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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代 안드레아스 三世
1246년 4월, 아달베르트2세가 쉰아홉에 자연사하니, 장남 안드레아스가 서른아홉으로 슈바벤공을 이었다. 안드레아스3세라 한다.
세상이 그를 일러 치밀한 설계자라 하였고, 정직하고 자비로우며 공정하다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곁에서 삼십 년을 산 자들은 다른 말을 남겼으니, 이르기를 "공께서는 사람을 믿으시되, 믿은 뒤에 반드시 뒤를 보셨다" 하였다.
두 달 뒤 어머니 게르힐드 보존이 죽었다. 아버지가 브라반트공을 쳐서 그녀의 머리에 얹어준 프로방스 공작관이 이제 아들에게로 내려왔다. 슈바벤과 프로방스, 두 개의 공작관을 한 머리에 이었으니, 즉위 석 달 만이었다.
울름백 란돌프를 대장군으로 세우던 날, 뜰에 섰던 늙은 종사가 말하였다.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공작관 둘을 한 머리에 이으셨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 둘을 갈라 가지려는 자들뿐이올시다."
안드레아스가 웃으며 말하였다.
"가르려는 자가 있거든 이름을 적어 오라."
종사가 대답하였다.
"적으라시면 적으오리다. 다만 종이가 모자랄까 두렵나이다."
이후 삼십 년 동안 슈바벤에서 발각된 찬탈 음모가 넷이요, 반란이 셋이었다.
1247년 12월, 슈바벤백 헤르만 폰 호엔촐레른의 공작위 찬탈 음모가 드러났다. 이듬해 정월 체포에 실패하자 헤르만이 군사를 일으켰다. 전쟁은 삼 년을 끌었다.
1251년 정월, 헤르만이 붙잡히고 슈바벤 백작령이 회수되었다. 헤르만의 인장을 궤에 넣어 봉하던 그달, 공은 침소의 문을 밤마다 두 번 잠그기 시작하였다. 사관은 이 해에 공이 편집증을 얻었다고 적었다.
1249년 4월, 브네생백 프리드리히 드'오랑게가 프로방스 공작위를 노린 것이 발각되어 옥에 갇혔다. 드'오랑게 가문이 프로방스를 노린 것은 이때가 두 번째였다.
1250년 8월, 처 하일비파 알레라미치의 죄가 드러났다. 무슨 죄인지는 문서마다 다르다.
공이 손수 명하여 옥에 넣었다. 팔 년 뒤에 풀어주었고, 다시 다섯 해 뒤에 그녀가 죽었다. 그 사이 두 사람이 나눈 말은 한 마디도 전하지 않는다.
1252년 10월, 공이 슈바벤 백작령으로 도읍을 옮겼다. 같은 해 겨울, 서민의 딸 기셀라를 가까이 두었다.
열일곱 해 뒤인 1269년 11월, 사관은 짧게 적었다. "공이 기셀라보다 아내에게 마음을 두기 시작하다."
싸움은 밖에서도 이어졌다.
1246년 8월 프랑스왕 조프르에게 포흐꺌끼에 백작령을 명분으로 선전포고하였고, 1254년에는 도피네공을, 이어 사부아백을, 다시 브뤼게백을 쳤다.
다만 공은 빼앗은 땅을 제 머리에 얹지 않았다.
1254년 8월, 비엔나 백작령을 얻자 일족 헤트비히 에티코넨에게 주었다.
1255년 11월, 사부아 백작령을 얻자 힐데가르트 에티코넨에게 주었다.
1257년 8월, 브뤼게 백작령을 얻자 울름계의 알마리히 에티코넨에게 주었다.
전쟁이 끝날 때마다 포로를 모두 풀어주었다.
한 신하가 물었다.
"싸움은 공께서 하시고 관은 남이 씁니다. 어인 까닭이니이까."
공이 대답하였다.
"내 머리는 하나요, 에티코넨의 머리는 백이다."
1260년 2월, 서방에서 배가 왔다. 나후아의 무리가 스코틀랜드를 향하니, 세상이 이를 일몰의 침공이라 불렀다.
이듬해 12월 스코틀랜드왕 발란2세가 항복하여 그 땅을 내주고 브르타뉴로 쫓겨났다.
슈바벤에서는 이 소식을 상인의 입으로 들었다. 사관은 다만 "먼 일이다" 하고 적었다.
