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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序文 : 吳道一(오도일) 글을 시작하며 본문 앞에 적는 글로, 저술 목적, 경위, 주요 내용 등을 소개하는 안내 역할
*西坡集卷之十七 / 序 龍溪詩集序
찬(撰) : 鄭斗卿(정두경) 글을 짓다.
서(書) : 金宇亨(김우형) 글을 옮겨쓰다.
비석세움 연대 : 1655년 효종 6년
묘지 위치 :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삼합리 산 50-1. 광산김씨 재실(경모재) 오른쪽
한국문집총간 > 용계유고 > 龍溪遺稿附錄
龍溪遺稿附錄
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廵察使金公墓碣銘[鄭斗卿]在光海萬曆癸丑。死囚朴應𡱝誣告永昌大君。時金公止男爲司憲府執義。持平丁好寬首唱殺弟。公面折其言。好寬色沮。李爾瞻因大君欲廢母后。大司憲崔有源聞之。請公問曰。聞有此論。若之何。公曰。問事是非乎。問身利害乎。曰。非利害之問。僕不讀古史。子博極羣書。古亦有以子廢母者乎。敢問。公曰。廢母是何言也。昔穎考叔感鄭莊公。母子如初。君子稱純孝。此在春秋傳。何 必博考。廢母是何言也。有源大服公言。約爭以死。後數日。掌令鄭造挾綱目胡氏武后論示諸會。有源目公曰。此論何如。公曰。武氏以周易唐。弑君鴆母。今亦有此事耶。决不可從矣。同僚皆以爲然。造卽趍避曰。輕發重論。噫。吾其死矣。公與有源。卽陳其不可與造同。朝野皆爲公恐禍不測。光海雖昏虐。亦憚其正議。莫之罪。爾瞻等終不得售其凶計。母后得全者。公之力也。公嘉靖己未生。崇禎辛未卒。年七十三。葬于廣州梅庄里孤山乾坐之原。從先塋也。後二紀。外孫李觀夏請銘于斗卿。竊念癸丑以來。爲母后立節者多矣。然發自公始。大有 功於倫紀。此其最著者。至於光海欲毁社稷墻垣立正殿。賴公言遂寢。八道爭相虐民助土木爲諂媚。公按嶺南。至被譴責。終不應命。東萊府使尹𥥈恃勢貪縱卽黜。李相國德馨。坐救大君削職。及卒命復。兩司請收。公爲司諫不從。反爲所擊。此皆可傳於後者。公可謂特立君子。臨大節不可奪者矣。公字子定。號龍溪。光山人。新羅王子興光。知國將亂。隱于光州之西。一洞世出三公。故洞號曰平章。公其後也。曾祖諱磶。禮曹正郞。祖諱世愚。成均典籍。考諱彪。永同縣監。妣監察順天金自渭女也。公再從父三嘉縣監諱讓無子。以公後。公天才絶倫。七歲以能詩聞。辛卯。中司馬。是歲登第。左差成均館。黨比故。癸巳。詣行在所。改差承文院。甞爲正言入侍。上方講易。講官吳允謙。因經旨有陳。上不答。問音釋。公奏曰。人君經學。本在旨義。音釋末也。下陳其本。上問其末。决非開筵講論之義也。且諫全尙淵默。大司憲黃愼曰。此眞諫官之言。甞爲判决事。人畏內需司。明知有投托。遷延不决訟。公至立斷。公於得失淡如。序公履歷。內爲承文正字,翰林,知製敎,修撰,校理,應敎,正言,司諫,持平,掌令,執義,弼善,輔德,承旨,禮兵刑參議。外爲黃州判官,京畿,平安,全羅,江原都事,慶尙監司,南陽,順天, 尙州,淸風守宰。皆其倘來。甞在翰苑。上命視海州版役。時戊申柄臣。方按道主其事。事多虗張。公據實上聞不少貸。大被其怨恨。厥後累遭擯斥。盖祟於此。及爾瞻執政。以公甞與戊申人隙。屢委造公。又遣其黨探公意。公漠然不應。其正直外名利如此。癸亥反正。昏朝除外任。一切皆罷。特命公仍按嶺南。公卒。上遣禮官致祭。公夫人海州吳氏。監察景閔女。後夫人。參奉慶州金好說女。吳氏生一女。適牧使李梣。生三男三女。男曰觀夏縣監。次泰夏。次鼎夏生員。女尹趾美縣監。李松齡庶尹。洪葳校理。觀夏生三男二女。曰善源。次善淵進士。餘 幼。泰夏生三男二女。鼎夏生二男一女。皆幼。金氏生一女。適縣監柳時亮。生三男六女。男曰松齊,桂齊,檜齊。女縣監宋搏,綾州守侃,成虎烈,李世華。餘幼。公無子。以仲兄尙衣院判官季男子潷後。潷生二男二女。男曰宇仁敎官。次宇俊。女兪勗曾,李百行。宇仁生二男。曰萬翼進士。次萬成。宇俊生一男萬朋。公天性至孝。內外憂皆廬墓。兄弟五人每同處。有作輒相唱和。公文章富博淸健。所著詩文及小史,小說,內學,左史節要等書傳于世。公家貧無立碑具。公女牧使內室泣曰。吾父行績。其可不傳。遂經營堅石。孝可尙也。銘曰。歲在癸丑天降割。羣小得志恣妖孽。倫紀賴公扶一脉。虎尾之履幸不咥。涇水不能使渭濁。不磨于磷不緇涅。廣陵孤山城欝欝。刻之于石表公室。
