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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옥 작가는 2022년 12월 말 <중앙일보> 주말 신문인 <중앙SUNDAY(선데이)>에 여순사건을 다룬 원고를 송고했다. 한국전쟁의 흔적을 다루는 연재인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의 10번째 글이었다. 글과 사진이 편집된 PDF 파일까지 확인했지만 결국 해당 연재는 지면에 실리지 않았다. <중앙선데이> 측이 알려온 게재 불가 사유는 "민초 혹은 피해자 쪽에 무게를 더 실어서 논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중앙선데이> 측은 원고 수정을 요구하지도 않고 아예 여순 사건을 다루지 말고 다음 편으로 건너뛸 것을 주문했다. 이에 윤 작가는 "여순10.19는 현재,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사회적 합의인 여야합의에 의해 제정된 실정법에 의해 피해자 구제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며 <중앙선데이>에 연재 중단을 통보했다. 이후 윤 작가는 <오마이뉴스>에 연재를 보내왔고, 첫 편부터 이를 게재하기로 했다. 연재 시작과 더불어 <중앙선데이>가 거부한 여순 10.19 사건 원고를 공개한다. [편집자말] |
지난해 1월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여야 합의로 제정됐다. 나는 특별법 소식을 듣고는 전남 순천행 티켓을 끊었다.
나에게 순천의 첫 인상은 밥상이었다. 학창시절 배낭여행을 하는데 순천에서 밑반찬이 떨어졌다. 식당에서 백반을 주문하고는 반찬을 싹 쓸어 반찬통에 담았더니 주인장이 웃으면서 다시 한 상을 넉넉하게 차려줬다.
두 번째 순천은 30여 년이 훌쩍 지난 2013년이었다. 순천만 넓은 갯벌의 풍광에 취해 그 이후 매년 대여섯 차례 순천만에 머물렀다. 내게는 제2의 홈그라운드가 됐다. 세 번째 순천은 낯설었다. 한국전쟁과 여순 특별법을 상기하며 순천시가 설치한 열네 개의 여순10.19 표지들을 하나씩 찾아봤다. 그날 저녁 답사일기는 이랬다.
산골마을신전은굶주린빨치산심부름소년문홍주를잠시돌봐준것을구실삼아총을난사하여 모두22명이희생되었는데4세이하어린이가3명이나되었다.구상마을에서는국군이반군으로주민을속여밥을요구하고이를받아들인주민150여명을학살했다.서면월곡에살던송영종유족은국가보상금으로선산아래에비석을세웠다.비석에는서면희생자200여명의이름이새겨져있다.월치재에서3월에100 여명을집단학살했고12월에는11명을1월에는12명을살해했다.기동보아구지에서는입산자가족이라고아들을끌어내고불지르고판교리뒤편으로끌고온사람들에게구덩이를파게하고밀어넣고사살했고2세아이는돌로찍어죽였다.
다섯 개의 표지에서 하나씩 따온 것이다. 띄어쓰지 않아 보기에 어색하다. 읽기도 거북하다. 내용을 이해하면 더욱 거북하다. 학살에도 띄어쓰기는 없었다.
▲ 여수 신월동 14연대 주둔지 무기고 동굴 ⓒ 윤태옥
그 다음날 여수 신월동으로 갔다. 일본해군기지에 국방경비대 14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국화약 여수 공장인데, 정문 안쪽의 동굴 하나는 개방돼 있다. 여순10.19 당시 무기고였다. 동굴 내부는 서늘했고 역사는 싸늘했다.
여수 14연대는 1948년 10월 초부터 제주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을 준비해왔다. 미군으로부터 신무기를 보급 받고 시가전 훈련도 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14연대 사병들은 동향인들을 진압한다는 것에 당혹스러워 했다. 광주 4연대, 제주 9연대, 여수 14연대 모두 광주 5여단 소속이었다. 이들은 모병제로 충원한 향토사단이라 사병들 대부분은 호남 출신이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살벌한 숙군(肅軍)이었다. 당시 군내에서는 좌익 계열을 솎아내는 사상 검열과 숙청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제주4.3으로 인해 숙군의 칼날이 더 날카로워졌다. 4.3을 잔혹하게 토벌하자 제주 9연대의 사병 41명이 탈영하는 등 심하게 동요했다. 급기야 강경 토벌의 주역인 11연대장 박진경이 부하들에게 피살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숙군은 더욱 거칠어졌고, 10.19 직전 14연대 본부 하사관 김영만이 체포되면서 이곳의 남로당 조직은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10월 19일 지창수 상사 등 14연대의 남로당 당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제주4.3 진 압을 동족상잔이란 이유로 거부하면서 총부리를 돌린 것이다. 순식간에 여수 주둔지의 2천5백 병력 가운데 2천여 병력이 가담했다. 경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거짓말도 먹혀들었다.
미군정기에 대한민국의 경찰과 군대는 사이가 아주 나빴다. 국방경비대는 경찰을 '일본 앞잡이'라고 폄하했다. 경찰은 군대를 '빨갱이 소굴'이라고 비난했다. 1947년 6월에는 여수 14연대의 모부 대인 광주 4연대 장병들이 영암의 경찰들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군인만 여섯이 죽었는데 경찰은 총격전에서 이겼다고 표창까지 했다. 군경의 감정대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모른다.