1264년 12월, 공이 황권 약화 파벌에 들었다. 이때 슈바벤공 하나가 홀로 동원할 수 있는 군사가 황제가 부를 수 있는 전군의 열에 넷 하고도 여섯이었다.
황제 베렌가르3세 폰 안데흐스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물었다.
"공은 짐의 신하인가, 짐의 이웃인가."
공이 사신에게 대답하였다.
"신은 폐하의 신하이옵니다. 다만 신의 봉신들이 신의 신하이온지는 신도 아직 모르나이다."
1266년 2월, 공을 죽이려는 모의가 있다는 소문이 확인되었다.
그해 7월, 공이 은신처로 몸을 감추고 장남 아달베르트에게 섭정을 맡겼다. 갇힌 것은 적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벽 안에서 한 해 반을 지냈고, 그 사이에 쾌락주의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열여섯 해 전, 슈바벤에서 문을 잠그는 손은 그의 손이었고 갇힌 자는 그의 아내였다.
그 아내가 여덟 해를 옥에서 지냈으니, 이제 그가 스스로 지낸 햇수는 그 다섯 몫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1267년 8월, 프로방스백 클로테어 드 페롤이 공작위를 노리다 발각되어 반란하였다.
11월 멘톤 들에서 프로방스백의 군사 천팔백육십일 명이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졌다.
클로테어가 사로잡혔고, 그 조부 힐데베르트가 받았던 프로방스 백작령이 삼대 만에 거두어졌다.
1268년 정월, 공이 은신처에서 나왔다. 그해 10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 12월에 돌아왔다.
돌아온 공을 두고 사관이 적기를, "공이 순례자가 되었다" 하였다.
1274년 10월, 황제 디트리히 샤테누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황권 약화 파벌에서 나왔다.
열 해 전 황제의 사신 앞에서 제 봉신이 제 신하인지도 모르겠다 하던 자가, 이제는 스스로 황제의 신하임을 문서에 적어 바친 것이다.
그의 손자는 젊어 홀로 높은 황권에 찬성하였다가 늙어 그것을 두 단계 끌어내리게 된다.
슈바벤이 제관을 대하는 태도는 대마다 뒤집혔으나, 뒤집힌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때그때 서 있던 자리였다.
이듬해 3월, 안드레아스3세가 자연사하였다. 나이 예순여덟, 재위 이십구 년이었다.
슈바벤과 프로방스, 그리고 슈타이어마르크 이하 여섯 백작령이 장남 아달베르트에게 온전히 넘어갔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十代 아달베르트 三世
1275년 3월 27일, 아달베르트가 마흔셋에 아버지를 이었다. 아달베르트3세라 한다.
매력적인 협상가요 사냥꾼이며, 용감하고 오만하고 절제하며 기만적이고 정욕이 많았다.
즉위 당시 그가 쓴 것은 이중공작관과 여섯 겹의 백작관이었다.
즉위 반년 만인 그해 9월, 아들 페르디난트가 첩보를 맡아 브네생백 베르몬트 드'오랑게가 프로방스의 소유권 문서를 위조한 것을 잡아냈다. 드'오랑게가 프로방스를 노린 것은 이로써 세 번째였다.
아달베르트가 체포를 명하였으나 베르몬트가 달아나 군사를 일으켰다.
1277년 5월 반란이 진압되고 브네생 백작령이 거두어졌다.
1276년 4월, 벗 요한이 죽었다. 아달베르트가 그 관 앞에 서서 한나절을 있다가 돌아와 사냥개를 모두 내보냈다.
이날부터 그가 성실히 살기로 하였다고 사관은 적었다.
이후 그는 다스리는 동안 성과 도시와 연병장을 쉬지 않고 지었다. 1277년 상트갈렌에 프로엔펠트 도시를 세웠고, 1291년 튀빙겐에 연병장을 세웠다. 선대의 어느 공작보다도 자주 지었다.
1282년 9월, 프랑스왕 루 드 벡상-아미앵에게 지부당 백작령의 소유권을 명분으로 선전포고하였다. 이 싸움이 여덟 해를 끌었다.
1283년 12월, 곳간이 비었다. 백작령마다 짓고 동시에 여러 전쟁을 치른 까닭에 선대와 당대의 소출을 모두 삼키고도 천오백 두캇이 넘게 모자랐다.
재무관이 아뢰었다.
"전하, 창고에 남은 것이 없나이다."