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鄭斗卿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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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 시기 계축옥사(1613년) 당시, 이이첨 등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려 하자 용계(龍溪) 김지남(金止男) 선생이 이에 당당히 맞서 정의를 지켰던 일화를 기록한 묘갈명(무덤 앞 비석에 새긴 글)이다.
龍溪遺稿附錄
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廵察使金公墓碣銘[鄭斗卿]在光海萬曆癸丑。死囚朴應𡱝誣告永昌大君。時金公止男爲司憲府執義。持平丁好寬首唱殺弟。公面折其言。好寬色沮。李爾瞻因大君欲廢母后。大司憲崔有源聞之。請公問曰。聞有此論。若之何。公曰。問事是非乎。問身利害乎。曰。非利害之問。僕不讀古史。子博極羣書。古亦有以子廢母者乎。敢問。公曰。廢母是何言也。昔穎考叔感鄭莊公。母子如初。君子稱純孝。此在春秋傳。何 必博考。
광해군 때인 만력 계축년(1613년, 계축옥사), 사형수 박응서(朴應犀)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무고하였다.
이때 김公 지남(金止男)은 사헌부 집의(執義)로 있었고, 지평(持平) 정호관(丁好寬)이 앞장서서 (왕의) 아우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김지남)이 면전에서 그의 말을 꺾어버리니, 정호관은 안색이 변하며 기가 꺾였다.
이이첨(李爾瞻)이 영창대군의 일로 인해 어머니(인목대비)를 폐위하려 하자,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이를 듣고 공에게 찾아와 묻기를, "이러한 논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를 어찌해야 하겠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일의 옳고 그름을 물으시는 것입니까? 내 몸의 이롭고 해로움을 물으시는 것입니까?" 하니,
(최유원이) 말하기를, "이해관계를 묻는 것이 아니오. 나는 옛 역사를 읽지 못했고 그대는 여러 책을 널리 통달했으니, 옛날에도 자식이 어머니를 폐위한 적이 있었소? 감히 묻소." 하였다.
공이 대답했다. "어머니를 폐위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옛날 영고숙(穎考叔)이 정장공(鄭莊公)을 감동시켜 어머니와 아들이 예전처럼 지내게 하니, 군자가 그를 일컬어 '순수한 효도(純孝)'라 했습니다.
이는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니, 어찌 굳이 널리 고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廢母是何言也。有源大服公言。約爭以死。後數日。掌令鄭造挾綱目胡氏武后論示諸會。有源目公曰。此論何如。公曰。武氏以周易唐。弑君鴆母。今亦有此事耶。决不可從矣。同僚皆以爲然。造卽趍避曰。輕發重論。噫。吾其死矣。公與有源。卽陳其不可與造同。朝野皆爲公恐禍不測。光海雖昏虐。亦憚其正議。莫之罪。爾瞻等終不得售其凶計。母后得全者。公之力也。公嘉靖己未生。崇禎辛未卒。年七十三。
어머니를 폐위한다니 이 무슨 말입니까!' 하자,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선생의 말에 크게 감복하여 함께 죽음으로써 다투기로 약속했다.
