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37호
- 공식명칭 :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 지 정 일 : 1962.12.20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 수량/면적 : 1기
- 시대 : 통일신라
- 주소 : 경북 경주시 구황동 103번지
통일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2년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
황복사지(皇福寺址)
경주 어느 벌판 어느 골짝인들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가 없으랴마는 황룡사지와 국립경주박물관 동남쪽의 너른 들판을 보문들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는 신라 제26대 임금 진평왕릉과 함께 설총의 묘가 있으며 들판으로 내려서면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고 그 건너편에 국보 제37호 삼층석탑이 서 있는 황복사지가 있다. 여기서 남쪽으로 낮으막한 야산인 낭산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능지탑과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로 이어지는데 보문들판 황복사지가 있는 곳은 지역명이 구황동, 황(皇)자 들어가는 절이 9개 있었다거나 구룡(九龍) 이야기와 연관된 지명으로 보인다.
진평왕릉쪽은 제법 큰 도로변이지만 황복사지라고 믿어지는 삼층석탑이 있는 곳은 너른 들판 한가운데 농로를 따라 건너와서는 황복사지 이름을 본뜬 민박집으로 들어가듯이 접근해야 비로소 나타난다. 물론 이곳이 황복사지라는 명확한 물증은 없다고 하는데 주변에서 절이름 '황복'이 쓰여진 기와조각이 발견되거나 석물 몇개가 뒹그는 등 폐사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1930년대 일본인들에 의한 발굴조사때 밭둑에서 십이지산상 일부가 나오는 등 흥미로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1930년대 일본인에 의한 황룡사지 발굴조사 사진, 밭 아래로 소(牛)모양 십이지신 석판이 보이고 곰방대를 문 채 측량 막대를 쥔 조선인의 무표정한 모습이 대조적이다. 12지신상중 3개가 이때에 발굴 되었다고 한다.>
특히 1943년 석탑 해체수리때 발견된 명문에서 이 탑은 692년에 효소왕이 승하한 신문왕을 위하여 세웠으며, 그 효소왕도 승하하자 동생 성덕왕이 706년에 사리와 불상을 다시 넣어 아버지와 형의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나왔으니 탑의 기록은 확실해보인다.
신라시대 경주에 세워진 대부분의 사찰들이 왕실의 기복을 위하여 세워졌는데 이곳 황복사 역시 왕실의 원찰이었을것으로 보이지만 탑의 기록이 명확한데 비하여 황복사 관련 기록은 나오지 않아 분명치 않다. 다만 이곳 황복사에서 의상대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하니 의상이 출가한 653년(19세)에도 이미 황복사는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뿐만아니라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후 귀국하여 부석사를 세우고 화엄종주가 되었으니 이곳 황복사도 못지않게 위상이 높아졌을 것으로 추측 된다.
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통일신라 초기에 거대한 규모의 삼층석탑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감은사지 삼층석탑(쌍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등이 그러하다.
거탑(巨塔)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들이 삼층석탑의 완성이라는 불국사 석가탑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있어 보인다.
즉, 이층 기단위에 삼층석탑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모습이지만 9m, 13m에 이르는 고선사지, 감은사지 석탑에 비하여 약7m 규모로 줄어들었지만 불안정해보이는 거대석탑에 비하여 안정되고 다부져보이는 모습은 석가탑을 떠올리게 한다.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 뒷편 너른 들녘이 보문들이다.>
통일신라 초기 거탑들은 기단부는 물론 몸돌도 여러개의 큼직큼직한 판석들을 짜맞추는 방식이었는데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이르면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하여 만들어진다. 그전까지는 몸돌의 모서리 기둥(우주)을 별개의 돌로 세우고 그 사이를 판석으로 막아 몸돌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는데, 이제부터는 하나의 돌로 몸돌을 만들되 모서리에는 우주 모양을 돋움으로 조각함으로써 간단해지면서 더욱 미적 감각을 갖추게 된다. 또한 1층 몸돌에 비하여 2층과 3층 몸돌은 급격하게 줄어들어 상승감을 살렸다.
탑을 받치는 기단역시 하층기단은 모서리에 우주를 세우고 면석에는 3개의 탱주가 2개로 줄어들어 단순화 된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삼층석탑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돌의 크기가 작아지고 갯수도 줄여서 감은사 석탑의 경우 모두 82장의 돌을 짜맞추었는데 삼층석탑의 완성이라는 불국사 석가탑의 경우 22장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탑의 규모를 줄이면서 절제미와 안정감을 추구함은 물론 탑을 만들어 세우기가 수월해짐으로써 9세기에 이르면 탑이 무려 5배나 넘게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13m 거탑인지라 몸돌은 물론 지붕돌도 하나의 돌로 만들지 못해 여러개의 돌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설에는 이렇게 판석으로 조립하여 탑을 세우니 내부 공간에 뱀이 모여 살게되어 신성한 공간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고도 한다.>
국보 석탑에서 국보 불상 2점이 나오다.
1943년 황복사지 삼층석탑 해체수리때 2층 지붕돌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금제여래좌상 2구가 나왔는데 모두 국보급인지라 현재 국보 제79호, 제80호로 지정되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그밖에도 각종 유리구슬, 팔찌 등 많은 유물들이 함께 나왔으며 특히 사리함 뚜껑 안쪽 금판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함으로써 이 탑이 언제 누가 왜 세운 것인지 명확해져 건립의도와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었으니 국보급 석탑일 수 밖에 없어 보인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나온 국보 불상 2구, 왼쪽이 79호, 오른쪽이 80호 금제여래좌상이다.
우리나라 문화재를 수없이 가져간 일본인들인데 이때 출토된 금불상은 온전하니 다행이다.>
<신라 32대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을 위해 탑을 세웠고, 동생인 성덕왕이 형과 아버지를 위하여 불상과 사리를 탑에 봉안하여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새겨진 금판, 사리함 뚜껑 안쪽에 있었는데 이로써 석탑의 이력을 잘 알수 있으니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통일신라는 불교문화, 특히 석탑을 세우는데 있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목탑을 돌로 재현한 백제탑과는 달리 중국의 전탑과 같은 형식의 분황사 모전석탑으로 시작한 신라는 삼국을 통일후 목탑과 전탑의 특징을 두루 아우르는 석탑으로 발전하게 된다.
2층기단과 지붕돌, 우주나 탱주등의 기둥은 목탑의 흔적으로 보이며 여러층겹으로 조각된 지붕받침 등은 전탑의 흔적이다.
통일신라 초기인 8세기 신문왕대에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세워져 거대한 석탑의 위용을 자랑하더니, 효소왕에 이르러 규모가 줄어들고 단순화되는 형상의 석탑이 나타나니 바로 황복사지 삼층석탑이다. 이어 경덕왕대에 불국사가 지어지면서 석가탑이 신라 석탑의 전형이자 완성으로 완벽하게 자리잡게 되자 이후에 지어지는 석탑은 대부분이 이들을 모방하거나 추종한 석탑들로 보여진다.
그런의미에서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상륜부는 날아가고 노반만 남아있지만 세련되고 안정된 삼층석탑의 위용이 단단해보이는 황복사지 삼층석탑>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