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성역 관사에 밤비 내리다 ■
諸城驛夜雨(제성역야우)
- 저자: 鄭文忠公(정문충공):포은 정몽주(1338~1392)
- 번역: 시인, 수필가 오천인 정 용하
今夜諸城驛(금야 제성역)
오늘 밤 제성역 관사에 머무르니
胡爲思舊居(호위 사구거)
어찌하여 옛 고향집이 생각나는가.
遠遊春盡後(원유 춘진후)
오래도록 떠돌다가 봄이 끝난 후
獨臥雨來初(독와 우래초)
홀로 누웠으니 비가 내리는구나
永野田宜稻(영야 전의도)
영천 들판 논에는 벼가 화목하고
烏川 食有魚(오천 식유어)
오천 마을 음식은 물고기와 친한데
我能兼二者(아능 겸이자)
내가 두 가지를 겸할 수 있는 것은
但未賦歸歟(단미 부귀여)
부(富)가 아니라 더불어 의탁함이네.
*先生曰永州烏川皆吾鄕里也(선생왈영주오천개오향리야)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영주와 오천, 모두가 나의 고향마을이라 하셨다.
《 해설 》
(1) 제목에서 제성(諸城)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지명이며, 역(驛)의 관사(館舍)는 외교사절이나 관리들이 공적인 출타 시에 숙박하는 건물인 점을 감안할 때 포은 선생께서 중국에 사신으로 왕래하시던 중에 지은 시로 보여진다.
(2)한시란 ‘한자로 쓴 시’라는 뜻이 아니라, 중국 한(漢)나라에서 유행(통용)하던 장르(서식, 양식)의 시 라는 뜻이며, 그 요건은 (a) 평측과 압운 (b)대구구절(3,4연과 5,6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위의 시는 오언 율시(1행이 5자이며, 8행으로 구성)이며 각 행에 다섯 글자의 한자는 법칙에 의거 평성과 측성의 조합으로 짜여져 있음(모든 한자는 평성, 상성, 거성, 입성 등 4개 중에 하나에 속하며, 평성을 제외한 나머지 3개를 ‘측성’이라고 함).
*평성과 측성을 ‘조합하는 방법’에는 평기식과 측기식이 있으며, 한문 하나의 글자를 1박자로 읊으며 1행이 끝나고 2행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1/2박자로 간주하고 옛 선비들은 시를 읊었던 것이다.
*위의 시에서 압운 글자는 2연, 4연, 6연, 8연의 마지막 한자인 거(居), 초(初), 어(魚), 여(歟) 이다.
(3)3행의 원문 遠遊(원유)는 (a) 멀리 여행하다, 멀리 유람하다, 멀리 떠돌아다니다. (b)오래도록 여행하다, 오래도록 유람하다, 오래도록 떠돌아다니다 등으로 각각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擇一)
*원문 4행에서 "初" 라는 글자는 시작하다는 뜻이므로 4행을 정확히 번역하면 '홀로 누웠으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구나'이다.
*원문 8행에서 賦(부)와 歟(여) 글자는 의미상으로 보면 富와 與 글자를 사용하여야 온당함에도 앞의 한자를 사용한 이유는 평측과 압운의 법칙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賦(부)라는 글자는 '백설부(白雪賦) 적벽부' 등의 용어가 시사하듯 장문의 시 또는 현대의 시적인 수필과 유사한 장르인데 예부터 선비들은 “시(詩)는 가난하고 부(賦)는 풍성하다” 즉 시는 사용되는 언어가 적어서 가난하고, 부는 사용되는 언어가 많아 풍성하다는 뜻인바 오늘날의 한자 사전에는 賦라는 글자에 풍성하다는 뜻이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한시를 번역하는 사람은 賦=富라는 것을 감지하여야 하며, 어조사 여(歟) 역시, 한자 사전과는 달리하여 같을 여(與)와 뜻이 일맥상통함을 숙지하여야 번역함에 도움이 될 것이다.
(4)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오언이든 칠언이든 ‘율시’에서는 3연과 4연은, 그리고 5연과 6연은 각각 대구구절이다. 시를 지은 사람이 그것을 의식하고 시를 지었기 때문에 번역하는 사람 역시 반드시 그것을 감안하여 번역하여야 할 것이다.