며칠 후, 장령(掌令) 정조(鄭造)가 《자치통감강목》에 실린 호씨(胡氏)의 '무후론(측천무후 비판론)'을 끼고 와서 여러 사람의 모임에서 보여주었다.
최유원이 선생을 눈짓하며 '이 논의는 어떠한가?' 하고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무씨(측천무후)는 주(周)나라로 당(唐)나라를 바꾸고 임금을 죽였으며 어머니를 독살했습니다.
지금도 또한 이러한 일이 있단 말입니까?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 하니, 동료들이 모두 그렇다고 여겼다.
정조가 즉시 달아나 피하며 말하기를, '경솔하게 중대한 논의를 내뱉었으니, 아! 나는 이제 죽었구나!' 했다.
선생은 최유원과 함께 곧바로 자신들의 뜻이 정조와 같지 않음을 진술하였다.
조야(조정과 민간)가 모두 선생에게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미칠까 두려워했으나, 광해군이 비록 어둡고 포학했을지언정 또한 그 바른 의론을 두려워하여 죄를 주지 못했다.
이이첨(李爾瞻) 무리는 끝내 그 흉악한 계책을 이루지 못했으니, 모후(인목대비)가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힘 덕분이었다.
선생은 가정 기미년(명종 14년, 1559년)에 태어나 숭정 신미년(인조 9년, 1631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73세였다."
葬于廣州梅庄里孤山乾坐之原。從先塋也。後二紀。外孫李觀夏請銘于斗卿。竊念癸丑以來。爲母后立節者多矣。然發自公始。大有 功於倫紀。此其最著者。至於光海欲毁社稷墻垣立正殿。賴公言遂寢。八道爭相虐民助土木爲諂媚。公按嶺南。至被譴責。終不應命。東萊府使尹𥥈恃勢貪縱卽黜。李相國德馨。坐救大君削職。及卒命復。兩司請收。公爲司諫不從。反爲所擊。此皆可傳於後者。
광주(廣州) 매장리(梅庄里) 고산(孤山) 건좌(乾坐, 건방을 등지고 손방을 향한 자리)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24년(後二紀) 뒤에 외손자 이관하(李觀夏)가 두경(斗卿)에게 비명을 청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계축년(1613년, 계축옥사) 이래로 어머니(인목대비)를 폐위하려는 논의에 맞서 어머니로서의 절개를 세운 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는 공(김지남)으로부터 처음 시작되었으니, 인륜과 기강(倫紀)에 큰 공이 있으며 이것이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광해군이 사직(社稷)의 담장을 무너뜨리고 정전(正殿)을 세우려 하였으나, 공의 말 덕분에 마침내 중지되었다.
팔도(八道)가 다투어 백성을 학대하며 토목 공사를 도와 권력자에게 아첨을 떨었으나, 공은 영남(嶺南)을 관할(경상도관찰사)할 때 조정의 견책을 받기까지 하면서도 끝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동래부사(東萊府使) 윤인(尹𥥈)이 권세를 믿고 탐욕스럽고 방자하게 굴자 즉시 내쫓았다.
이 상국(相國,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영창대군을 구하려다 삭직(削職)되었는데, 그가 죽자 관작을 복구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에 양사(司憲府·司諫院)에서 그 명령을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사간(司諫)으로서 이에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대간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 모든 일들은 후세에 전할 만한 것들이다.
公可謂特立君子。臨大節不可奪者矣。公字子定。號龍溪。光山人。新羅王子興光。知國將亂。隱于光州之西。一洞世出三公。故洞號曰平章。公其後也。曾祖諱磶。禮曹正郞。祖諱世愚。成均典籍。
"공(公)은 참으로 남달리 뛰어난 군자이며, 중대한 절개에 임하여서는 그 지조를 빼앗을 수 없는 분이라 일컬을 만하다.
공의 자(字)는 자정(子定)이고, 호(號)는 용계(龍溪)이며, 광산(光山) 사람이다.