아달베르트가 물었다.
"저들의 창고에는 있는가."
재무관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후로 슈바벤군은 성을 함락할 때마다 그 창고를 헐어 군량을 삼았고, 직할군을 쉬게 하고 봉신들의 군사만 불러 썼다.
1286년 10월에 이르러 곳간이 다시 찼다.
1284년 12월, 재무관이자 그라츠 시장이던 고트하르트가 세금을 걷다가 성난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아달베르트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1284년 5월 르 피 들에서 프랑스군 육천오백 가운데 천오백만이 돌아갔고, 이듬해 6월 몽펠리에에서 그 천오백마저 없어졌다.
1288년 8월 마흐브졸에서 대세가 갈렸다. 1290년 10월, 아달베르트가 이겨 지부당 백작령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것을 제 것으로 삼지 않고 비엔나백 헤트비히 에티코넨에게 주었다. 아버지의 법을 따른 것이다.
여덟 해를 싸우고 곳간을 두 번 비우고 재무관 하나를 잃어 얻은 관이 남의 머리에 얹히는 것을 보며, 늙은 서기들이 서로 쳐다보았다 한다.
이 관들이 뒷날 에티코넨의 방계를 살찌우고, 그 방계에서 황제가 나오게 된다.
1293년 3월, 폰 안데흐스 가문의 마지막 황제 혈통이 끊겼다.
백오십 년 동안 제관을 썼던 집안이 딸들만 남기고 이름을 잇지 못하였다.
아달베르트의 아내 뤼트가르트가 그 집안의 딸이었다.
1294년 3월 6일, 뤼트가르트 폰 안데흐스가 마흔넷에 병으로 죽었다. 3월 21일, 아달베르트가 필센백 마리아 오브 야로메르와 혼약을 맺었다. 마리아는 열넷이었다. 아내가 죽은 지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열여덟 해 전 벗의 관 앞에 한나절을 서 있다가 사냥개를 모두 내보낸 사람이었다.
성실히 살겠다던 맹세는 성과 도시와 연병장에는 지켜졌으나, 그 밖의 일에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해 6월, 사관은 공이 스트레스를 얻었다고 적었다.
1296년 5월, 아달베르트가 늙어 영지를 다스리기 힘들어지자 상트갈렌 백작령을 장남 페르디난트에게 내렸다.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1297년 5월, 첩보관 마티아스가 아뢰었다. 장손 아달베르트가 제 아비 페르디난트를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늙은 공이 손자를 불러 앉히고 물었다.
"네 아비가 죽으면 무엇이 네 것이 되느냐."
손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공이 다시 물었다.
"내가 죽으면 무엇이 네 아비의 것이 되느냐."
손자가 대답하였다.
"모두이옵니다."
공이 말하였다.
"그러면 기다려라. 사람이 짧은 것이지 관이 짧은 것이 아니다."
손자가 물러났고, 모의는 그쳤다. 이 손자가 뒷날의 아달베르트4세이며, 슈바벤에 왕국을 세운 자이다.
1298년 2월 19일, 아달베르트3세가 죽었다. 재위 이십삼 년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가 평생 쓴 관들이 갈라졌다. 분할상속의 법에 따라 장남 페르디난트가 슈바벤을 받고, 차남 만프레트가 프로방스 공작령과 프로방스·포흐꺌끼에·브네생 백작령을 받고, 삼남 스테판이 슈타이어마르크를 받았다.
증조모 게르힐드가 브라반트를 쳐서 얻고, 조부 안드레아스3세가 세 번의 음모와 두 번의 반란을 눌러 지킨 프로방스가, 한 사람이 죽는 하루 만에 집을 떠났다.
十一代 페르디난트 一世
1298년 2월 19일, 페르디난트가 마흔둘에 슈바벤공을 이었다. 페르디난트1세라 한다.
사람들이 그를 환영의 그림자라 불렀으니, 시니컬하고 근면하며 정직하고 절제하고 참을성이 있었다.
사신을 마주 앉히는 자리에서 슈바벤 안에 그를 당할 자가 없었고, 그늘에서 오가는 일에도 어두운 데가 없어 남의 계략을 익기 전에 알았다.
다만 갑주를 입히면 여느 기사만도 못하였다.
그가 관을 쓴 그날, 아우 둘이 각기 관을 들고 성을 나갔다. 프로방스와 슈타이어마르크였다.
