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죽움을 걸고 번돈은 어디로?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교수
베트남 전선에서 군인들은 좋은 아들, 좋은 남편, 좋은 아빠였다. 총 파병 군인 수를 32만명으로 계산하면 1인당 100달러가 조금 넘는 돈을 1년의 주둔 기간 동안 사용했을 뿐이다. 그만큼 현지에서 돈을 쓸 여유가 없었다. 베트남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군은 휴양지에서 콜라도 사먹지 않고 하루 종일 수영만 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돈을 쓸 수 없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의 전투수당이나 월급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이들에게 지급된 전투 수당은 매월 장군이 210~300달러, 영관급이 165~191달러, 그리고 위관급이 135~150달러였던 데 비해, 가장 많은 수가 파견되어 전선에서 직접 전투를 수행한 하사관(57~125달러: 1만4820원~3만2500원)과 사병(37.5~54달러: 9750~1만4040원)의 수당은 위관급의 2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였다. 상사쯤 되어야 국내 회사원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전투수당 외에 월급은 준장이 177달러(4만5120원), 대령이 115달러(2만9440원)였던 데 반해, 중위가 36달러(9080원), 하사가 14달러(3490원), 병장이 1.6달러(400원), 그리고 이병은 1달러(260원)였다.
그나마 베트남의 한국군이 받는 전투수당은 남베트남군이 미군으로부터 지원받는 전투수당보다도 적었다. 한국의 장군들은 더 많이 받았지만, 사병들은 더 적게 받았다. 미군과 비교하면 4분의 1 수준도 되지 않았으며, 필리핀군이나 타이군(태국군)과 비교해서도 낮은 수준이었다. 당시 필리핀이나 타이보다도 낮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과 물가를 기준으로 더 낮게 책정되었을 수도 있지만, 미군과 동일한 수준의 대우를 하겠다던 미국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70년 미국 의회의 사이밍턴위원회에서 브라운각서 체결 시 공개하지 않았던 한국군에 대한 전투수당 및 전사상자 보상금 조항이 공개되었을 때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이라는 논란이 제기되었지만, 용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액수였다. 파병 군인들이 이 정도의 전투수당과 월급을 받고서도 만약 베트남에서 돈을 썼다면 본국에 송금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수 없었다. 파병 군인과 기술자들의 저축액이 당시 한국의 가계저축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67년 76.4%를 정점으로 해서 1969년 51.8%, 1970년 45.5%에 이르렀다.
죽거나 부상을 당해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사상자는 미국 정부가 지급하는 재해보상금을 받았는데, 전사자의 경우 총 4968명에게 29억9200만원 정도가 지급되었다. 이는 1인당 평균 60만2300원(2316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부상으로 장애를 입은 경우에는 8004명에게 총 35억1300여만원이 지급되었다. 부상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부상자의 수로 나누어 보면, 1인당 평균 44만원(1690달러)이 지급되었다. 이는 전사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액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3년 정도의 소득에 지나지 않는 액수였다.
1966년의 기록을 보면 장군과 영관급의 경우 전사 및 장애 1급은 72만5760원을 받은 반면, 위관급은 51만원에서 65만원, 중사 이상의 하사관은 36만원에서 62만원을 받았다. 하사 이하 사병들에게는 34만3200원(1320달러)이 지급되었으며, 순직 및 장애도 2급에게는 22만8800원, 사망 및 장애도 3급에게는 17만1600원(650달러)이 지급되었다. 사병들이 전사했을 때 받는 금액은 당시 직장인의 1년치 월급을 조금 웃도는 액수였다.
죽음 넘나드는 베트남 전선에서 군인들은 좋은 아들·남편·아빠 1년간 1인당 100달러쯤 썼을 뿐 베트남인들 눈에 비친 한국군은 콜라도 안 사먹고 종일 수영만
파병군인과 기술자들 월급으로 국내저축 큰 폭 증가했음에도 1969년부터 부실기업 속출하고 1972년엔 8·3조치 긴급명령 죽음 무릅쓰고 번 돈 다 어디로
대위·하사·병장이 가장 많이 죽어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민간인을 죽인 뒤 겪게 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베트콩으로 잘못 알고 아군에게 총기 사고를 일으킨 군인들의 정신적 고통. 베트남의 후방에서 근무했던 군인들과는 달리 전선에 있었던 군인들이 가져온 돈은 모든 고통의 대가였다.