신라의 왕자인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의 서쪽(현 전남 담양 평장동)에 은거하였다.
한 마을에서 대를 이어 정승(三公)이 세 명이나 나왔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평장(平章)'이라 불렀는데, 공이 바로 그 후손이다.
증조부의 이름(諱)은 석(磶)이니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고, 조부의 이름은 세우(世愚)이니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고,
考諱彪。永同縣監。妣監察順天金自渭女也。公再從父三嘉縣監諱讓無子。以公後。公天才絶倫。七歲以能詩聞。
아버지는 표(彪)이니 영동현감(永同縣監)이며,
어머니는 감찰(監察)을 지낸 순천 김씨(順天金氏) 김자위(金自渭)의 딸이다.
공(公)의 재종부(再從父, 6촌 아버지)인 삼가현감(三嘉縣監) 양(讓)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공을 후사(後嗣, 양자)로 삼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났으며, 일곱 살에 시(詩)를 잘 지어 소문이 났다."
辛卯。中司馬。是歲登第。左差成均館。黨比故。
신묘(159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館(학유/박사 등)에 보임하려 하였으나, 당파를 지어 견제하는 연고 때문에 (임명이) 어긋났다.
癸巳。詣行在所。改差承文院。甞爲正言入侍。上方講易。講官吳允謙。因經旨有陳。上不答。問音釋。公奏曰。人君經學。本在旨義。音釋末也。下陳其本。上問其末。决非開筵講論之義也。且諫全尙淵默。
계사년(1593년, 임진왜란 중)에 임금의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가 승문원(承文院)의 관직으로 개차(改差)되었다.
일찍이 정언(正言, 사간원의 정6품 간관)이 되어 임금을 입시(入侍)하였는데, 마침 임금(선조)이 위에서 《주역(易)》을 강론하고 있었다.
강관(講官)인 오윤겸(吳允謙)이 경전의 뜻(經旨)으로 인해 아뢰는 바가 있었으나, 임금은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글자의 음과 해석(音釋)에 대해서만 물었다.
이에 공(김지남)이 아뢰기를,"임금의 경학(經學)은 본래 그 근본이 의리(旨義, 깊은 뜻)에 있는 것이요, 음과 해석(音釋)은 말단(末也)일 뿐입니다.
아랫사람은 그 근본을 진술하는데 위에서는 그 말단을 물으시니, 이는 결코 경연을 열어 학문을 강론하는 본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임금의 태도에 대해) 진언하니, 임금이 깊이 침묵하였다.
大司憲黃愼曰: “此眞諫官之言。” 上然之。
대사헌 황신이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진짜 간관(옳은 말을 하는 관리)의 말입니다" 하니, 임금께서도 그렇다고 여기셨다.
甞爲判决事, 人畏內需司, 明知有投托, 遷延不决訟, 公至立斷。(공이) 일찍이 판결사(한성부의 재판 담당 관직)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내수사(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를 두려워하여, (소송에) 권력자에게 의탁해 청탁한 배후가 있음을 명백히 알면서도 미루고 소송을 판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이 부임하자마자 즉시 판결을 내렸다.
公於得失淡如。
공은 개인의 이익과 손해(얻고 잃음)에 대해서는 담담하기가 물과 같았다.
序公履歷。內爲承文正字,翰林,知製敎,修撰,校理,應敎,正言,司諫,持平,掌令,執義,弼善,輔德,承旨,禮兵刑參議。外爲黃州判官,京畿,平安,全羅,江原都事,慶尙監司,南陽,順天, 尙州,淸風守宰。皆其倘來。甞在翰苑。
"공(公)의 이력을 차례로 기록한다.
조정 내부(내직)에서는 승문원 정자, 한림, 지제교, 수찬, 교리, 응교, 정언, 사간, 지평, 장령, 집의, 필선, 보덕, 승지, 예조·병조·형조 참의를 지냈다.
조정 외부(외직)에서는 황주 판관, 경기도·평안도·전라도·강원도 도사, 경상도 관찰사(감사), 그리고 남양, 순천, 상주, 청풍의 수령을 지냈다.
이 모든 관직은 그저 어쩌다 우연히 찾아온 것(倘來)일 뿐이었다. 그는 일찍이 한림원에 몸담았었다."
