심어 놓지. 스무 살에 빛나지 않고 육십, 칠십에 빛나게 아주 조금씩 키워갈 수 있는 씨앗만을 집어넣지, 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는 그런 조숙하고 완성된 재능을 넣지는 않아. 그렇게 되면 타락하기 쉬워.
앞으로 10년 혹은 20년 후의 선생님 모습을 그려 주신다면. 나는 왜 사람이 이렇게까지 오래 살아야 되는지를 몰랐어요. 타락한 자들을 묘사하는 문학작품을 읽으면서도 왜 그런 지리멸렬한 생을 취급해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깨우쳐 준 사건이 있어. 포크너4 <음향과 분노> 중의 벤지의 장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문득 ‘언어가 무의식을 울리는 음표로 변하는 듯한’ 느낌을 얻었지. 그것은 너무도 강렬한 체험이었어. 그림도 마찬가지. 배설하듯이, 예전에는 단지 게으름이 싫어서 눈을 뜨면 그리기 시작했지. 무엇이 나올지도 모르고. 그러나 지금은 그리고 싶고, 그려야 하는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죽으려 그러나? (웃음) 미쳤어. 나는 지진아야. 그 많은 사람이 쓰고 그렸던 것의 기능과 의미를 깨닫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문학을 전공 안 해서 그래. 흐흐. 장 선생에게 숙제를 안 받고 늘 혼자 읽어서. ‘오해의 자유’를 너무나 만끽했던 거지. 오해의 자유란 말, 너무 재미있네요. 자, 이제 선생님을 움직이는 그 관능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지켜보겠다는 말씀을 끝으로 오늘 대담을 줄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글을 마치면서 _ 즐겁고 유익한 얘기를 더 많이 나누었지만, 그것을 다 기록하지는 못했습니다. 지면을 통해 선생님께 다시 감사 드립니다. 건강하세요.
1. 총주방장 박효남, 자연과학자 최재천, 컴퓨터의사 안철수, 국내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 강영우, 나무박사 서진석, 화가 김점선, 기자 김병규, 민속학자 임재해, 부지런한 농부 이영문 등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아홉 사람이 어린이들을 위해 자신의 꿈과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전해 주는 책.
2. Saint Francisco. 마태복음 10:9~12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중략>)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성자. (1182~?)
3. 1950~60년대에 걸쳐 뉴욕 및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등장한 일군의 작가·시인들. 모더니즘의 억제와 질서 지향에 반발하고 내재(內在)한 자아(自我)를 무제한으로 해방시키려고 했다.
4. William C. Faulkner(1897~1962). 대담한 실험적 수법과 깊은 인간 통찰로 현대 문학에 영향을 미친 미국 작가. 1949년 노벨문학상 수상
초대는 릴레이 형식으로 진행되는 대담입니다. 지난 호에 대담자로 선정되었던 분이 이번 호에는 샘터의 진행자 자격으로 새로운 분을 직접 추천하여 화제를 이끌고 글을 씁니다. 장영희 님은 지난 호에 초대의 인터뷰 대상자(interviewee)였고, 이번 호에는 인터뷰 시행자(interviewer)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음 호에는 김점선 님이 직접 인터뷰 대상자를 선정하여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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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저에게도 '관능적인' 아웃사이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의 삶은 항상 살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