사관이 적기를, 이날 공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말로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 그를 이길 자가 없다 하였으나, 말로는 법을 이기지 못하였다.
1298년 10월, 장남 아달베르트가 대장군의 자리를 달라 청하니 들어주었다.
1299년 2월, 황제 알브레히트가 높은 황권을 주장하자 페르디난트가 홀로 이에 동의하였다. 이후로 재상을 황실에 머물게 하는 등 황제를 거스르지 않았다. 아비와 조부가 황권을 깎으려 파벌에 들었던 것과는 반대였다.
한 신하가 물었다.
"선대께서는 황권을 낮추셨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높이시나이까."
페르디난트가 대답하였다.
"낮은 황제는 내 봉신들에게도 낮다."
이 말이 뒤집히기까지 스물두 해가 걸렸다.
1299년 정월, 전장에서 식객 알베라데를 가까이 두었다. 절제한다는 이름을 가진 자였으나 이 일은 열다섯 해를 끌었고, 1314년 11월 사생아 알마리히를 낳았다.
1300년 8월, 아내 기셀라 게룰핑거가 죽었다. 9월, 브레다 여백 우르술라 폰 슐레지엔-글로가우와 다시 혼인하였다. 한 달 만이었다.
1305년 7월, 사촌 페르디난트 폰 바이마르가 카린티아·슬라보니아·모데나·마이센의 네 공작관을 묶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대모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슈바벤에 그 소식이 이르렀을 때 페르디난트는 장부를 보고 있었다. 사관이 그의 말을 하나 적었다.
"저이는 넷을 묶었고, 나는 아비의 셋을 놓쳤다."
1307년 4월, 페르디난트가 가문의 일대기를 지으라 명하였다.
그때 에티코넨의 이름을 쓰는 자 가운데 남작이 서른, 백작이 아흔일곱, 공작이 열일곱, 왕이 하나였다.
이듬해 봄, 그가 법을 고쳤다.
1308년 4월 9일, 슈바벤 공작령의 상속법을 분할상속에서 장자상속으로 바꾸었다.
이 앞까지 에티코넨은 아비가 죽을 때마다 갈라졌다.
지크프리트가 갈랐고, 안드레아스2세가 갈랐고, 그 자신이 열 해 전에 갈렸다.
이 뒤로는 갈라지지 않았다. 칼로 얻은 것은 아들 수만큼 쪼개지나, 법으로 묶은 것은 아들이 몇이든 쪼개지지 않는다. 뒷날 슈바벤에 왕국이 서고 그 왕국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이 하루에서 비롯되었다.
법을 반포하던 날, 늙은 봉신 하나가 아뢰었다.
"차남들이 원망하오리다."
페르디난트가 대답하였다.
"원망은 한 대에 그치나, 나뉜 땅은 백 대를 간다."
1311년 4월, 황제 에기놀프1세 샤테누아가 그를 제국의 재상으로 삼았다. 그해 11월, 사관은 공이 스트레스를 얻었다고 적었다.
이 무렵 제국의 사신들 사이에 말이 돌기를, 아헨에서든 로마에서든 말로 슈바벤공을 이긴 자가 없다 하였다.
그러나 같은 문서의 다른 줄을 보면, 젊어 남의 계략을 익기 전에 알아채던 그 눈은 이미 흐려져 있었다.
혀가 날카로워지는 동안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그의 아버지도 조부도 눈으로 음모를 잡아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1314년 9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결심하고 재상 기셀베르트에게 섭정을 맡겼다.
1315년 정월, 제위 계승 서열에서 처음으로 으뜸에 나란히 섰고, 1317년 4월에 홀로 으뜸이 되었다.
1320년 10월 23일과 26일, 사흘 사이에 페르디난트의 파벌이 황제 베르톨트 샤테누아를 두 번 압박하여 황권을 중간으로 내리고 다시 제한으로 내렸다.
스물두 해 전 홀로 높은 황권에 동의했던 자가, 스물두 해 뒤에 그것을 두 단계 끌어내렸다.
늙은 신하 하나가 그때 일을 기억하고 아뢰었다.
"전하께서는 낮은 황제는 봉신들에게도 낮다 하셨나이다."
페르디난트가 대답하였다.
"그때 나는 공작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인 10월 26일, 바이에른공 게오르그 게룰핑거에게 선전포고하였다.
명분은 장남 아달베르트가 어머니 기셀라에게서 물려받은 바이에른의 권리였다.