上命視海州版役。時戊申柄臣。方按道主其事。事多虗張。公據實上聞不少貸。大被其怨恨。厥後累遭擯斥。盖祟於此。
"임금(인조)이 바다를 건너 연안을 살펴보는 해주 지역의 부역(군역·토목공사)을 명령하였습니다.
당시 무신년(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권력을 잡았던 신하가 바야흐로 관찰사(按道)가 되어 그 일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일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허황되게 벌여놓았습니다.
공(公)은 실제 사실에 근거하여 조금도 봐주지 않고 조정에 보고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 권신에게 큰 원망과 원한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차례 배척을 받아 쫓겨났는데, 대개 여기에서 화가 비롯된 것입니다. 이이첨(爾瞻)이 집권했을 때,
及爾瞻執政。公甞與戊申人隙。屢委造公。又遣其黨探公意。公漠然不應。其正直外名利如此。癸亥反正。昏朝除外任。一切皆罷。特命公仍按嶺南。
이이첨(爾瞻)이 집권했을 때, "공(公)이 일찍이 무신년(1608년)의 권세가와 틈이 있었기 때문에, (이이첨이)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공을 찾아가게 하고 또 그 무리를 보내 공의 의중을 탐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은 덤덤하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 정직하고 명예와 이익을 도외시함이 이와 같았다.
계해반정(인조반정, 1623년)이 일어나자, 혼란한 조정(광해군 조정)에서 임명했던 외직(지방관)을 모두 파면하였으나, 공에게만은 특별히 명을 내려 그대로 영남(경상도)을 관할(경상도관찰사)하게 하였다."
公卒。上遣禮官致祭。公夫人海州吳氏。監察景閔女。
: 공(公)이 세상을 떠나자 임금(인조)께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셨다. 공의 부인은 해주 오씨(海州 吳氏)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오경민(吳景閔)의 딸이다.
公卒。上遣禮官致祭。公夫人海州吳氏。監察景閔女。後夫人。參奉慶州金好說女。吳氏生一女。適牧使李梣。生三男三女。男曰觀夏縣監。次泰夏。次鼎夏生員。女尹趾美縣監。李松齡庶尹。洪葳校理。觀夏生三男二女。曰善源。次善淵進士。餘 幼。泰夏生三男二女。鼎夏生二男一女。皆幼。金氏生一女。適縣監柳時亮。生三男六女。男曰松齊,桂齊,檜齊。女縣監宋搏,綾州守侃,成虎烈,李世華。餘幼。公無子。以仲兄尙衣院判官季男子潷後。潷生二男二女。男曰宇仁敎官。次宇俊。女兪勗曾,李百行。宇仁生二男。曰萬翼進士。次萬成。宇俊生一男萬朋。公天性至孝。內外憂皆廬墓。兄弟五人每同處。有作輒相唱和。公文章富博淸健。所著詩文及小史,小說,內學,左史節要等書傳于世。公家貧無立碑具。公女牧使內室泣曰。吾父行績。其可不傳。遂經營堅石。孝可尙也。銘曰。歲在癸丑天降割。羣小得志恣妖孽。倫紀賴公扶一脉。虎尾之履幸不咥。涇水不能使渭濁。不磨于磷不緇涅。廣陵孤山城欝欝。刻之于石表公室。
공(公)이 세상을 떠나자 임금께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셨다.
공(公)의 부인은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사헌부 감찰 오경민(吳景閔)의 딸이다.
후부인은 참봉을 지낸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호설(金好說)의 딸이다.
오씨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목사(牧使) 이침(李梣)에게 시집갔다.
이침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현감을 지낸 이관하(李觀夏), 다음은 이태하(李泰夏), 다음은 생원 이정하(李鼎夏)이다.
딸들은 현감 윤지미(尹趾美), 서윤(庶尹) 이송령(李松齡), 교리(校理) 홍위(洪葳)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관하는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선원(李善源), 다음은 진사 이선연(李善淵)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이태하는 3남 2녀를 낳았고, 이정하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김씨(후부인)도 딸 하나를 낳았는데 현감 유시량(柳時亮)에게 시집갔다.