소수 남로당 조직이 명분을 내세우고 사병들의 감정까지 파고들자 봉기는 폭발적이었다. 봉기군은 여수 경찰을 제압했고 여수 인민위원회가 재조직됐다. 이때 적지 않은 경찰과 우익계 인사들이 살해됐다. 이틀 만에 경찰관 59명, 의용경찰 20명, 의용소방대원 5명, 우익계 인사 10명, 기독교인 7명, 경찰관 가족 40명이 죽었다. 봉기군의 일부는 10월 20일 김지회의 지휘 아래 순천으로 진출했다. 순천에 주둔하던 14연대의 2개 중대가, 곧이어 광주 4연대의 1개 중대가 봉기군에 합류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반군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대전 이남의 육해공 전 력을 총동원하다시피 했다. 10월 27일 여수를 탈환했다. 광양 방면의 봉기군은 진압군에 막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소위 '구빨치산'의 시작이었다. 여수 잔류 봉기군은 5연대의 상륙을 저지하고 미평리에서 일시 승전하기도 했으나 결국 진압군에 밀려 백운산으로 들어갔다.
진압군은 봉기군을 추적하며 부역자를 색출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죽어나갔다. 봉기군들이 밥을 먹고 간 것만으로 마을이 집단학살을 당했다. 그들이 봉기군의 일부로서 밥을 한 것인지, 밥을 빼앗긴 피해자인지는 따지지 않았다. 부역 혐의자가 잡히지 않았다고 가족 한 명을 대신 끌어가기도 했다. 구례군 산동면에는 오라비 대신 죽은 백순례가 끌려가며 불렀다는 '산동애가'라는 비참한 노래가 전해진다.
여수의 부역자 색출에서는 또 다른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진압군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민들을 모아놓고는 부역 혐의자들을 그 사이로 걷게 했다. 누군가 손가락질 하면 그는 부역자로 확정됐다. 말없는 '손가락 총질'은 곧 총살이었다. 여수의 서초등학교와 중앙초등학 교의 정문 옆에 세워진 10.19 표지는 손가락 총질의 잔혹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 여수 만성리 형제묘 ⓒ 윤태옥
여수의 만성리에서는 부역혐의자들을 해안에서 집단 총살하고는 시신더미에 불까지 질렀다. 뒤엉킨 채 타버린 시신들을 일일이 수습할 수 없어 한꺼번에 묻은 것이 형제묘(만흥 동 162-2)이다. 송욱 여수여자중학교 교장이나 박찬길 순천지검 검사 등 지역유지들도 증거나 재판 없이 처형될 정도였다. 1949년 전남도청의 조사 결과 피해자는 1만1131명이었다. 실제 피해자는 그 이상일 것이다.
제주에 이어 여수 순천 구례에서, 그리고 전쟁 발발 직후의 전국적인 보도연맹 학살까지, 왜 이렇게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토벌과 학살이 벌어졌을까. 좌우의 차이를 비롯해 생각의 차이와 이해관계의 갈등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갈등이 곧 학살은 아니지 않은가.
한 가지는 장교 집단의 전력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진압군 장교들은 일본군 과 만주군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만주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등의 반일 무장그룹을 토벌한 실전경험을 갖고 있었다.
일제는 잠정징치도비법(暫定懲治盜匪法)으로 군경 책임자에게 임진격살(臨陳格殺)이라는, 재판 없는 즉결처형 권한을 부여했다. 잔인한 학살을 정당화시키며 무수한 생명을 땅바닥에 패대기쳤었다. 이승만 정부의 구호는 자유와 민주주의였지만 군경의 행동은 일제의 강압통치에서 습득한 거의 그대로였다.
학살이 아닌 사형집행도 많았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백 명씩 무더기로 판결하는 군법 회의는 재판이라기보다는 총살자 명단작성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게다가 당시는 계엄법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계엄령으로 설치한 고등군법회의 자체가 무법 내지 불법이란 비판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70여 년이 지난 오늘 그때의 진상을 조사하고 명예를 회복해주라는 특별법을 제정한 근거의 하나가 되었다.
제주4.3과 여순10.19는 한국전쟁이란 전면전으로 가는 경유지였다. 대한민국 국가건설 과정에서도 중대한 표지석이 됐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이후 1948년 12월 1일자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실정법으로 극우반공 체제를 구축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또한 두 사건을 통해 군대는 가장 강력한 국가기구가 됐다. 군의 명령은 종종 법보다 먼저였다. 대내로는 숙군을, 대외로는 진압작전을 벌이면서 일반 민간인은 물론 국회의원이나 공무원까지 연행했다. 헌병대가 벌인 국회프락치사건(1949~1950년)도 그렇다. 한국전쟁 이후에 벌어진 5.16이나 시월유신, 10.26, 12.12, 5.17 모두 군이 가장 강력한 권력기구로 작동한 사례들이다.
다음 주제인 창군의 현장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75년 전의 사건을 되짚어 보았다. 여순10.19는 반란이란 항목에는 작은 점이 찍혀 있고, 학살에는 커다란 방점이 찍혀 있다. 수십 년 동안 강요된 침묵 속에 상처는 아물지 못했고, 결국 75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여순 특별법을 목도하고 있다. 그래, 그때는 그랬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러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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