자신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아들을 위한 전쟁이었다.
1321년 1월 30일, 페르디난트1세가 죽었다. 사관은 사인을 적기를, 너무 많은 근심이라 하였다. 재위 이십삼 년이었다. 그가 일으킨 전쟁은 석 달째였다.
十二代 아달베르트 四世
1321년, 아달베르트가 마흔다섯에 아버지의 모든 관을 하나도 나누지 않고 이었다. 아달베르트4세라 한다.
노련한 저명인사요, 외향적이고 오만하고 야심적이며 질투가 많고 의심이 많고 독단적이었다.
스물네 해 전 제 아비를 죽이려 하였던 그 손자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아버지의 전쟁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1321년, 리우바르텐 들에서 만 명으로 칠천을 맞아 이천을 잃고 오천을 죽였다. 1322년 에그몬트 성을 떨어뜨렸고, 1323년 다카우 성을 떨어뜨렸다.
1323년 3월 2일, 게오르그 게룰핑거가 조약에 서명하여 바이에른 공작관을 내놓았다.
같은 달 같은 날, 아달베르트가 슈바벤과 바이에른을 기틀로 삼아 왕국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라 일컬었다.
노르트가우의 작은 성에서 게르하르트가 백작관을 쓴 지 이백오십칠 년이요, 루돌프가 슈바벤 공작관을 찬탈한 지 백칠십구 년 만이었다.
이날부터 그는 슈바벤공 아달베르트4세가 아니라 슈바벤왕 아달베르트1세로 불렸다. 넷째가 첫째가 된 것이다.
이름은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는데 숫자만 셋이 줄었다.
그러나 사관이 적기를, 왕관을 쓴 그해가 다 가기 전이라 하였다.
1323년 10월 25일, 새 왕이 프로방스공 레오폴트1세 에티코넨에게 선전포고하였다.
레오폴트는 스물하나였고, 아달베르트의 사촌이었으며, 스물다섯 해 전 분할상속으로 집을 떠난 만프레트의 아들이었다.
조부가 잃은 것을 손자가 되찾겠다는 뜻이었다.
11월, 하로트링겐공 안셀름2세 에티코넨이 프로방스 편에 섰다. 오래전에 갈라져 나간 방계였으나 같은 피의 부름에 응한 것이다.
같은 달 21일, 상부르군트공 발터 폰 뉴엔부르크가 프로방스 편에 섰다. 레오폴트의 누이의 남편이었다.
프로방스와 상부르군트와 하로트링겐이 한 줄로 서니, 세상이 이를 일러 합종이라 하였다.
1326년 5월 브리에이에서 만이천으로 구천을 이겼다.
그러나 10월 10일 엠브룬에서 발터 폰 뉴엔부르크가 산세를 타고 진을 쳐, 왕의 만이천 가운데 셋에 둘이 넘게 쓰러지고 지휘관 둘을 잃었다.
그해 12월 알본에서 왕이 사천으로 발터의 전술을 그대로 흉내 내어 육천오백 가운데 오천을 도륙하였다.
그러나 대세는 오지 않았다.
1329년 12월 28일, 왕이 봉신들의 불만과 성을 칠 군사가 없음을 인정하고 무승부로 전쟁을 끝냈다. 여섯 해였다.
1330년 7월, 사관이 적었다. "왕이 야심을 잃다."
야심을 잃은 뒤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1331년 정월, 저지바이에른백 비게리히 에티코넨이 왕의 군사가 쇠한 틈을 타 왕의 한 배 반에 달하는 파벌을 등에 지고 연장자 상속제를 요구하였다.
왕이 이를 거절하였다. 그해 9월 비게리히가 군사를 일으켰다.
1332년 정월 11일, 하로트링겐공 안셀름이 지난날의 결전을 잊고 왕을 도우러 왔다.
여섯 해 전 왕이 사로잡았다가 몸값을 받고 풀어준 그 사람이었다.
그해 2월 엘반겐에서 왕이 크게 졌다. 팔천삼백으로 팔천육백을 맞아 육천오백을 잃었다. 6월 파사우에서 칠천으로 사천을 맞았다.
중군을 맡은 시장 발터가 싸움 중에 죽자 상트갈렌백 필리베르트가 중군을 대신 이끌고, 노르트가우백 카를이 좌익으로 옮기고, 시장 에른스트가 우익을 맡아 끝내 이겼다.