*위의 시에서 3연과 4연의 대구 구절은 논외로 하고, 5연 永野田宜稻(영야 전의도)와 6연 烏川食有魚(오천 식유어)의 구절에서 永(영주 즉 영천)과 烏(오천), 野(교외, 들판)와 川(山과 함께 고장, 고을 또는 마을을 뜻함), 田(전답)과 食(음식), 宜(화목하다)와 有(친하다), 稻(벼, 쌀밥)와 魚(물고기, 고기반찬) 글자들이 각각 맞물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시에 사용된 한문 글자 한자 한자는 평측과 압운 법을 준수하면서 '신중하게 동원된 선수들'인바 이를 가볍게 여기고 소홀히 번역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위에서 “永”은 영주(永州) 즉 오늘날의 영천(永川)을 뜻하며, 현재의 영주(榮州)는 조선 초, 중기에 영천(榮川)이라고 불렀는데, 한자를 달리 사용했는바, 한문에서 “永” 이란 (a)영원하다, (b)길(도로)이란 뜻이 있는데 영천의 경우 ‘길’이란 뜻으로서 고려시대에는 영천이 교통의 요충지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주(州)”는 고려시대 지방행정단위 즉 주,부,군,현(州府郡縣) 중에서 최상위 단계로서 오늘날의 광역시와 보통 시(市)의 중간 정도의 도시로 보면 되는데, 고려시대 영천은 영주(永州)로서 중요한 고장이었으나 조선 초기에 태종(이방원)이 지방조직을 개편하면서 영천(永川)으로 지명을 바꿈으로써 “군(郡)”으로 격하시켰는데 그 이유는 포은 선생의 출생지요, 외가 임을 감안하여 조선 건국에 협조하지 않는 고장으로 낙인을 찍은 것이다.
영주 역시, 조선 초에는 순흥도호부였으나 세조 때 도호부사 대전공 이보흠 선생께서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자 세조는 순흥도호부를 혁파하고 영천(榮川:지금의 영주)군, 봉화현, 풍기군으로 분할하여 군수, 현감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가 그 후 세월이 흘러 서인들의 집권에 등을 돌린 숙종께서 장희빈을 왕비로 삼고, 조정에 남인들이 대거 등용되자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하고, 사육신과 대전공 이보흠 등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옛 순흥도호부를 환원시켜 준 것이다. 순흥도호부사 대전공 이보흠께서는 포은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천 대전마을 출신(포은선생 어머니가 영천 이씨임)으로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사사된 후에 조정에서는 순흥도호부를 영천(榮川)으로 지명을 바꾸면서 도호부를 군(郡)으로 격하시켜버렸으며 지금의 영천(永川)과 당시의 순흥(현재의 영주시와 영주군 순흥면)을 영천(榮川)으로 개명하여 비록 한자(漢字)로는 다르게 표현하나 묘하게도 한글 발음은 모두가 "영천"으로 한 것은 그 당시 조정에선 영주와 영천을 동전의 이면관계로 보고, 두 개의 고장을 사잡아 역모의 땅이라고 프레임을 덮어 씌워 버린 것이다. 이를 종합하여 다시 말한다면 정권에 충성하면 그 지방은 큰 고장으로 육성시켜 주고, 반역하면 하급 고장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지방행정단위의 조직을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도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하여 일부 정치인들이 00지방에 00시설을 유치하여 지방의 발전을 지원해 주고, 살기 좋은 고장이 되어 인구가 유입되는 고장을 만들어 주겠다고 공약하는 것과도 유사하며(예:노무현 전 대통령의 세종시 신설), 북한이나 중국 등 공산권 국가에서는 평양이나 북경에는 공산당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살수 있게 하고, 설령 평양에 거주하다가도 노동당에 위해 활동을 할 경우에는 지방으로 축출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5)7연과 8연의 뜻은 작가이신 포은 선생께서 고향이 영천과 오천, 두 곳인 것은 쌀밥(영천의 벼)에 고기 반찬(오천의 물고기)을 먹으며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천은 출생지(외가)요 또한 추억이 많은 곳이며, 오천(경북 영일)은 관향이기에 두 곳 모두 함께 의지(歸:의탁하다)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음.
(6)先生曰永州烏川皆吾鄕里也(선생왈영주오천개오향리야)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영주와 오천, 모두가 나의 고향마을이라 하셨다.”라는 구절은 포은 선생 문집 등 현인 22명의 문집에서 주요 문장을 선별하여 이를 한 권의 책(永洛風雅:포은의 고향인 영천과 퇴계의 고향인 上洛 즉 안동을 흐르는 시)으로 편저한 함계 정석달(1660~1720)께서 7연과 8연에 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시킨 문장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