유시량은 3남 6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유송제(柳松齊), 유계제(柳桂齊), 유회제(柳檜齊)이고, 딸들은 현감 송박(宋搏), 능주수(綾州守) 이간(李侃), 성호열(成虎烈), 이세화(李世華)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공은 아들이 없어서 둘째 형인 상의원 판관공의 셋째 아들 김필(金潷)을 후사(양자)로 삼았다.
김필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교관 김우인(金宇仁), 다음은 김우준(金宇俊)이다.
딸들은 유욱증(兪勗曾), 이백행(李百行)에게 시집갔다.
김우인은 2남을 낳았는데 진사 김만익(金萬翼)과 다음은 김만성(金萬成)이다.
김우준은 아들 김만붕(金萬朋)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상을 당했을 때 모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시묘살이).
형제 다섯 명이 매번 함께 지내며 시문을 지을 때마다 늘 서로 화답하였다.
공의 문장은 풍부하고 해박하며 맑고 굳셌다.
저서로는 시문 및 《소사(小史)》, 《소설(小說)》, 《내학(內學)》, 《좌사절요(左史節要)》 등이 세상에 전한다.
공의 집안이 가난하여 비석을 세울 도구가 없었다.
공의 딸인 목사 이침의 부인(내실)이 울며 말하기를, "우리 아버님의 행적을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단단한 돌을 마련하여 일을 주선하니, 그 효성이 가히 기릴 만하다.
명(銘)에 다음과 같이 새긴다.
계축년(1613년, 광해군 5년 또는 계축옥사 시기)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니,
소인배들이 뜻을 얻어 요사스러운 짓을 제멋대로 부렸네.
인륜과 기강이 공에게 의지하여 한 맥을 붙잡았으니,
호랑이 꼬리를 밟는 위험 속에서도 다행히 물리치지 않았도다.
경수(涇水)가 흐리다 한들 위수(渭水)까지 흐리게 하랴,
갈아도 얇아지지 않고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네.
광릉(廣陵) 고산(孤山)의 성곽이 울창하니,
이를 돌에 새겨 공의 집안을 표창하노라.
2. 핵심 내용 요약
인물 정보: 주인공인 공(公)은 아들이 없어 조카 김필(金潷)을 양자로 삼았으며, 두 부인에게서 각각 딸을 하나씩 두었습니다.
성품과 학문: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 부모상에 시묘살이를 했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습니다. 문장이 맑고 풍부하여 《소설》, 《좌사절요》 등 다양한 저서를 남겼습니다.
비석의 유래: 집안이 가난하여 비석을 세우지 못하자, 목사 이침에게 시집간 큰딸이 통곡하며 스스로 단단한 돌을 구해 비석 세우는 일을 주선했습니다.
시대적 배경 (銘): 계축년(광해군 시절 정치적 격변기) 소인배들이 득세하는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조와 명분(인륜)을 지켜낸 공의 숭고한 삶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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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남의 비문을 찬술한
정두경 鄭斗卿 1597년(선조 30)~1673년(현종 14)
조선후기 『동명집』을 저술한 문인. 학자.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정회(鄭晦)이며,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사헌부장령 정이주(鄭以周)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할아버지 정지승(鄭之升)과 증조부 정담(鄭䃫), 종증조부 정염(鄭염)·정작(鄭碏)은 모두 시인으로 이름이 났다.
14세 때 별시 초선(初選)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다.
1626년(인조 4) 문학으로 이름있는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그는 벼슬없는 선비로서 부름을 받아 김류(金瑬) 등과 함께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1629년 별시문과에 장원, 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북방의 호족(胡族)인 청나라가 강성하여지자 「완급론(緩急論)」을 지어 무비(武備)의 급함을 강조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강화의 양론이 분분하자, 그는 10조(條)의 소를 올려 대책을 강조하고, 또 「어적10난(禦敵十難)」이라는 글을 지어 올렸으나 조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법편(法篇)」·「징편(懲篇)」 등 2편의 풍시(諷詩)를 지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임금이 하여야 할 절실한 도리를 27편의 풍시로 지어올려 효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그 뒤 1656년(효종 7)에 「칠조소(七條疏)」와 「원이설(原理說)」을 지어 올렸다.
1669년(현종 10)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공조참판 겸 승문원제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노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판서·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동명집(東溟集)』 26권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