8월 바깅에서 천오백 가운데 천을 도륙하였으나 노르트가우백 카를이 죽었다.
같은 달 호엔바스에서 브뤼게백 군터 에티코넨을 사로잡았다. 왕의 봉신이었던 자가 적의 장수가 되어 있었다.
1333년 11월, 왕의 아들 아달베르트가 산티아고 기사단에 몸을 던졌다. 후계가 손자 아달베르트에게로 옮겨갔다.
1336년 5월, 그 손자가 폐렴으로 죽었다. 후계가 다시 그 아우 카를만에게로 옮겨갔다.
1338년 정월 초하루, 반란이 모두 진압되고 파벌이 옥에 갇혔다. 고지바이에른백 게오르그 게룰핑거와 켐프턴백 구젤린 우도넨과 브뤼게백 군터 에티코넨의 관이 거두어졌다.
다만 반란을 일으킨 비게리히는 이미 죽어 있었고, 그 손자 마티아스는 죄를 씌울 명분이 없어 관을 그대로 두고 풀어주었다. 칠 년을 싸워 얻은 것이 그러하였다.
왕은 명분 하나로 바이에른을 빼앗아 왕관을 얻었다. 그러나 명분이 없어 제 발밑의 저지바이에른은 거두지 못하였다.
명분이란 남에게 쓸 때는 창이 되고 제 집에 쓸 때는 벽이 된다.
그리고 같은 날, 왕이 상부르군트공 발터에게 선전포고하였다.
1338년 5월 샹베리에서 상부르군트군 육천 가운데 팔백만 남겼고, 10월 에펜슈타인에서 만삼천으로 만천을 크게 이겼다.
1340년 9월 9일, 남쪽의 싸움을 지켜보던 플란데르공 마르크바르트2세 폰 글로가우가 왕에게 정복 전쟁을 선포하였다.
바이마르백과 슬라보니아공과 브란덴부르크공을 비롯한 다섯 세력이 그 편에 붙었다.
두 개의 전쟁이 슈바벤 왕국을 동서남북에서 눌렀다.
1342년 3월, 왕이 상부르군트를 꺾어 벤첼 에티코넨을 부르군트백으로 세웠다.
1342년 8월 16일, 낭시 들에서 왕의 만 명이 플란데르의 만사천을 맞았다. 칠천과 구천이 쓰러졌고, 시장 아돌프가 죽었다. 왕이 군사를 헤쳐 돌려보내라 명하였다.
1343년 6월, 왕이 슈바벤 왕국 전체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새로 한 번 치기 위함이었다.
1343년 8월 7일, 슈바벤왕 아달베르트1세 에티코넨이 자연사하였다. 나이 예순일곱, 공작으로 이 년이요 왕으로 이십 년이었다. 동원된 군사는 아직 모이는 중이었다.
아들은 기사단에 있었고 장손은 죽었으므로, 열여덟 살 난 손자 카를만이 왕관을 이었다.
논찬 — 슈바벤 수도원장의 총평
수도원장이 평하기를,
내가 이 들을 엮으며 헤아려 보니, 백구십칠 년 동안 슈바벤의 관을 쓴 네 사람이 있었다.
안드레아스3세와 아달베르트3세는 정직하고 자비롭다는 이름을 얻었고, 페르디난트1세는 절제하고 참을성 있다는 이름을 얻었으며, 아달베르트4세는 오만하고 의심 많다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가문을 왕국으로 올린 것은 이름이 좋은 자들이 아니라 법을 고친 자였다.
안드레아스3세는 삼십 년 동안 음모 넷을 잡고 반란 셋을 눌렀으며, 얻은 백작관을 모두 일족에게 나누어 얹었다.
아달베르트3세는 이십삼 년 동안 곳간을 비우면서까지 짓고 또 쳤다. 두 사람이 모은 것은 실로 컸다.
그러나 1298년 2월 19일 하루 만에 프로방스와 슈타이어마르크가 집을 떠났으니, 오십이 년의 수고가 하루의 법을 이기지 못하였다.
「전도서」에 이르기를, 사람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 뒤를 이을 자가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누가 알랴 하였으니, 솔로몬이 근심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페르디난트1세는 전쟁으로 이름난 자가 아니다. 그가 다스린 이십삼 년 동안 슈바벤의 지경은 거의 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1308년에 상속의 법을 고쳐 아들이 몇이든 땅이 갈라지지 않게 하였다.