정부는 이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치렀는가? 한국 정부가 미국 의회의 사이밍턴위원회 청문회 자료로 제출한 자료를 보면 1969년 11월30일까지 미국으로부터 한국군 근무수당 1억2700만달러, 전사상자 보상금으로 1040만달러가 지급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합의한 수당을 고려한다면, 정부가 수당의 대부분을 제대로 지급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실제로 각각의 병사들에게 어느 정도가 지급되었는가에 대해서 밝힌 자료는 없다.
사이밍턴위원회 당시 한국 정부는 브라운각서 이후 한국에 공여된 미국의 원조 관련 자료들을 보내면서, 미국 정부에 대해 각서 중 민감한 부분(군원이관과 ‘주월한국군 장병에 대한 수당 및 전사시에 대한 보상 문제’)에 대해서는 삭제하거나 적절히 표현을 바꾸어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이 문서는 “브라운각서 공개 문제와 관련한 정부의 조치 사항 및 경위”(1970년 2월)라는 제하에 작성되었으며, 문서의 겉표지에는 ‘예고문’이라는 이름으로 “폐기하라(1970.3.5.)”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전쟁터서 번 돈으로 경제성장, 자랑할 일인가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군인들이 받은 전투수당은 1966년 3월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합의한 일당(하사 1.9달러, 병장 1.8달러, 상병 1.5달러, 일병 1.35달러, 이병 1.25달러)과 지급한 일당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그 금액이 그대로 지급되었다고 하더라도 병사들이 받은 수당의 대부분을 ‘강제’로 송금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있다. 송금수수료, 환전수수료만으로도 한국 정부는 큰 수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베트남에 파병된 다른 나라의 군인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보상을 받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귀국 후 국가유공자로 적절한 보상을 못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엽제 피해를 입은 군인들에 대한 치료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및 뉴질랜드의 참전 군인들의 경우 1984년 고엽제 제조회사로부터 1억8000만달러의 기금을 지급받았지만, 한국군의 경우는 그 대상이 되지 못했다. 1993년 한국 정부는 법률 제4547호로 고엽제 후유증환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지만,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를 제대로 판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상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베트남 참전자들의 사이트에는 “고엽제 환자 전면 재신검해야 합니다. 엉터리 고엽제 때문에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아야 할 전우들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라는 언급도 있다.
개인들에게는 충분히 보상을 하지 못했어도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전쟁 특수가 경제성장에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주장에도 함정이 있다. 베트남 파병 군인들과 기술자들의 월급으로 국내 저축이 큰 폭으로 증가했음에도, 1969년부터 부실기업이 속출하고, 1972년에 가서는 급기야 8·3 조치라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효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부실기업 사태와 8·3 조치가 기업가들의 부도덕한 운영(주로 부동산 투기와 위장사채의 운용)과 정부의 과도한 수출 추진 정책이 빚어낸 결과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위기를 막아내기에 충분한 국내 저축은 존재하지 않았던가? 군인과 기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서, 그것도 한푼 한푼 아껴서 보낸 돈은 다 어디로 갔던 것인가?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한국의 젊은이들, 그리고 그 나라 민간인들의 피를 보면서 번 돈이 과연 얼마나 떳떳한 돈이 될까? 미래의 세대들이 베트남 전쟁터에서 벌어온 돈으로 한국이 이렇게 발전했다고 한다면 자랑스러워할까? 일본이 한국전쟁 시기 전쟁특수를 통해 경제부흥을 이룩했다는 데 대해서는 온갖 비판을 다 하면서, 우리가 한 것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할 수 있는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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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향군인회등은 무슨일들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요,,,예산만 타서 그것을 가지고 또 무었들을 하시는지,, 거국적으로 대처가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