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25장 19-23절
설교제목 : 한 뿌리에서 난 비극
그럼에도 길을 가기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겨울의 문으로 진입하는 입동을 지나면서 추위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고한 수험생들의 땀방울이 아름다운 결실을맺기를 기도합니다.
지난주에 세계적으로 큰 관심사였던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세계는 그의 정치, 경제정책이 자국우선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는 철저하게 자국민 안에 분열의 정치가 이루질 것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도자의 상을 투사하며, 개체 안에 있는 권력욕과 소유욕을 투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확고한 일방성을 가진 인물은 언뜻 보면 너무나 확실하고 명확하여 사람들에게 빛을 던지는 것 같고, 당장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더 큰 분열과 균형을 잃게 되어 나라 전체를 신경증의 위험 또는 광기에 노출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1세기 전의 1차, 2차 세계대전과 트럼프의 집권 후기,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틴 전쟁에서 너무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자국 이기주의를 통한 경제 창출이 당장은 효력을 발휘하고, 진보하는 것 같지만, 긴 안목에서 이것은 악영향과 퇴행을 부추길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서 목격하는 바입니다. 이런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복잡하고 혼란한 사건과 시간 앞에서 내가 가야할 길을 잃지 않고 똑바로 서서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상들이 간 길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맞아들이고, 이제 백 일흔 다섯 해를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죽음의 여정을 한 절로 기술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은 목숨대로 다 살고, 아주 늙은 나이에 기운이 다하여,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25:7).”
이 짧은 한 절이 아브라함의 마지막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자기가 받은 목숨대로 살았다는 것이 언뜻 평범해 보이고 쉬워 보이지만, 받은 목숨대로 살지 못하여 가는 자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날들을 채우지 못하며 사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성으로 발현된 인간의 그릇되고 경도된 삶의 태도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신이 선호하는 음식이 튀김류라서 계속 이 음식을 즐겨 먹다보면 콜레스테롤 수치가 증가하고 혈액과 신체에 나쁜 영향으로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술이나 담배로 계속 해소하려 하다 보면, 신체 장기를 손상시키고, 암에 걸릴 위험성을 증가시켜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조부모나 부모가 잘못된 식습관이나 건강하지 못한 정신적 상태는 그 자녀들에게 유전적 소인으로 작용하여 자손들이 누려야 할 목숨을 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받은 목숨대로 자신의 수를 누리며 산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경도되고 그릇된 삶이 아닌 균형과 절제의 삶을 살았음을 어느 정도는 반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주 늙은 나이에 기운이 다하여서,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그가 어떤 병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기운이 고갈되어 평안하게 생을 마감했음을 뜻합니다. 이런 평안한 죽음은 모든 나이든 자가 바라는 바입니다. 저는 종종 임종을 앞둔 이들이 경험하는 죽음의 공포나 극심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잠자듯 고요히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야말로 복 중의 복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살아생전에 누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죽는 순간에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죽음에 짧은 마지막 구절은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간 길, 모든 사람이 간 길은 죽음의 길이며, 너무도 확실하게 모든 인간이 가는 길임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삶과 죽음 사이에 낀 존재이며,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죽음으로 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유한하며, 제한된 시공간의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조상들이 간 길이라는 것은 엄연한 죽음의 현실 앞에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질문합니다. 내 앞에 놓인 엄연한 죽음을 인식할 때 우리는 시간을 허비하거나 낭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이라는 너무나 명확한 길을 우리도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귀하고 값지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임신하지 못한 여인
아브라함의 시대는 저물고 이삭이 그 대를 이어 아브라함의 유산을 상속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삭과 리브가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대를 이를 자손이 없었습니다. 리브가가 임신하지 못하던 것입니다. 이삭은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내에게 아이가 생기도록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25:21). 임신의 과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증거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새로운 미래의 씨앗은 전적으로 의식의 몫이라기보다는 무의식이 관여하는 일이며, 동시성적 현상으로 일어나는 신비임을 드러냅니다. 하나의 생명이 잉태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부모의 노력 그 이상의 초월적인 힘이 끼어든 사건임을 반증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신성한 것임을 시사합니다. 우리 삶의 잠재력과 가능성이 발아되는 미래는 신성한 힘의 개입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자아의식은 기존의 가치와 제한된 일방성으로 낯설고 새로운 것이 침투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미래는 자아의식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가 끼어들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리브가의 임신의 또다른 원인은 이삭의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는 자아의식이 한계 상황에 도달했을 때 초월적인 힘이 개입할 수 있도록 자아의식을 개방하는 일입니다. 내가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이 일 속에 침투하시길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심리적으로 기도는 자아의식의 에너지를 무의식을 향하여 주입함으로써 무의식을 활성화시킬 수 있게 하는 종교적 수행방식입니다. 무의식으로 향하는 리비도는 무의식의 내용을 활성화시키고 의식에 새로운 것을 출현시켜 변환을 꾀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수단이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현실 속에 구체화할 수 있게 합니다. 인생에 어떤 문제가 닥칠 때마다, 인생의 한계 상황에 봉착할 때, 자아의 자원이 바닥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힘을 우리 가운데 유입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탄생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 뿌리에서 난 비극
하나님은 이삭의 기도를 통하여 리브가가 임신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배가 불러왔는데 쌍둥이였고, 그 둘이 태 안에서 서로 싸웠습니다. 이렇게 태 안에서 싸우고 있었기에 어머니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아이를 임신하면 아이가 발로 찰 때 깜짝 놀라고 아픈데 쌍둥이가 서로 움직이면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리브가는 너무 힘이 들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왜 이렇게 서로 싸우는지 질문합니다.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25:23).”
이것이 쌍둥이의 비극이었습니다. 이런 에서와 야곱의 싸움은 이후에 이스라엘과 에돔의 싸움이 되었고, 지난한 역사를 통하여 해결하지 못한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성서와 에서와 야곱의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숙명 또는 치료할 수 없는 운명론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일까요? 마치 인생의 이런 갈등을 결정론, 운명론의 입장에서 진술하려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후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에서 보겠지만 둘은 화해하였지만, 그 후손은 오래된 갈등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성서는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를 다시 조명하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서로 싸우고 갈등하는 원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난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분열과 갈등은 운명이 아니라 치료되어야할 상처임을 분명히 알려주는 대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근원적 뿌리의 동질성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정신은 하나의 세계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세계는 갈등과 긴장 속에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너와 나를 편가르기 하고, 우파와 좌파로, 동서로 남북으로 분열하며 서로를 향한 미움과 증오, 혐오와 차별의 벽을 높이 쌓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뿌리에서 나온 자들임을 이해할 때, 낯선 타자를 존중하며 공존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존하면서 갈등하는 것은 엄연한 삶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갈등을 넘어 생명애로 공존을 모색하고, 서로에게 생명과 사랑과 평화를 선물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숙명적 삶의 패턴이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보듬어 아름답게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숙명적으로 갈등하는 이 세계와 우리 내면 속에서 서로를 보듬고 공존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