이 하루가 없었다면 아달베르트4세는 바이에른을 얻고도 그것을 아우들과 나누었을 것이며, 나눈 조각으로는 왕국이 서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이르기를, 정의가 없는 왕국은 큰 강도의 무리와 무엇이 다르냐 하였다. 나는 여기에 덧붙이려 한다. 법이 없는 왕국은 강도의 무리만도 못하니, 강도조차 전리품을 나누는 규칙은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왕관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죽은 것은 칼에 맞아서가 아니라 근심 때문이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자가 열매를 먹지 못하는 일은 흔하다. 사도가 이르기를 하나는 심고 하나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게 하신 이는 하느님이라 하였으니, 심은 자의 이름이 곳간에 남지 않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아달베르트4세는 왕관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된 해에 잃은 것을 헤아려 보라.
그해 시월에 그는 제 사촌을 쳤고, 그 싸움에 같은 피를 가진 하로트링겐이 사촌 편에 섰다.
왕이 되기 전 그는 게룰핑거를 쳤고, 왕이 된 뒤 그는 에티코넨을 쳤다.
남을 이기는 데에는 육 년이 걸렸고 제 집안을 이기는 데에는 이십 년이 걸렸으며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잠언」에 이르기를,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하였다. 그는 성을 빼앗았으나 마음은 다스리지 못하였다.
또 한 가지 우스운 일을 적어 둔다.
안드레아스3세는 황권을 낮추는 편에 섰다가 만년에 황제에게 충성을 문서로 적어 바쳤고, 페르디난트1세는 온 제후가 반대할 때 홀로 높은 황권을 지지하였다가 만년에 그것을 두 단계 끌어내렸다.
두 사람 모두 지론을 바꾼 것이 아니라 서 있는 자리를 바꾼 것이다.
봉신일 때는 황제가 높기를 바라고, 제관에 손이 닿을 만해지자 황제가 낮기를 바랐다. 사람의 지론이란 대개 그가 선 자리의 그림자이니, 자리가 옮겨 가면 그림자도 말없이 따라 옮겨 간다.
가장 깊은 뜻은 그 뒤에 있다.
아달베르트4세가 짓밟으려 한 프로방스의 레오폴트는 끝내 지켜냈고, 그 아들 만프레트2세가 공작관을 이었으며,
그 집안에서 만프레트1세가 나와 제관을 썼다. 그가 사로잡았다가 풀어준 하로트링겐공 안셀름은 1361년에 에티코넨 가운데 처음으로 제관을 썼다.
종가는 왕에 머물렀고, 종가가 치려 했던 방계에서 황제가 나왔다.
「마태오」에 이르기를,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하였으니, 나는 이 말이 하늘의 일만을 가리키는 줄 알았으나 슈바벤의 문서 궤짝을 뒤지고서야 땅의 일도 그러함을 알았다.
또 하나 적어둔다.
안드레아스3세는 프로방스를 지키려 세 번의 음모를 잡았고, 아달베르트4세는 프로방스를 되찾으려 육 년을 싸웠다.
그런데 올해, 우리 주 천사백이십팔 년에 슈바벤왕 헤리베르트3세께서 로마 제국의 관을 받으시니, 그것은 창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할머니 헬레네에게서 상속으로 받은 것이다.
백오십 년 동안 칼로 얻지 못한 것을 혼인 문서 한 장이 가져온 것이다.
보에티우스가 옥중에서 운명의 수레바퀴를 말한 것이 헛되지 않다. 바퀴 위에 앉은 자는 자기가 바퀴를 굴린다고 믿으나, 굴러가는 것은 언제나 바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맺는다.
땅을 넓힌 자의 이름은 한 대에 크고, 법을 고친 자의 이름은 백 대에 크며, 관을 쓴 자의 이름은 관이 무거운 만큼만 크다.
슈바벤의 네 공작 가운데 가장 조용하였던 자가 가장 멀리 갔으니, 후세에 다스리는 자들은 이것을 살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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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Claude, 삽화 chatGPT
그동안 왜 안올라오나 궁금하신 분들이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컴퓨터가 뻑나는 바람에 소스가 들어있는 컴퓨터를 그동안 못써서 안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살려서 재개합니다.
이젠 말도 안 나옵니다. ai가 이렇게 쓰면 대체 사람은 어떻게 연대기를 쓰라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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